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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보완!
스리랑카 말로 ‘아유보완’( AYUBOWAN)은 '오래사세요, 건강하세요' 라는 의미다. 스리랑카의 일상적인 인사법이다. 즉 우리나라의 ‘안녕하세요’와 같은 것. 여기 사람들은 만날 때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이며 아유보완이라고 한다.
2011년 2월 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 천하장군이 15번째 해외답사로 다녀온 곳은 바로 스리랑카. ‘찬란히 빛나는 섬’이라는 의미의 스리랑카는 인도 옆에 있어 ‘인도의 눈물’이란 별칭도 붙어 있다.
스리랑카는 영하 10도를 넘나들던 한국의 겨울날씨와는 무려 40도 이상 차이가 나는 열대우림지역이지만 우리 일행 모두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여행을 즐긴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스리랑카를 누비며 야생코끼리와 공작을 만나고, 지천에 있는 원숭이와 이름모를 새들을 보며 원시의 스리랑카를 흠뻑 느꼈으며, 찬란한 불교유적에서 그 문화의 깊이와 그윽함을 느끼기 충분했다.
한국에서 스리랑카까지는 아직 직항노선이 없다. 우리는 태국의 수도 방콕을 경유해 스리랑카로 향한다. 잠시 들린 방콕에서 태국마사지를 받았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전신마사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어른신이 유독 많은 우리 여행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뼈마디 근육 하나 하나 꾹 꾹 눌러주는 태국처녀들의 마사지에 감동을 받아 연신 칭찬이 이어진다.
저녁식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식당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로얄드래곤>에서 했는데 식당이 어찌나 넓은지 서빙하는 직원들이 롤라스케이트를 타는 것으로 유명한 식당이기도 하다. 워낙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받아선지 유명세에 비해 음식의 질은 좀 떨어지는 편이다.
방콕, 로얄 드래곤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스리랑카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과의 시차 3시간 반을 적용하고도 현지시간이 새벽 1시가 넘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길고 지루한 시간 끝에 어렵게 도착한 스리랑카. 숙소인 니곰보에 있는 바닷가 호텔은 심플하고도 감각적인 나무인테리어 돋보이는 세련된 곳이었다. 모두들 내일부터의 본격적인 스리랑카 여행을 기대하며 곤한 잠에 빠져든다.
2월 7일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우리가 묵은 호텔은 바로 바닷가 앞. 바다가 보이는 1층 야외테라스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까마위와 다람쥐가 겁도없이 우리 곁을 서성이고 바닷가 야자나무 너머 바다에는 돛단배가 둥둥 떠 있다. 아침식사 후 바로 떠나기가 아쉬운 아름다운 바닷가다.
우리의 가이드를 맡아준 씽은 스리랑카에 있는 총 5명의 한국말을 하는 현지가이드 중 외국인노동자 출신이 아닌 유일하게 한국어를 익힌 가이드다. 한국발음도 꽤 정확하고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 여행 내내 큰 불편없이 여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끔은 한국 사투리나 관용적인 표현까지 알고 있어 우릴 즐겁게 하기도 한 성실하고 착실했던 씽과 함께 본격적으로 스리랑카투어를 시작한다.
드디어 버스 탑승 스리랑카 첫 번째 방문지인 아누라다푸라로 출발!
스리랑카 첫 번째 수도로 2천5백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 아누라다푸라는 최초로 불교가 들어온 곳으로 여기서 기틀을 잡은 소승불교는 이후 버마, 태국, 캄보디아로 번져나간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니곰보에서 아누라다푸라로 이동하는데 점점 비가 굵어진다. 아누라다푸라 곳곳이 집중호우로 수해를 입고 길이 물에 잠긴 곳이 많았다. 워낙은 우기가 끝났어야 하는데 여기도 이상기온 탓인지 비가 안 그치고 있는 것. 우산을 받쳐 들고 <이수르무니야 사원>을 돌아본다.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작은 호수를 끼고 있으며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눈에 띈다.
