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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2015년 4월 19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루가 24,35-48)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지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제2독서). 복음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박영식신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에 속한 선수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씨와 함께 금세기 최고 선수다. 호날두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해 자수성가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세계 최고 축구선수가 되었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굶주리며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결국 가난이 나를 잡아먹었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나는 너무 두려웠다. 형은 마약중독자요 늘 마약에 취해 삶의 의욕도 잃어버렸다. 가난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분은 청소부 일을 하는 우리 어머니이셨다. 나는 청소부 일을 하는 어머니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느 날 빈민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나에게 저 멀리서 축구를 하는 동네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나를 축구팀에 끼어주지 않는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우연히 날아온 축구공을 찼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어머니, 저도 축구가 하고 싶어요. 축구팀에 보내주세요.’ 어머니는 철없는 아들의 부탁에 당황했다. 우리 가정 형편으로는 비싼 축구비용을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꿈을 무시하지 않고 나를 데리고 이 팀, 저 팀을 알아보러 다니셨다. 나는 겨우 저렴한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패스 한번 받지 못했다. 조명이 꺼지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 혼자 남아 축구공을 닦아야 했다. 나는 낡은 축구화를 수선해서 축구를 하고 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심장이 정상인보다 두 배나 빠르게 뛰는 질병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앞으로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다행히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하면 정상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이 좋아질 수 있다는 진단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하여 비싼 수술비를 지불 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와 형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약을 끊고 취직했다. 마침내 일 년 뒤 온 가족이 모은 돈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이었다. 나는 재활을 마친 뒤 더욱더 열심히 훈련을 계속했다. 동료들이 나에게 공을 건네주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꿈속에서 그리던 축구장에 처음 올라가 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수많은 관중과 응원자들, 유명 축구팀을 발굴하려는 이들이 경기장을 꽉 매우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축구장! 나는 이 무대에서 죽을 각오로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져도 좋다.’ 그렇게 나의 첫 시합이 끝났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자기를 다른 리그 축구팀 감독이라고 하며 나를 이적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꼈다. 나에게 전화를 건 분은 세계 최고 구단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님이었다. 전화가 끝나자 나는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흐느끼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더 이상 청소부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요.’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수화기를 잡고 울고 계셨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난 축구화, 외톨이, 심장병을 가진 소년이 세계 최고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축구 선수들 중에서 재산이 제일 많다. 전 재산이 2,191억 원이요 연봉이 250억 원이다. 2위가 리오넬 메씨이고, 그의 전 재산은 2,161억 원이다. 호날두는 축구 선수 중 몸값이 제일 높다. 그가 해마다 기부하는 금액은 우리나라 사람 5천만이 한 해 기부하는 금액을 넘는다. 공익을 위한 광고는 조금의 돈도 받지 않고 촬영하게 하고 소말리아에 300억 원을 기부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술비 전액을 지원하고, 현재 아동질병 퇴치와 아동구호 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호날두는 운동선수들이 흔히 하는 문신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가 문신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기 위함이란다. 문신을 하면 1년쯤 헌혈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날두의 가장 멋진 문신은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며 자리 잡은 자국’이라 하겠다.
