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수행 안소영씨 [하]
절은 오로지 행위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
자신 안에 있는 ‘긍정의 힘’ 일깨우기도
진심으로 열리는 그 마음이 불성이라고 감히 얘기해 본다. 고개 들어 날아오는 모기를 갑자기 손바닥을 맞부딪혀 죽였다 치자. 불성을 0.1초라도 느낄 수 있다면 참회할 수 있다. 평범함에 감사하고 참 나를 찾고자 정진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진심으로 열리는 마음이 불성이라고 감히 얘기한다. 그것이 불성이 아니고 무엇일까.
0.1초가 1초가 되고 1초가 한 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고 또 1년이 되도록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크릿’과 다를 바 없다. 긍정의 힘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내 안에서 찾아야 함을 수천년 전 불법은 이렇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 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무엇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를 만나기 전에 삼천 배를 해야 한다”는 성철 스님은 생전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의 참뜻은 별 볼일 없는 산승을 만나러 온다면 얻어 가야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주기 위함이 3000배였던 것이다. 절은 남이 해주는 것도 아니요, 오로지 자신이 그 행위를 통해 올라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적어도 한번은 산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과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리라. 6~7시간 절수행으로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한 건 아닐까.
법정 스님 글엔 이런 말이 있다. “먹고 살기 바빠 악만 짓고 살다가 종교의 믿음조차 멀리하고 살아왔으니 늙고 병들어 인생이 허망해지면 어디다 대고 빌 것인가.” 참말이다. 어떤 종교든 바른 종교관을 가질 수만 있다면 종파가 중요한건 아니다. 시험을 앞두고, 병마와 싸우고자 또는 자식 일에 남편 일로 시작한 기복기도일지라도 어떠랴. 순수함만을 잃지 않고 그 신념으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면 당연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또 그 좋은 일 끝에는 남을 위한 기도의 여유도 생길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기복에서 기복으로 끝나는 기도여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바람이다.
오늘도 석불에게 간곡하고 간절하게 절을 올린다. ‘남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 나를 찾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석불 뒤 수많은 부처님에게도 참회의 절을 올린다. 지구 한 바퀴를 돌 때까지. 성철 스님을 생전에 뵌 적은 없으나 스님이 애쓴 기도의 끝은 ‘남을 위한 기도가 되자’는 의미가 아닌가.
요즘 세대들은 의심이 많다. 무조건적인 종교를 강요한다고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만무하다. 그러나 길고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인간으로서는 감당이 안 될 일들이 빈번이 일어나는 시점에 진정한 나를 찾아낼 수 있는 계기의 종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나 자신에 대한 고민과 갈망, 정신적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들을 가지고 종교를 가진다면 진정한 나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척추주변 근육이 강하면 척추가 건강해진다. 마음의 근력이 강하면 정신도 맑고 건전할 것이며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개인이 그런 마음의 근력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매심·39
마치 어두운 밤 밝은 횃불을 쥐고 있는 것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흙에 물들지 않은 연꽃처럼 여여하게. 우리가 찾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아닌 내 속에 있는 그것이다. 그것!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