다음은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의 딸 싱가미타가 석가모니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옮겨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보리수는 수령 2300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최초의 가지에서 시작해 지금은 나무가 커지면서 여러 줄기가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 어떤 것이 최초의 가지인지 가이드가 설명해주기는 확인조차 어려웠다. 나중에 금색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가지가 싱가미타가 옮겨온 최초의 가지란 걸 알 수 있었다.
부처님 머리카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인 <루완웰리세야대탑>으로 걸어서 이동하는데 큰비를 만난다. 우산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사원에 들어가느라 벗었던 신발을 손에 들고 대탑으로 향하던 우리들은 큰나무 밑이나 불상처마 밑에 비를 피하다 결국은 운전기사가 가져다준 우산을 받쳐들고 차로 이동한다. 폭우 탓에 대탑방문은 차안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
차로 이동하면서 보니 아누라다푸라 곳곳이 물난리다. 물에 잠긴 집이 지천이다. 그 많은 수재민들은 어떨지 걱정이 된다. 그런데도 나무에다 옷을 말리고 길거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버스 안의 우리랑 눈이 마주치면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그 미소는 뭐란 말인가, 천연스러운 그들의 표정이 수해랑 겹쳐지면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다.
<미힌탈레 사원>으로 갔다. 많은 스님들이 한꺼번에 식사하던 엄청나게 큰 밥그릇과 반찬그릇, 우리와는 다른 무덤양식을 보고는 계단을 올라 <마하세야대탑>을 둘러본다. 날이 맑았다면 멀리까지 전망이 훌륭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물안개 낀 스산한 풍광도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버스를 타고 미힌탈레 사원을 나오는데 버스가 산길 좁은 바위틈에 끼어버렸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비는 뿌리는데 비포장흙길 바위틈에 낀 버스. 시끄러운 공회전소리와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우린 공포감에 휩싸인다. 한국처럼 바로 견인차가 올 동네도 아닌 거 같은데 만약 버스가 못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하는 공포감. 다행히 날렵하고 부지런한 조수와 베스트드라이버의 노력으로 무사히 바위틈을 빠져나와 숙소를 향해 고고씽.
큰 호수 옆에 위치한 호텔로 향하는데 우리 버스가 물길을 가른다. 도대체 얼마나 깊은 물길을 버스로 돌진하는 건지 주위는 깜깜할 다름이고 암튼 우리는 어렵게 돌고 돌아 숙소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호숫가 호텔과 맛난 저녁식사. 노곤한 여독으로 스리랑카에서의 둘째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2월 8일 화요일이 밝았다.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우리 호텔은 칸달라마 호수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호숫가 안개와 맑은 공기, 새들과 다람쥐가 바로 옆을 지나다니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침 일찍 일어난 부지런한 분들은 호숫가를 산책하고 아름다움을 칭찬하신다. 내일은 꼭 가봐야지 다짐해본다.
든든히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에 탑승, <시기리야록>으로 향한다.
시기리야록은 이번 스리랑카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이라이트.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기암 꼭대기에 왕궁이 있는 곳, 20여 미터 벼랑 끝에 지어진 왕궁과 절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18미인도>, 지금도 풀 수 없는 정교한 치수시설, <거울의 회랑>이 유명한 곳이다.
호텔을 출발해 시기리야로 향하는데 갑자기 버스가 섰다. 기아 변속이 안된단다. 어쩐지 어젯밤 바위틈에 끼고, 호숫가 물길을 가를 때 과연 이 버스가 무사할까 걱정되더니. 물길을 달릴 때 다들 ‘수륙양면차라고 이제 남은 것은 하늘을 나는 것뿐’이라고 즐거워했지만 결과는 버스고장이다. 다행히 다른 버스로 신속히 교체해 준다니 다행.
