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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저녁을 위한 명상☆]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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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위한 명상]
최원규 시집 /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2016.09.09)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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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위한 명상
최원규
어찌 기도뿐이랴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
나는 너에게 손이 될까 부다
나의 임종의 날씨를 점친들 무엇하랴
하늘에 솟구치는 새도
절망의 낙하를 짜릿하게 느껴도
두 날개를 펴지 않아도 바람에 스친다
문을 닫지 않아도 열리게 마련
밤의 노래는 아침을 마신 빈 잔의 허무인가
어찌 나를 너와 견주랴
내 하늘의 환한 어느 곳
구름의 뼈 아름다히 아름다히
흩어진 신神은 내 앞에 서 있다
연꽃을 보며
최원규
검은 물빛 속에 허허로이 솟아 오른
꿈같은 멍울로 수북한 젖가슴
푸른 치마 자락으로 가리우나니
밤에만 보이는 사모친 별빛
이승의 인연 때문이랴
서로 살을 부비며
깊고 긴 진흙 속에
머리를 들고 서 있구나
그리운 바람
최원규
풀새는 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의 가슴에 고여 있는 눈빛
이미 죽어간 이름이 고요 속에
박차고 일어서는 여울 소리
여기도 저기도 아닌
위도 아래도 아닌
내 가슴을 스쳐가는
한 줄기 회오리 바람
오늘처럼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너는 어데 숨어 있느뇨
물에 대하여
최원규
물은 살아있고 또 죽는다
물은 있다가 또 없다
물은 서 있고 또 눕는다
물은 오르고 또 바닥에 스민다
물은 편을 가르고 또 하나가 된다
물은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 간다
물은 마침내 땅에 묻히고 하늘에 오른다
물은 마침내 내가 되고 모두 하늘이 된다
시는 헛것이란 말인가
최원규
진땀 흘려 강의 하던 대가로 받은 강의료를 모아 만든 시집
이 시대 시집 팔아 돈 벌었다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운율의 실종도 그렇고, 시인이란 명함을 돌리는 것도 그렇고
시는 금간 사기그릇에 냉수 한 사발 마시는 것보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보다 못한
깨진 질그릇처럼 도처에 흩어져 뒹굴고 있다.
세미나서 만나 밤늦도록 소주 마시던 내 곁을 떠나지 않던 그 친구에게
내 시를 한 두 줄 줄줄 외우던 선배 시인에게 두 번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공허한 시간의 꿈속에 마주친 그대에게 오랜 침묵 속에 안개처럼 마주 친 향긋한 술 향기로
가득한 현명하고 영특한 그대에게 내 보물 같은 시집을 보낸다.
지명도 잊은 채 날짜도 잊은 채 산인지 들판인지 모두 잊은 채 모든 제한에서 풀린
낯모를 도시 속의 군중 속에서 나를 잊은 것 같은 나를 찾아 주겠지 감격하겠지
그대와 만나던 순간의 목소리를 기억해내겠지.
백 권을 보낸 내 시집은 지금쯤 어느 시인의 서재에 누워 포근히 잠들고 있을 무렵
‘삭발하고 분칠하고’ 그 시인에게 보낸 시집은 반송됐다.
일산에서 만나자는 그대의 약속은 잊었는가.
“작년에 가셨어요.” 가슴에 흐르는 눈물의 소리가 전선을 타고 들렸다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소리와 전혀 별개의 낮빛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냥 받아 두셨다가 어느 도사관에라도 기증하시지 왜 도로 보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쌓인 책과 시집들을 여기저기 보내려 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보내준 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예절인 것 같아서요.” 차분하고 가라앉은 소리였다. 아! 휴지도 돈인데 시집은 기증도 사양하는, 거저주어도 마다하는 헛것이란 말인가.
*‘삭발하고 분바르고’ 한국무속신앙을 주제로 시를 썼던 박재능 시인의 시집. 그는 지난해 타계했다.
