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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이 흘렀다고 오늘 2012년 9월 15일 17:00 에 학교로 그때의 졸업생들이 모두 모여 큰잔치를 벌인단다.
우리 63회 졸업동기들은 매년 년말, 우리 동기가 사장으로 있는 여의도 63빌딩에서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20년 이상 망년회를 하고 있는 관계로 오늘 나타날 친구들이 어느정도 모일것인지 대충 짐작 되기는 하지만 오늘은 보다 특별한 모임이고 그때 졸업한 친구들 중 연락이 닿는 친구들에겐 전국 각지로 모두 다 초청장을 보낸 관계로 오늘은 새로이 얼굴을 내미는 친구들도 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좌우지간 40년이란 세월의 흐름, 감회가 새롭다.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시절의 추억을 다시금 되새기며 지금부터 새로운 40년의 삶을 힘차게 열기 위하여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와 1960년대 말 부터 1970년대초 까지의 우리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다시 한번 그때의 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음미하고, 회상하고, 되돌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다.
마음은 벌~써 잔치가 열리는 학교로 달려간다~~~~~
토요일 일과를 마칠 시간이다. 일 마무리를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속도로 잽싸게 끝낸 후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종로 3가에서 내려 몇시 몇분인가를 확인하고 잰 걸음으로 학교 정문까지 쉴새 없이 걸어가 보았다, 일부러. 중고등학교 시절 무거운 가방 옆구리에 꽉 끼고 종로 3가부터 긴 계동골목을 쉴새 없이 뛰어 정문으로 골~인하던 기억을 되살려 그때 얼마쯤 뛰었나 계산해 보려고... 결과는 18분.. 그때 매일 같이 18분 정도를 6년동안 쉴새 없이 뛰었었구나.. 지금 그런대로 먹고 살만한것이 하루 아침에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는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태어나 압축 성장의 파도를 타고 청춘을 보냈다. 지금처럼 빈부 격차가 심하지 않은 데다 나라 전체가 쑥쑥 성장했기에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산다' '허튼 짓만 안 하면 나이 들면서 점차 형편이 풀리게 되어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대다수가 단칸방에서 고생스럽게 출발했다. 일단 '내집'을 마련하고 나면 시나브로 집값이 올라 저축과 융자를 합쳐 방 한 칸 짜리 집에서 방 두칸짜리 집으로, 다시 방이 세칸, 네칸 있는 집으로 옮겨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이런 공감대를 무자비 하게 깨뜨린게 IMF였었지만, 어쨌든 될 사람은 대체적으로 그렇게 되었고 안 될 사람은 안 될만한 이유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문을 지나 약간 가파른 입구 길을 올라가니 창립자이신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동상과 고풍스런 본관 건물이 나를 반겨준다.
이 본관 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고등학교 6년 기간중 최고참인 고3들이 마지막 1년을 소중하게 보내며 공부하는 엄숙한 곳이다. 이곳 가운데에 교무실이 있다. 고3때 열린 교내 백일장 및 그림 그리기 대회... 비원에서 내가 그린 그림이 놀랍게도 대상을 받아 이 교무실 출입문 바로 옆, 제일 좋은 자리에 한동안 자랑스럽게 전시 되었던 그때의 그 기쁨을 아직도 난 잊지 못한다.
본관을 지나니 붉은색의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인 동관과 서관, 그리고 고2때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친한 친구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던 등나무 벤취가 나타난다. 김경중 선생님 (창립자 김성수 선생님의 양부) 좌상이 예와 다름없이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다.
그때, 저 붉은 벽돌 건물 속 교실에선 이런 일들도 벌어졌었지... 제2외국어 독일어 시간... 악명 높은 선생님 앞에 늘어선 숙제 안해온 한떼의 무리들...선생님은 교단 앞에서 부터 푸쉬-업으로 한명 한명 뒷벽으로 몰고 가 머리를 코피가 날때까지 벽에다 쥐어 박는다... 모두의 코에선 코피들이 줄줄...덕분에 숙제를 안해 갈 수 없었던 우리들의 독일어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고...
곧바로 우리들의 고1 시절을 즐겁게 보내게 해준 흰색의 석조 건물, 신관이 나타난다. 그리고...