잠시 새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 길가에 구경나온 동네주민과 인사하고 화장실도 빌려 썼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나탈리는 엄마랑 같이 구경나왔다가 우리가 건네준 볼펜과 머리핀에 즐거워한다. 나탈리 엄마는 기꺼이 우리일행에게 화장실을 빌려주고, 집안까지 구경시켜줬다. 차 고장으로 스리랑카 현지인의 집을 둘러보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기대보다 꽤 신속하게 새 버스가 도착한다. 버스 속을 보는 순간 우린 모두 기겁을 했다. 작은 미니버스로 좌석을 개조했는데 의자 사이의 통로 넓이가 불과 30센티도 안돼 보이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 무리하게 사람을 태우려고 좌석을 만들어 넣은 티가 역력하다. 오늘만 해결하면 내일은 다른 차를 보내준다는 말에 모두들 너그럽게 이해했지만 정말 너무 심했다. 다들 날씬해서 망정이지 뚱뚱한 사람은 뒷좌석으론 갈수도 없는 차였다.
버스교체라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시기리야에 도착. 시기리야는 사자바위라는 뜻이다. 시기리야왕궁에 살던 카사파왕은 부왕을 죽이고 왕위를 뺏은 뒤 이곳에 지내다가 결국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이 된 동생은 시기리야를 스님들께 봉헌하였고 스님들이 거처를 옆 산으로 옮긴 뒤 외부에 숨겨졌던 이곳 시기리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암벽 꼭대기에 만들어진 수영장과 물탱크 등 정교한 치수시설의 원리는 현대에도 밝히지 못하고 있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힌다고 한다. 시기리야 정상까지는 12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드디어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바위에 새겨진 18미인도를 보러가기 위해 원통으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한 철제계단을 오를 땐 다리가 후들거린다.
거울의 회랑을 지나 왕궁으로 오르는 사자바위 입구에 도착. 무시무시한 발톱만 남은 사자바위 입구 위로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한 두 명을 빼고는 우리 일행은 모두 정상이 있는 왕궁까지 올라 시원한 전망을 감상하고 왕이 놀던 수영장 등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카사파왕은 무슨 우여곡절로 이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살게 되었을까 역사의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숨어산다면 조용히 살 것이지, 산 위에 대규모 수영장 짓고 호사를 누리는 왕 때문에 고생했을 백성들의 애환도 짐작되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들린 곳은 플론나루와.
인도인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던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가 인도에 쫓겨 남쪽으로 이동, 아누라다푸라에 이어 건설한 두 번째 수도이다. 플론나루와는 세계 각국에서 수도승들이 찾던 국제적인 불교 도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왕궁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유적들의 규모도 대단하다.
처음 들린 <포트굴비하라>는 일명 도서관사원이다. 많은 스님들이 와서 공부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석립상>을 본 뒤에 <플론나루와 왕궁>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스리랑카에 남아있는 가장 큰 왕궁이다. 원래 7층에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있다. <쿼드랭글>은 싱할라 왕조 당시 불치를 모신 사원이 있던 곳이다. 스리랑카에서 불치는 왕조의 정통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현재 불치는 마지막왕조가 있던 캔디 불치사에 모셔져 있다.
포트굴비하라
수수께끼석립상
왕궁
문스톤
쿼드랭글 사원
플론나루와 마지막 답사지로 <랑카틸라카>와 <갈비하라>를 방문했다. 랑카틸라카는 12세기에 만들어진 불교사원으로 지금은 머리없는 입불상과 기둥의 일부 벽면만 남아있지만 그 규모와 조각의 정교함에서 당대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갈비하라>는 바위사원이라는 뜻으로 암벽에 조각한 4개의 불상이 있는 사원이다. 그 중에서도 누워있는 14미터 길이의 열반상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플론나루와 유적의 백미로 꼽힌다.