가랑잎
최원규
고향에 돌아와 뉘를 만나랴
너를 위한 목숨의 종이 된다면
가랑잎이 되어 안산에 흩어지리
하늘에 솟아오른 물까치도
하강의 절망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네 곁은 스치는 구름 되어
가볍게 흩어져 자취를 감추리
어두우면 별이 눈뜨고
지상의 아픈 곳 찾아
밤의 능선 저편에
가버린 너의 흔적을 찾아
눈뜨고 눈비벼 찾고 찾는
허망한 눈빛의 되풀이인 것을
펑펑 눈은 쏟아져도
최원규
펑펑 눈은 쏟아져도
어깨에 수북이 쏟아져도
녹아내린 눈의 눈물이
외로운 영혼을 위로함인가
강기슭에
논두렁에
먼 도시의 십자가에
싸늘하니 흔들리는 갈대숲에
펑펑 눈은 펑펑 쏟아져도
서서히 길이 보인다
최원규
어렵던 때를 잊지 않고
급히 서둘지도 않으니
서서히 길이 보인다
오늘의 운세다
그러나 미세먼지가 꽉 찬
어둠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는 교차된다고 했듯이
밤이 지나면 날이 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어둠의 연속
길이 막혀 보이지 않는다
꽃은 탐스런 봉오리를 드러내고
푸른 나뭇잎은 솟아나고 있으나
마음은 급하고 조급이 나는데
길은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얼어붙은 겨울의 껍질 속에
붉게 뿜어내는 동백꽃처럼
쓰러져 스스로 흐느낌일까
봄은 만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데
차츰 가깝고 차츰 멀어지는
햇살의 상승과 하강
되풀이 속에 길이 서서히 보인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어가든
서풍의 넉넉한 품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때문일까
아주 느슨한 길이 보인다
틈새
최원규
물결은 틈새를 찾아든다
기울어진 햇살이 땅에 스며들 때
어둠이 몽땅 세상을 지탱하듯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틈새는 어디고 서서 버티었지만
우리들의 삶을 뒤쫓는
죽음이 이주 조용조용 재촉할 뿐
우리들은 서로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언어의 의미가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든이 넘어서야 깨닫는 아침이다.
사발
최원규
사발을 깨거라
흰 사발이 부서져 시퍼런 날이 서도록
그리하여 손가락에서 선혈이 흐르도록
어차피 부서진 허망한 공간인데
내가 의지할 이곳은
나만이 담고 있는 진실한 빈 터
내 마음을 담고 있는 이곳이 없어지니
가득 채운 듯하다가
이내 텅 비우고 마는 가슴속 숨결
맑은 찬물을 가득 부어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담으라
은행잎을 주으며
최원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살과 혼의 사이로 끼어든
노란 부적
먼 선조의 미라처럼
얄팍한 가슴에
한 잎 두 잎 기억을 꿰맨다
이슬인 듯 눈물인 듯
티 없이 맑은 아이의 손바닥인 듯
어깨 위에 쌓이는
노란 시름이 짙은 가을날
끼리끼리 소풍도 가고
신간 시집의 책갈피에 끼워져도
사람은 가고 옛날은 남는가
비둘기 날다
최원규
바람은 그늘 속에 없다
그러나 그늘 속에 꽃이 핀다
날개가 그늘 속에 묻힌다
부지런히 찾고 있는 것은
먹이가 아니라 땅 내음 때문이다
파편과 총성은 끝났다
두꺼운 벽과 철조망은 하늘을 가른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공포
겨눠진 총부리가 맞대 있어도
하늘을 향해 나르려 한다
깃발도 없는 푸른 하늘
권세에 욕망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금지된 구역을 벗어버리고
하늘 높이 날아보자
그리운 땅 내음을 찾아보자
명심보감을 읽다
최원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문풍지애 들려오는 소리
손님이 오지 아니하면
집안이 첨하여지고
시와 글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지느니라
비오는 날 벼락이 떨어지면
모두 방석으로 머리를 가리지만
벼락을 가리려면
반드시 김영란법을 익혀야 할지니
먼 산
최원규
멀리보이는
산등선의 보랏빛 하늘
가까이 보이는
산마루의 아득한 연둣빛 뜨락
총총히 휘말리는 들꽃향기
노을이 붉어
눈물나게 부시어
온 마을을 감싸 안은
넉넉한 품이어
꽃이 눈을 뜰 때
최원규
구름 틈새로 노을 빛
스스로 뉘우쳐 빗겨ㅛ가는 순간
햇빛 한 점과 겸쳐 꽃이 눈을 뜰 때
길게 길게 한시름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아무도 붙잡지 못한 채 아무도 거들지 못한 채
이승의 봄날 고요한 아침
따스한 바람으로 속의 잎을 흔들어
아주 작은 목숨과 목숨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뜨락이리.
꿈에 보이는 언어
최원규
1.
눈물은 혼자일 때 더 맑아지누나
2.
샘물이 마를수록 별은 자꾸 투신하네
3.
사람은 길이 없다고 하면서
별과 별 사이 만 걷고 있을 뿐
4.
바람은 다시 살아나
겨울나무 가지에 꽃망울을 품다
5.