수많은 추억들이 서려 있는 운동장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로 지르는 상당히 큰 운동장 : 그때 그 시절엔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은 초록빛의 깨끗한 잔디구장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네...) 으로 들어 서니, 왼쪽 저편에 위치한 체육관 앞쪽엔 벌써 많은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이 그룹 그룹 모여 신나게 담소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언뜻 봐도 이미 100명 이상...
체육관 뒤로 이번에 새로 지어 줬다는 기숙사 건물, 삼청공원을 뒷 배경으로 하여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중학교 교정이 이어지고 그 오른쪽으로 동그스름하게 보이는 추억이 참 많이 서려 있는 도서관 건물과 그 밑으로 쭉 이어지는 秘苑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모습...
참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만드는 추억속의 풍경화... 이다.
17:00시 부터 18:00시 까지 체육관 밖에서 칵테일을 즐기면서 등록 및 이름표 달기, 친한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꽃 피우던 우리는 공식 행사를 하기 위해 체육관 안으로 모두들 들어 갔다. 와우! 이것은 체육관 실내가 아니고 공연장이다. 준비위원장을 비롯한 준비위원들의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짜임새...
그런데....... 이게 웬일~~~~ 앞쪽 라운드 테이블 에는 72세 부터 89세의 그때 그 선생님들이 10분씩이나 앉아 계셨다. 깜짝 쇼 ??? 그래, 차~암 멋진 깜짝 쇼다... 원래 오늘은 우리들만의 행사, 완전한 우리들만의 환갑잔치로 하기로 굳게들 맹세 했었는데...그래서 고3때까지 같이 과외 했던 우리 4총사, 나, 달타냥과 아토스(정형외과 원장), 아라미스(대학병원 원장), 포르토스(무역회사 사장) 이렇게 절친들이 한 테이블에서 신나게 환갑잔치를 같이 하자고 약속하고 다 같이 모였던 터... 아뭏든, 그때의 그 선생님 들과 같은 자리에서 환갑잔치 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우리 모두는 선생님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덕담들을 나누었다. 선생님들도 무척이나 반가워 하셨다... 우리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바로 그 독일어 선생님도 독일 유학, 외대 교수로 재직한 후 우리나라 독어독문학회의 회장을 지낸 거성이 되어 나타 나셨다. 우리 7반 담임이었던 PVC선생님 ( 숙제 안해 가면 PVC로 만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패서 생긴 별명 )과는 진한 포옹들을 하였다. "이젠 같이 늙어 가는구나" 하시는 선생님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안동 MBC 사장 이 윤철 동기의 사회로 잠깐의 공식 행사 (회장의 개회사, 현 교장 환영사, 장학금 천만원 전달에 대한 계원 장학회 회장님 감사의 인사, 그때 그 시절에 싸움 짱이었던 이번 행사 준비위원장의 경과보고)가 끝나고 곧이어, 아주 잘 차려진 부페로 식사들을 맛있게 하였다.
이제, 드디어 우리들만의 환갑잔치 시간을 갖기로 하였는데, 이날 오신 모든 선생님들께서 그냥 가기가 너무 아쉽다 하시면서 대표로 음악 선생님이셨던 거구의 유 충렬 선생님 노래를 우리들 환갑잔치 선물로 하사 하시겠단다.
마이크 앞에 선 음악 선생님의 첫마디... " 63회 여러분, 나는 그때 그 시절 여러분들의 그 빛나던 눈동자를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유학시절 영국의 이튼스쿨을 우연히 방문 하였을때 보았던 그 학교 학생들의 빛나던 눈동자가 여러분들의 그때 그 시절 찬란하게 빛났던 눈동자와 너무도 흡사했던 느낌이 들어 내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그 찬란하게 빛났던 눈동자를 지녔던 여러분들의 환갑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연가곡중 꽤 의미있는 한곡을 골라 특별히 부르고 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 하시면서 그분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온갖 정성을 다해 정말로 멋지게 불러 주셨다. "브라보", "앵콜"을 2번씩이나 더 반복들 하였다. 참 의미있고 너무도 좋았던 순간(!)이었다. 모두들 이렇게 훌륭하고도 멋진 선생님들 때문에 오늘의 우리들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표정들 ! 참 보기 좋았다.