랑카틸라카
갈비하라 열반상
2월 9일은 이틀간 묵었던 호숫가 아름다운 호텔을 떠나 담블라황금석굴을 둘러보고 캔디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코끼리가 자주 나와 논다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저멀리 섬에 행여 코끼리가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코끼리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구름과 물안개가 낮게 깔린 호숫가의 일출과 고깃배, 유유자적 거니는 새들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바로 호텔 앞이라 조금은 인위적으로 정리된 원시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과연 어디서 이런 풍광을 만날 수 있으랴, 감상에 빠져들기 충분했다.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나와 보니 반짝반짝한 새 버스가 우릴 기다린다. 어제 탔던 비좁았던 미니버스여 안녕! 깨끗하고 넓은 버스에서 기분도 새롭게 남은 스리랑카 일주여행을 시작한다. 오늘부터는 슬슬 날씨가 개려는지 구름사이로 조금씩 파란 하늘이 나오기 시작한다.
<담블라 석굴사원>은 기원전 1세기 때부터 건립하기 시작하여 그 후 왕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각 왕조들의 왕이 계속해서 규모를 넓혀왔다. 지금은 총 5개의 석굴사원으로 구성돼 있다. 담블라는 바위와 물이 합쳐진 말로 지금도 바위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굴사원 마당에서는 불교신자들이 야자열매를 깨뜨리는 의식을 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하는 야자는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닌 나무 위로 올라가 직접 따온 것이라 한다. 의식으로 나뒹구는 야자열매를 원숭이가 잽싸게 채간다. 마당 앞에는 원숭이들이 떼로 있는데 큰 굉음을 내며 무리지어 싸움을 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근처에 가기가 겁날 정도로 험악했다.
담블라사원을 나와 캔디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알루비하라사원>에 들린다. 불경을 적는데 사용하는 파피루스종이를 만든 사원이다. 직접 종이에 글씨를 새겨넣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 사원에는 법정스님이 기증한 범종도 남아있다. 스리랑카가 2004년 쓰나미로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지원하면서 기증한 범종이라는데, 범종에는 이를 기념하는 글씨가 한자로 적혀있다.
<향신료가든>에 잠시 들렸다가 다시 캔디로 향한다. 캔디 시내로 들어서자 스리랑카를 온 후 가장 많은 사람을 본다. 비록 차창 밖으로 보는 거지만. 우리 일행과 눈을 마주치는 스리랑카 학생과 행인들은 우리의 손인사에 기꺼이 손을 흔들어준다. 호기심어린 눈동자와 부끄러운 미소가 정감있고 고맙다.
스리랑카는 도로사정이 열악하다. 고속도로는 거의 없고 왕복2차선 정도의 길은 자동차만의 길이 아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요, 코끼리와 소도 지나는 길이다. 그러니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장애물이 없더라도 최고로 낼 수 있는 것은 시속 60킬로미터. 그러니 가까운 곳도 세월아 네월아 간다. 처음엔 짜증이 났지만 어쩌면 이것은 스리랑카의 생활의 속도이고 여행자도 여기에 맞추는 것이 도리란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캔디시내에 도착하니 풍광이 아누라다푸라, 플론나루와와 다르다. 아름다운 호수와 야트막한 구릉위의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눈에 띈다. 영국인들이 스리랑카를 지배할 때 가장 좋아했다는 도시 캔디. 그래서인지 영국식 집과 건물들이 꽤 보인다.
우린 먼저 늦은 점심으로 요기를 하고 <페라데니야 식물원>을 돌아보았다. 왕실소유였던 이곳 식물원에서 영화 <정글북>을 촬영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만이 눈에 띄는 평화로운 공원이다. 엄청난 크기의 자이언트대나무, 넓게 펼쳐지며 뿌리를 내린 고무나무 등을 둘러보고는 <스리랑카 전통댄스>를 보러 이동했다.
