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익 金天益 (1890 ~ 1922)】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활동"
1890년 4월 1일 평안남도 평원(平原)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 이후 항일의병이 독립운동근거지로 두만강 넘어 만주의 서간도 지역을 주목하고 이곳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다. 항일의병 다음으로 서간도지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주목되는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인물들이다. 이회영(李會榮)과 이시영(李始榮)의 6형제를 비롯해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1911년경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서간도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은 그 곳에서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여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군비(軍備)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 같은 인식 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된 대표적인 단체가 신민회 회원들이 서간도(西間島)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신흥무관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다. 본과는 4년제의 중학과정에 무관교육을 겸하였고, 특별과는 3개월 또는 6개월 기간의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여러 독립군 부대에 편제되어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친일행위자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정서(軍政署) 의용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류허현 삼원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군정서는 군정부(軍政府)가 개편된 단체였다.
1919년 3월 13일 류허현 삼원보에서 부민단(扶民團)과 교육회(敎育會)·자신계(自新系) 등 세 단체가 통합하여 한족회(韓族會)가 결성되었다. 한족회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산하에 무장대오인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1920년 3월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군정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하였다. 군정서에서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간도 거주 한인들에게 군자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평안도와 경상도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자금을 모집하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2년 9월 2일 오후 4시경 만구령(灣口嶺)에서 일제경찰과 교전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천익 전사 보도 기사(『독립신문』 1922. 10. 21)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