마이크 앞에 선 음악 선생님의 두번째 Comment... " 내가 참교육을 실천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학교에 부임을 하였으나 학교에 부임 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단지 젊고 덩치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늘 같은 교장 선생님의 명을 받들어 종로 경찰서에 들렀던 것이었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타학교 짱을 두들겨 패고 잡혀 들어온 덩치 큰 친구, 바로 저 준비위원장 김승영과 그 옆에 아주 예뻐보였던 그의 누나가 처량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예뻤던 누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최선을 다해 빼내온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헌데 지금 이자리에서 저 친구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그때 애써서 빼내온 것이 무척이나 의미가 있었던 일인 것 같아 오늘 참 흐믓한 마음이 드네..." 라고 하시어 모두들 박장대소 !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마운 은사님들이 또(?) 떠나시고 이제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들만의 시간, 우리들만의 환갑잔치 !
이날 4시간이 넘게 능수능란하고 아주 재미있게 사회를 본 이윤철이 그 옛날, 그때의 끼를 여지 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 아 글쎄, 몇 개월전에 김승영이가 졸업 40주년 큰잔치 사회, 네가 봐라 ! 해 놓고, 오늘 행사 일주일 전까지 아무말도 없기에 속이 타 전화를 했더니, 승영이 녀석 다짜고짜 하는말이, 야~ 임마 ! 네가 환갑씩이나 되서 우리들 환갑잔치 우리들끼리 신나게 즐기면 되지 뭘 준비하고 자시고가 있냐 ? 재미~~있게 네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봐라 ! 해서, 그래... 맞다. 그 시절 철부지 였던 우리들 그대로의 모습으로 깔깔들 웃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사회를 보자 라고 결심 했다 "는 말로 모두들 웃으며 시작한 우리들의 환갑잔치 !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
맞다... 오늘의 첫무대는 품위있는 국악연주 및 공연, 서예 퍼포먼스 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연출한 우리 동기 무대 연출가 (꽤 유명한 녀석임)이 열댓명의 프로들과 함께 너무나도 멋지게 장식을 해주어 이미 이 공연 만으로도 환갑잔치를 잘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해 주었고 곧이어 우리나라 전통무예 <수벽치기>의 유일한 전수자인 동기녀석의 검무가 곧바로 이어져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이제부터 진짜 일반 동기들의 장기자랑 및 하고싶은 말하기 시간을 갖겠다" 라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마자 올라온 동기녀석과 그 부인..... 곧바로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를 크게 틀어 달라더니 부부가 합심하여 꽤나 연습한 듯, Psy를 능가할 정도의 바로 그 <강남스타일 말춤>으로 순식간에 광란의 밤을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낄낄 저기서 깔깔 한참동안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오로지 이 모임에 참석 할 목적으로 미국에서 휘여휘여 달려온 3명의 재미교포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 "얘들아, 아까 까진 너희들이 너무나들 점잖아 보여서 쫌 그랬는데 이제서야 옛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다. 옛날로 돌아가자, 그 신났던 시절로, 제발~" 녀석들... 무척이나 그 시절 그 동기들의 꾸밈 없는, 천진난만한 정들이 그리웠었나 보다...
그 다음부턴 이 친구, 저 친구 지원자들이 너무 많아 사회자가 교통정리하기 바쁠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밤이 너무 깊어졌다. 무슨 하고싶은 말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정말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동기동창들끼리 실로 40년만에 넝쿨처럼 뒤엉켜 신나게 놀았던 밤이었다....
결국은 회장이 나서야 했다.
"우리에겐 50주년도 있다. 모쪼록 건강하게 잘 있다가 그때 또 반갑게 만나자 ! 올해의 <응답하라 1966-1972 >는 이것으로 끝 !!!"
그렇게... 우리들의 환갑잔치는 끝이 났다...
첫댓글 참 좋았겠습니다.....
우리 63 동기동창 모두가 일심동체로 창조 해낸 우리 자신들의 축제였기에 정말 보람차고 신나는 신 개념의 환갑잔치였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 송파 ROTC14 명식이의세트는 동기 부인들에게 인기 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