공연은 스리랑카의 다양한 민속춤을 옴니버스로 묶어서 남여댄서들이 나와서 공연하는 식이다. 우리 일행들은 공연에 대해 반응이 별로였는데, 춤의 반주격인 음악이 너무 단조롭고 소리가 커서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반면 독일인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의 반응은 우리와 달리 꽤 뜨겁다. 이렇게 나라별로 문화에 대한 반응도 다른가보다.
오늘 우리가 묵을 호텔은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은 곳이다. 큰 버스는 갈 수없어 작은 버스로 갈아타고 이동한다. 끝없이 올라가던 버스가 선 후 내려보니 저 아래로 보이는 캔디시내의 야경이 아름답다. 공기는 맑고 꽤 화창해진 하늘에 별도 눈에 띄고 아름다운 숙소에서 하루의 피곤을 푼다.
2월 10일 목요일, 오늘은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캔디 <불치사>를 방문하는 날이다. 불치사는 하루에 세 번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황금탑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그래서 우리도 그 시간에 맞춰 불치사를 방문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참배를 하러온 현지인들로 무척 붐볐다. 모두들 공물로 바칠 작은 꽃들을 정성껏 손에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경건해보인다.
과연 전체 인구의 70%가 불교신자인 스리랑카의 문화를 느껴볼 수 있는 정경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도 불교신자들이 몇 분이 있는데, 이 분들은 운 좋게도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황금탑을 직접 알현했다. 현지인도 쉽지 않은 이런 행운을 얻은 그들은 이번 여행이 최고의 선물이라며 기뻐했다.
불치사를 나온 버스는 이제 누와라엘리야로 향한다. 스리랑카 남부 고원지대의 차밭지대인 누와라엘리야는 연중 일정한 온도와 습기 등으로 최고급 차가 생산되는 곳이다. 스리랑카의 옛 국호인 실론에 붙혀진 실론티는 지금도 홍차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캔디를 벗어나자 길은 작아지고, 산자락마다 펼쳐진 융단같은 차밭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의 보성차밭과 비슷하면서도 차밭 사이에 군데군데 큰 나무들이 같이 자라는 모습이 우리와 다르고 규모도 엄청났다.
누와라엘리야에 도착, 재배한 차를 가공하는 한 공장에 들려 직접 차를 만드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 공장은 2005년 세계에서 최다생산차밭이자 최우수차밭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녹차에 비해 홍차가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이번에 설명을 들어보니 녹차와 홍차는 재배 후에 건조할 때 상온에 두는 시간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3시간을 더 두면 색이 변하면서 홍차가 된다. 효능은 거의 비슷한데 다만 차를 마실 때 눈으로 느끼는 색감이 큰 차이다. 녹차는 색이 은은한 연두빛이라면 홍차는 오렌지빛이나 진한 주황색이 난다.
차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인데 그건 여자들이 섬세하게 차 잎을 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 일당이 5달러에 불과한 대신 묵을 수 있는 집이 제공된다고 한다. 우리같은 여행자에게는 녹색융단이 깔린 아름다운 차밭이지만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쉴 틈 없이 일하고 하루 5달러를 버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란 것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진다.
이곳만큼 질 좋고 저렴한 홍차를 구할 수 있는 곳도 없는 것은 사실. 우린 전망 좋은 차밭 테라스에서 홍차를 맛보고 선물로 줄 홍차를 한 두 개씩 쇼핑했다. 그리고는 오늘 묵을 호텔로 이동한다. 이 호텔은 200년이 된 호텔로 개인소유의 집을 호텔로 개조한 것이다.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고, 오래된 구식 옷장과 나무창틀이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방마다 화장실이나 방의 구조와 크기가 달라 서로 방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 호텔 로비에서 스리랑카 도착 후 처음으로 여행 온 한국인 커플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200년 된 구식 호텔에서 보내며 끝나가는 스리랑카 여행의 아쉬움을 달랜다.
