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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장
1. 리홍장의 약력
리홍장(1823~1901), 한국명은 이홍장(李鴻章). 중국 근대 군벌의 시조중 하나로 꼽히는 동시에 양무운동의 대표격 인물. 본래 쩡구어판(曾國藩)의 휘하에서 그의 사병집단인 상군湘軍을 지휘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후, 독자적으로 회군淮軍이라는 사병조직을 건립, 당시 실질적 최고통치자이던 서태후의 오른팔이 된다. 1865년 당시 근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군수공장인 강남제조총국을 샹하이上海에 설립하고, 이후 개인적으로 북양수군을 육성해내는 동시에 각종 민용기업과 원시적 자본주의 기업을 건립한다. 중국 근대의 많은 외교협상및 조약이 그에 의해 타결되었으며, 바로 그로 인해 청나라는 많은 국가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넘겨낼 수 있었다. 국가를 위해 반평생 이상을 바친 그는 중국 최악의 불평등조약이라 일컬어지는 1901년 신초우辛丑조약을 맺은 후 사망한다.
2. 태어나면서부터 태평천국의 난까지
들려지는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본래 쩡구어판과 같이 과거에 응시했던 경험이 있어 그와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후에 리홍장 역시 과거에 합격했고, 쩡구어판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관리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처음 관리생활을 시작한 것은 1840년대 중반, 그러니까 홍시우췐洪秀全이 막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건립할 무렵이었다.
1851년, 홍시우췐은 배상제회 회원을 규합해 중국 서남부 꾸이핑桂平현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이에 당시 중국 남부 양강兩江총독으로 있던 쩡구어판은 북진하는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과는 별개로 자신의 사병인 상군을 조직한다.
사실상 이러한 실정 자체가 청나라의 낙후된 정치제도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 서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중앙집권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이 독립적으로 군사를 양성하는 사태는 발생하려야 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수년전 아편전쟁에서도 보였듯 청나라의 봉건제도와 군사제도는 썩을만큼 썩어서, 수도에서 출발했을 법한 관군을 기다리다간 그가 다스리는 양강은 물론 동남부 연안의 모든 성이 소위 반란군의 손에 넘어갈 판이었다.
그가 이끄는 상군은 비교적 정비가 잘 된 자경농이나 하급 관리를 위주로 한 사병조직으로서 어느정도기간은 정비가 미흡하고 장비또한 열악한 태평천국군을 효과적으로 묶어둘수 있었다. 그러나 1853년 난징이 함락되고, 태평천국의 세력이 점점더 커짐에 따라(당시 태평천국은 이미 동남부와 양강 이외의 남부 성을 장악한 상태였다)상군은 점점 중과부적이라는 곤경에 빠져들었고, 초기 미숙했던 태평천국군의 전략이 점점 성숙해지면서 끝내는 스다카이石達開가 이끄는 태평천국군에 대패하여 쟝시江西의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만다. 리홍장은 바로 이런 시기 쩡구어판에게 들어가 그의 막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초기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태평천국은 1856년부터 지도층간에 내분이 일어나 흔들리기 시작하고, 때맞춰 쩡구어판은 반격을 개시한다.
이에맞서 홍시우췐은 새로운 장군들을 임명하고 어느정도의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만 이미 무너져가는 집을 대들보를 바꾼다고 다시 세울수는 없는 법...1861년, 신요우辛猶정변을 통해 통치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강남 사성(즉 쟝쑤江蘇, 쩌쟝浙江, 안후이安徽, 쟝시)의 군무를 쩡구어판에게 일임한다.
이제 집중된 군대를 운용할수 있게된 쩡구어판은 자신이 최고 통수권을 맡고 리홍장으로 하여금 회군淮軍을 이끌고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할것을 명한다. 1864년, 홍시우췐은 병사하고 리홍장과 쩡구어판은 마침내 10여년에 이르는 긴 반란을 진압하고 한숨을 돌릴 시간을 갖게 된다.
