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지 김주(金澍)가 위관(委官)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이해 등이 끝내 승복하지 않으니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해와 이치(李致)를 감사(減死)로 조율하라.”
하였다. 금부에서 조율하여 입계하였다. 이해는 장 일백에 유 삼천리로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는데 유배가던 도중 죽었고, 유섭은 도삼년으로 잔수역(潺水驛)에 유배되었으며, 이치는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이치가 전에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가 공을 믿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린다고 탄핵했기 때문에 이기가 앙심을 품었었다. 마침 이치가 유신 현감(維新縣監)으로 있었는데, 고을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향중(鄕中)의 회문(回文)을 얻어가지고는 그것을 모반(謀叛)이라 생각하여 고변하였다. 이치가 살펴보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감사 이해에게 첩보(牒報)하고 곤장을 쳐서 죽었다. 이해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역시 이기의 행실이 개돼지와 같다고 논박하였기 때문에 이기가 또한 분을 품었는데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이홍윤(李洪胤)의 가산을 적몰할 때에 홍윤의 형 이홍남(李洪男)이, 어미가 죽어 아직 빈소(殯所)에 있었는데 상복을 입고 관부에 나와 홍윤의 재물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어떤 물건은 내 것이니 돌려 달라.’고 하였다. 이해가 이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공청(公廳)에서 ‘고변으로 가문이 다 멸망했겠지만 어미의 몸이 아직 식기도 전에 상복을 입고 관부에 들어와 자기 동생의 재물을 찾아가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홍남이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사실을 날조하여 자기의 처형인 원호변(元虎變)에게 고하고 호변은 그의 숙부인 원계검(元繼儉)에게 말하였으며, 이기가 대사헌 송세형(宋世珩)에게 부탁하여 같이 발론하게 하였다. 이 해는 또 윤원형에게 붙지 않았는데, 원형이 당시 금부의 추관으로 있었다. 그러므로 가장 혹독한 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