2월 11일은 스리랑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누와라엘리야 호텔을 출발해 공항이 있는 콜롬보까지 기나긴 버스여행을 해야 한다. 호텔을 출발하고도 2시간 이상은 차밭을 돌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차밭에는 많은 여자들이 일하고 있다. 잠시 차를 세워 차밭을 둘러보고 그들과 사진도 찍어본다. 선물로 건네는 볼펜 한 자루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다시 차로 이동하는데 창밖으로 한 무리의 예식행렬을 만난다. 타이푸삼(Thaipusam)이라는 부르는 힌두교 교행예식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신에게 속죄하는 고행축제다. 몸을 고리로 지탱해 매달고 행진하는데 얼마나 아플까싶어 계속 보기도 힘들었다. 저런 고행을 스스로 자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과 바람이 전해진다. 그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그들이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콜롬보로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5일 여의 스리랑카 체류로 이곳 도로사정을 대충 알게 된 우리도 대충 마음의 준비는 했다. 하지만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버스의 속도는 오르지 않는다. 화장실을 가기위해 서너 번을 서고 점심식사도 한 끝에 드디어 콜롬보 입성.
다들 지쳐서 콜롬보 시내는 버스투어로 대신하고 시내 한복판 아라비해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지켜보았다. 해질녘에 친구들과 가족들과 바닷가로 나온 스리랑카 사람들은 한강변 고수부지로 바람 쐬러 나온 한국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 뒤로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까 서성이는 까마귀들, 돈을 받고 몸무게를 재주는 노점상 할아버지, 산책 나온 연인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스리랑카의 마지막이 아라비아해 석양과 같이 지고 있었다.
밤늦은 시각에 출발한 비행기는 우리를 방콕으로 데리고 간다. 한숨 못자고 방콕에 도착했으나 시차를 감안하니 2월 12일 토요일 아침이다. 좀 피곤하였으나 수상보트를 타고 방콕시내관광을 한다. 새벽사원과 수상가옥, 국립박물관을 돌아보았는데 설명을 맡은 화교출신 가이드의 재밌는 설명으로 피곤도 잊은 채 다닐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76층 건물의 75층 뷔페식당에서 먹었는데, 모처럼 싱싱한 회와 해산물이 잔뜩 있어 모두들 즐겁게 많이들 드셨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번 스리랑카 여행 중 가장 사랑받았던 메뉴는 열대과일 ‘파파야’가 아닐까 싶다. 나이 지긋한 우리 일행들은 제철 과일인데다 소화도 잘되고 물리지 않는 파파야를 식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접시에서 빠뜨리지 않으셨다. 그런대 방콕으로 오자 접시 메뉴가 일순간 바뀐다. 해물 일색으로. 삶은 게와 홍합, 새우, 생선에 싱싱한 회로. 역시 음식은 현지에서 나는 가장 대중적이고 싱싱한 제철메뉴가 최고란 걸 확인한다.
어젯밤에 비행기로 이동한데다 든든히 먹은 점심식사의 포만감으로 모두들 피곤이 몰려오는지 일찌감치 호텔로 이동, 달콤한 휴식으로 돌입한다. 저녁식사 나들이 때 간단히 면세점 쇼핑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콕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홍콩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무사히 입성! 드디어 즐겁고 길었던 스리랑카여행이 막을 내렸다.
스리랑카만의 색깔을 한껏 느낀 이번 여행, 국내 관광객이 3% 정도 밖에 안되는 미지의 세계 스리랑카에서 보낸 특별한 시간들... 오래동안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방콕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가 알려준 인사말이 꽤 괜찮았다. 그 인사로 스리랑카와 방콕 여행길에 만난 모든 분들에게 인사드리고 싶다.
촉디!!!
언제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행운을 빕니다.!!!
2011년 2월 18일 천하장군문화유적답사회 정지인
첫댓글 긴 답사기이지만 한편의 드라마같이 쉬지않고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사람도 여행지 스리랑카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으며
여행하면서 모두들 얼마나 즐거워하였는지 느낄 수가있군요.
값진 여행 아무 탈 없이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오심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