호날두는 어머니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고 따르는 천주교신자다. 호날두가 묵주목걸이를 차고 있는 사진이 많다. 천주교 신자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천주성자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고 선포한 제자들의 복음을 믿고 따라 부활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믿음의 눈을 떠야 부활신앙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믿음은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선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수 있다. 간접적으로는, 우리는 복음을 실천하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르기도 한다.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거나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사명감을 깨닫는다. 이런 뜻에서 호날두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자기의 연봉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을 위해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받들고 존중해야 하는 이는 강자나 인기 있는 운동선수나 가수나 배우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병고 시달리는 약자들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무시하는 무신론적인 현대세계를 하느님께 종속시킬 사명을 그리스도께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지상 생명과 수명과 재물과 권력이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방법임을 삶으로 드러내야 하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행복과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
세월호 침몰로 삼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생매장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정부는 그 동안 안전 불감증에서 깨어나 침몰원인을 찾아내어 고칠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 깊이, 더 광범위하게 정경유착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언론인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썩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성 싶다.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과 공직자들이 돈에 미쳐 정의와 법을 짓밟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시정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임금님이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인 우리나라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부활믿음에 반대되고 이 믿음을 파괴하는 것은 탐욕과 권력욕이다. 이 둘에 집착하는 국민들의 나라는 범죄의 온상이요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용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부활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만방자해지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썩는 냄새가 나며, 그의 인생이 한없이 슬퍼진다.”(채근담 후편).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인간의 치욕이다.”(카네기)
“부란 분뇨와 같아서 그것이 축적되면 악취를 내고, 널리 퍼뜨리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톨스토이)
“부자의 가장 큰 행복은 자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 브뤼예르)
“가난해도 족함을 알면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지만, 아무리 부자라 한들 가난뱅이가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만 한다면, 엄동설한 같이 쓸쓸하기 그지없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존경받는 부자는 적시적소에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고,
가장 건강한 사람은 늘 웃는 사람이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장현우 신부-
고작 사흘 전, 제자들은 스승과 축제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이 만찬이 스승과의 마지막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경비병들이 들이닥쳤고, 스승은 붙들려갔습니다.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스승마저 버리고 도망쳐 숨었습니다. 결국 스승은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처참한 모습으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제자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유다인들의 광기가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상실한 채, 그렇게 사흘을 숨죽이며, 잠 한숨 못 자고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이제는 스승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이 평화는 단순히 박해의 위협과 삶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평화가 아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박해조차도,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깨뜨릴 수 없는 평화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의 베드로 사도도 이러한 주님의 평화 속에 있기에, 거침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들을 고발하고 죽이려 드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더 당당하게 소리치며,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권력과 폭력에 굴하지 않는 영혼의 자유로움, 세상의 논리와 인간적 계산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화, 이것이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아파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희망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로 다가오십니다. 젖먹이가 엄마 품 안에서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육체는 비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지라도, 그 마음만은 주님 안에서 평화롭습니다. 세상에 대한 어떠한 걱정도 벗어버린 채, 오로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나의 위로와 희망이 되어 주신다는 기쁨이, 우리를 참평화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각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한두 가지씩 전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발현 정황(情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각 복음서가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모든 사람 앞에서 확인된 객관적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과 발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각자 갈릴래아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믿던 바를 전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각 공동체가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재생(再生)하여 보도합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아서 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초기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알아듣고, 우리도 그 믿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발현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것은 부활하신 분에 대해 초기 신앙인들이 갖고 있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한 순간에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과 뼈를 가지고 살아계실 때, 그분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기쁨이었지만, 또한 믿어지지 않는,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믿음은 곧 새로운 자각(自覺)과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 새롭게 자각합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과거 이스라엘의 신앙 문서들을 새롭게 읽고, 새롭게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체험에 충실하셨습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왜곡된 유대교 안에서 그것을 시정하는 노력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노력이었고, 또한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살과 뼈는 죽어도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무작정 지키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함께 살아 계시도록 살기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 지키기에 정신을 빼앗겨,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나무는 보아도 숲을 보지 못한 격입니다. 예언자들은 그 잘못 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외친 분들입니다. 각 예언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되찾아야 한다는 외침이라는 점에서 예언자들의 부르짖음은 공통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에도 반발하였습니다. 시편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여러 상황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노래한 문서입니다.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문서들 중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이 세 가지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그 문서들이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닫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초기 신앙인들은 새로운 실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이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지키고 바치는 일에 열중하면, 성취감은 있어도, 하느님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생명을 미워하고 죽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서라고 요약한 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명을 아끼고, 용서하며, 보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회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는 고행이나 보속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사람이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선하신 하느님, 용서하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로 시선을 돌려 우리도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과도, 빌라도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어 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