3.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깨닫다
태평천국 시기 영국인 고든이 지휘하는 상승군 등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리홍장은 서방의 신식 무기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쩡구어판등 직접 전쟁을 수행했던 관료들 사이에 이런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어서, 마침내 쩡구어판은 안칭安慶에 군사무기제작소를 설립한다.
이는 중국에 설립된 최초의 자본주의식 공장으로, 양무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어서, 리홍장과 주오종탕左宗棠등 본래 쩡구어판의 막료였던 이들이 주축이 되어 줄지어 각지에 군사무기 제작소와 증기선 제작소 등을 설립하게 되는데, 그중 1865년 리홍장과 쩡구어판이 합작하여 샹하이에 설립한 강남제조총국은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노동자가 2000여명에 달했다.
"자강自强"이라는 말을 구호로 삼아 거세게 일어난 초기 양무운동의 주축은 쩡구어판과 리홍장같은 한족 관료로, 이는 주로 만주족으로 구성된 청나라 정부에 일종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소위 청류파淸流派라고 불리는 양무파의 반대 파벌이 형성되게 된다. 청류파는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사상을 가진 관료들 - 물론 만주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의 모임으로, 양무운동을 지탄하고 양무파를 오랑캐의 것을 배우는 이들로 매도하는 등 일종의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당파였다.
하지만 초기 서태후의 지지를 얻어낸 양무파는 이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양무운동을 진행해갔다. 본래 서방의 선진 기술이나 군사 무기를 도입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던 양무파의 관료들은 곧 교통수단의 발전과 자금의 확충이 수반되지 않는 군사기술 도입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양무파는 다시 "구부求富"즉 자본을 유입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의 기업 즉 군사기업이 아닌 광산 채굴업이나 면직업 증기선 제조업 등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또한 양무파 관료들은 한층 더 깨어 세계의 정세와 기술을 받아들여야만 국제정세에 발맞출수 있다고 믿고 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고 수도인 베이징엔 전문 번역소인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을 설립한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의 결과, 1880년대즈음에 이르러 청나라는 북양 남양 복건 3개 함대를 운용할수 있게 되었고 적지않은수의 군대가 상당히 현대화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4. 그런데 왜 자꾸 박살나는거지?
쩡구어판은 일찌감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제 양무파의 실질적인 대표인물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공이 높았던 리홍장이었다. 3개 함대중 북양수사는 리홍장이 개인적으로 양성한 것이라, 평상시에는 거의 그의 사유재산을 늘리는 데에 쓰일 정도였다.
양무파가 지난 몇십년간 이뤄낸 적지않은 성과를 보며 즐거워하던 양무파의 관료들에게 첫번째 위기가 닥쳤다. 1883년 프랑스가 베트남 주둔중인 청나라 군대를 습격, 무력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로서는 당황스럽게도 프랑스의 침략군에 반격을 개시한것은 청나라 관군이 아니라 리우용푸劉永福가 이끄는 태평천국의 잔군 흑기군黑旗軍이었다.
게다가 더욱 황당하게도 얼마 되지도 않는 흑기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런 상황속에 중국의 종속국이었던 베트남 정부와 중국 동남부의 군민들은 리홍장에게 항전을 개시할것을 요구하지만 리홍장은 되려 근엄하게 대꾸한다 : "중국 각 성의 방비상태는 여의치 않고, 수군의 훈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유럽의 강국들과 가벼이 전쟁을 논해서는 아니된다. 한순간의 승리로는 앞으로도 계속 지지 않는다 말할수 없고, 한 지역에서의 승리로는 모든 항구와 도시를 지켜낼수 있다 말할수 없느니.."
청 정부가 내보인 이런 굴복과 양보의 태도에 프랑스는 의기양양하여 1884년 해전에서 복건수군을 격파하고 1885년 중프신약을 맺어 중국 동남부의 관세 자주권과 교섭권 등을 나꿔채는데 성공한다. 그후 189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청나라는 연전연패,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많은 국토를 일본에게 할양하고 일본이 중국에 공장을 짓는것을 허용하는 등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된다.
