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의 혈통을 둘러싼 논란
<삼국사기> 온달열전에는 그의 조상에 관한 기록이 없다.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매우 가난하게 성장했다는 사실뿐이다. 어릴 적의 온달은 길거리에서 음식을 얻는 사람이었고, 공주를 만날 당시의 온달은 산에서 벤 나무껍질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온달의 혈통을 그냥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가난했는데도 결국 태왕의 사위가 됐으니,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온달은 왕실의 외면 속에 공주와 결혼했다. 그런 뒤 577년 전국사냥대회 1등과 그 직후의 전쟁 공훈을 발판으로 태왕의 사위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같은 신분끼리의 결혼이 강조됐다. 성적과 전공이 발판이 되기는 했지만 결국 태왕의 사위로 인정됐으므로,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온달열전은 그가 가난했다는 점만 알려줄 뿐, 그의 원래 신분이 낮았다는 점은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해석의 여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공주가 어렸을 때 태왕은 '이렇게 자꾸 울면 사대부의 아내가 되기 힘드니 바보 온달에게 보내야겠다'고 농담하곤 했다. 이 말은 온달이 조정 관료인 사대부가 될 자격이 없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고, 자격 여하를 떠나 너무 가난하므로 사대부가 되기 힘들어 보였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만약 태왕이 후자의 의미로 그 말을 했다면, 온달의 경제력과 원래 신분이 완전히 부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 온달 어머니가 했던 말도 음미해볼 만하다. 앞을 못 보는 어머니는 몸에서 나는 냄새를 근거로 손님의 사회적 지위를 추론했다. 그는 향기가 심상치 않다며 상대방이 귀인일 거라고 판단했다. 이 귀인이 자기 아들한테 마음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느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陋)해서 귀인께서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누(陋)는 '천하다, 신분이 낮다'는 뜻도 있지만 '배운 게 적다'로도 번역된다. 만약 온달 어머니가 "내 아들은 가난하고 배운 게 적어서 귀인께서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라고 말했다면, 경제력이나 학식만 뒷받침되면 온달이 공주를 가까이 할만한 신분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렇게 온달 어머니가 경제적 차이를 강조한 것은 자기 아들과 공주를 가로막는 최대 요인이 신분이 아니라 경제력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비슷한 해석이 학술 논문들에서도 나오고 있다. '온달은 귀족의 아들이다'라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정도의 추론을 제시하는 논문들이 있다. 역사학자 이기백(1924~2004)은 1967년 <백산학보> 제3호에 기고한 '온달전의 검토'에서 온달이 받은 기록상 최초의 관등이 대형(大兄)임을 근거로 비슷한 추정을 내놓았다. 대형의 등급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제각각이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형은 12~14개의 전체 관등 중에서 2~7관등 정도였다.
이를 근거로 이기백은 "대형이라는 관직을 차지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실과 자연스럽게 결혼할 수 있는 고급 귀족은 아니었더라도 하급이나마 귀족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추정이었다.
비슷한 추정이 2004년에 <한국 고대사 연구> 제36호에 실린 박인호의 '온달을 통해 본 6세기 고구려 귀족사회'에도 나온다. 이 논문은 온달이 사냥대회 1등 성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이전의 고구려 정치상황을 근거로 온달의 신분에 대한 추정을 시도한다. 그 이전에 있었던 대형 정변들로 인해 몰락한 가문들 속에 그의 집안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추정이다.
이 논문은 "온달은 국내(평양 이전의 도읍) 지역에 기반을 둔 국내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런 뒤 "531년 안장왕의 피살, 545년 안원왕 사후의 정쟁, 557년 환도성의 반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왕경과 지방에서 끊임없이 혼란스러웠다"며 "여기서 완전히 쇠락한 세력도 있을 것이나, 중앙정계에서 밀려났을 뿐 여전히 세력 기반을 유지한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 뒤 "온달 역시 이러한 세력의 인물"이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한편, 온달을 정통 한민족이 아닌 중앙아시아 혈통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었던 강국(康國)에서 온 혈통일 수도 있다고 추론하는 관점이다. 그 근거 중 하나는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 '강국 열전'에 나오는 "그 왕의 성이 온씨"라는 대목이다. 2011년에 <백산학보> 제89호에 실린 지배선 연세대 교수의 논문 '사마르칸트(康國)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는 "강국의 왕성(王姓)이 온씨라는 사실은 <자치통감>의 호삼성 주(註) 외에 <위서>의 '강국전', <북사>의 '강국전', <구당서>의 '강국전', <신당서>의 '강전(康傳)', <전당서>의 '왕오륵가'에 각각 쓰여 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대당서역기>에 강국 용사들은 성질이 용맹하여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나타날 적이 없을 정도로 용맹하였다. 강국인은 용맹해 말 타기를 잘할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상술을 배우기 위해 타국으로 여행하였다. 게다가 고구려는 물론이고, 강국인은 신라와 백제까지 저들의 상권으로 삼았다."
온달의 출중한 무예가 강국인들의 기질적 특성에서 연유한 것이었을 가능성과 함께, 상인이 되어 고구려를 방문한 강국인 중 하나가 온달의 아버지였을 개연성을 제시하는 글이다. 온씨가 흔한 성이 아닌데다가 강국 왕실이 온씨 성을 썼기 때문에 이런 주장도 나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온달의 혈통을 두고 이 같은 논란이 생기는 것은 <삼국사기> 온달열전이 사실을 불충분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온달의 삶이 극적이라서 후세의 관심이 지대한 데 반해 그에 관한 정보가 너무 소략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고 있다. 어쩌면 온달을 둘러싼 그런 모호함이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하면서 후세의 관심을 지속시키는 요인인지도 알 수 없다.
온달의 조상이 평민이었건 하급 귀족이었든 아니면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그가 가난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입지전적 과정이 온달을 이해하는 데 훨씬 본질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