리홍장은 반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동안 이룬 성과가 적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깨지기만 하는거지? 그러나 그의 수모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앞의 두 조약이 그의 손에 의해 조인된 것에 모자라 중국 최악의 불평등조약인 신초우 조약의 조인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협정서에 사인하고, 바로 그해 그는 생을 마감한다.
5. 리홍장이 거둔 성과와 실패
리홍장은 1860년대이후 중국 양무운동의 대표주자로서 전체적 양무운동을 이끈 실질적인 리더였다.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며 그는 본격적으로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에 눈을 돌려 중국 첫번째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이끌었지만 그는 가장 본질적인 것, 즉 낙후된 봉건체제의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해 실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양무파 관료들은 끝까지 중국식 체제를 기반으로 서양의 기술만을 가져다 덮어씌우는 식의 개혁만을 고집함으로써 부패하고 낙후된 중국의 전반적인 모습을 개혁하는데 실패했으며 그런 실수의 결과는 세번에 걸친 외침과 굴욕적 조약의 체결이라는 비참한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리홍장은 비록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이긴 했지만 타협적이고 다분히 양보주의적인 태도를 대외관계의 기조로 삼음으로써 많은 불필요한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특히 중일전쟁 당시 그는 사재나 다름없던 북양수군을 보호한답시고 적극적인 전투를 회피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책마저 보여준다.
리홍장은 숙달된 관료이며 탁월한 행정가이긴 했지만 그런 그의 능력이 기껏해야 조약 체결시 조건의 미미한 완화정도로 나타난것은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거대한 손실이다 할 만 하다. 리홍장과 양무파 관료들의 총체적인 실패는 결국 봉건주의식 제도와 교육에 물들어있던 지주귀족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리홍장은 1894년경 쑨원이 제출한 자본주의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개혁방안을 거절함으로써 쑨원이 본격적으로 개량이 아닌 혁명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나 리홍장이 주축이 되어 진행된 양무운동은 중국 군대와 생산방식의 근대화에 거대한 기여를 했으며 아편전쟁 전후로 출현했던 중국의 민족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 양무운동을 통해 더욱 발전한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면서 자강을 추구해야만 했던 비운의 정치가, 리홍장 그를 마냥 매도할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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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소전(少荃). 호 의수(儀叟). 안후이성[安徽省] 출생. 증국번(曾國藩)에게 배우고, 그 막료로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중에 장쑤순무[江蘇巡撫]로 발탁되어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하이[上海]를 방위하는 등 그 진압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회군을 배경으로 영국 ·러시아 등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사공업을 비롯한 각종 근대공업의 건설을 추진하고, 자파(自派)관료 즉 양무파(洋務派) 관료의 지배하에 두었다. 안으로는 화북(華北)의 농민반란진압을 위하여 활약하고 청말의 주요 외교문제를 거의 혼자서 장악하였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린다)라는 전통적 수단에 의하여 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일관적인 양보 ·타협정책을 취하였다.
청 ·일전쟁에 패하여 그의 권력기반이었던 북양해군(北洋海軍)과 회군을 잃고, 전권대사로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1895)에 조인하였다. 1896년 청 ·러밀약, 190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의화단(義和團)사건 진압 후 열강과 맺은 조약] 등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쇠퇴해 가는 청나라 국력강화정책으로서 근대공업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보다 앞서 1882년 조선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게 하고, 묄렌도르프 ·데니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는 등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첫댓글 그렇군요...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면서 자강을 추구해야만 했던 비운의 정치가......잘 읽었습니다....일단, 사주학적 관심으론...인생의 대부분을 대국을 경영하며 세계무대를 주름잡은,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였단 점.....으로 압축되겠군요....
리홍장 그뒤를 이어받은 원세개 한시대 를 풍미한 정치가,군인 이엇죠 원세개는 특히한 경우라 볼수 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