가득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그것은 마침내 빈 것이 아니드뇨
그리운 그 소리
- 소리 없는 소리를 위하여
최원규
영혼을 흔드는 것은
햇빛이나 소리 속에 담긴
맑은 바람의 흔적 때문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지상에서 밀려난
당신의 숨소리
먼 산정에서 귀와 가슴에
고여 있는 자고도 파도 소리
별자리 듯 점점이 솟은
작은 섬들 사이로
숨가삐 따라가는
당신의 말씀
매미
최원규
창살의 철망에 꽉 달라붙은 매미 한 마리
웅크리고 책상에 엎드려 고뇌를 씹으며 시를 찾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철망에 붙어
실내를 바라보는 너는 내 시의 유일한 관찰자
철창에 정좌한 너는
그대 집 정원에서 긴 여름을 울다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 돌아온 상처를
송두리째 맨몸으로 팽개친 채 고요한
가을을 찾고 있다 시를 끝내고 싶다
책상과 종이 그리고 크로스 볼펜
내 어릴 때 들판에서 소나기를 피하여
빈 헛간에서 듣던 긴 매미의 여운이
차츰 무지개 속으로 따라가고 있다
버려진 질그릇을 위하여
최원규
아무 곳에나 질펀히 주저 앉아
멍청한 하늘만 바라
기다리고 있음이 허망한 몸짓이라 했나
담으려 애쓸 필요 없이
채워도 이내 비우고 마는
옹색한 바람이 잠시 머물 뿐
채워도 마침내 비우고 마는
허딩 같은 행복
맑은 하늘 가득 담아도
혼자서 오래도록 눈감고
꿈꾸고 깨어나는 고난의 늪에서
아무렇게나 자빠져 눈뜨고 누웠는가
그늘 길게 드리운 나무
최원규
1.
사람이 가지 않은 이 있더냐
가고 아니 오너매라
2.
새벽의 살 속의 맑은 바람
마침내 풀잎 끝에 마문 햇살의 고요
3.
유년에 보았던 살 속의 뼈
그것 때문에 가슴 속의 숲은 자란다
4.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넋의 재가
쌓이고 쌓여 땅의 층계 위에 나무로 돌로
뒤덮여있나니 알았노라 그대의 모든
이웃이 웃으며 절망하는 까닭을
5.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땅을 들여다보아도
죽어있는 돌이나 살아 있는 흙의 한 덩이 조각 뿐
아파하고 보드러운 육신의 절망은
보이지 아니함이뇨 섭섭하구나
한해를 보내며
최원규
너는 무엇이 되어
어데서 다시 만날 것인지
일렁이는 새해를 기다려보지만
헛된 투망처럼
뼈를 녹여 뭉친 신의 분노가
이마를 내리칠 뿐
정오의 햇빛은 부서져 간데없고
속죄의 풀잎이 뜨락에 흩어져
저승은 지난시간의 남루한 옷가지들뿐
산사람은 별일 없고
눈이 내리면
나무가 서있다
이런 겨울 너는 서있구나
한산모시
- 어머니
최원규
한산모시 치마저고리
입으신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가족과 함께 앉아 계시리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두들 떠나시고
나 홀로 어스름 허연머리 날리고 있고녀
그분이 지금쯤 계시다면
한산세모시 풀 먹여 입으시고
산자락 배꽃 아카시아꽃 바라보시리
가득하고 서늘한 모시치마폭처럼 넉넉하게
솔바람 포롯한 잔디풀 아늑한 자리에 누워계시리
이제야 그리움 가득 몰려오는 저녁바람 이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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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나는 시를 쓰는 일이 가장 귀중한 일이며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원고 청탁을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이런 생각들은 없어지고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언어의 발견과 탐색이나 지난 시간들 속에서 잊혔던 사소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같은 영상이 되살아난다. 나는 꼭 무엇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골똘히 찾는 행동을 반복한다. 찾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찾는다. 서랍을 뒤지고 비망록을 뒤지고 다이어리를 뒤지고, 그러고 나면 내가 찾고 있는 사물에 한 점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듯 떠오르는 빛이 보인다. 그것을 찾아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빚어지는 주요한 버릇은 음악 듣기와 타인의 작품 여러 장르에서 받아오는 감동이다. 그것은 마치 마중물처럼 좀처럼 쏟아지지 않는 작품의 물줄기가 타인의 물줄기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감전되는 현상을 느끼게 된다.
나의 시는 역시 일기장이나 메모지나 퍼스널 노트에서 시작된다.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언어의 ‘집합과 재구성’에서 쌓여지는 시어의 산만한 나열을 진지하듯 솎아내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시쓰기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시는 내 정신의 재가 타고 남은 자리에 재가 남듯 싸늘히 식은 ‘재’같은 언어가 내 가슴에 남았을 때 그것이 바로 나의 시가 된다. 나의 남루한 옷가지부터 새로 사 온 음반까지 이미 타계한 가족의 얼굴에서부터 낯선 나라에서 잠깐 만나 스쳐 지나간 기억 속의 얼굴까지 나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연민 속에 몰아넣는다.
마침내 어느 날 밤 길게 꿈에서 이들과 만난다. 그 꿈의 헛된 일들을 나는 놓치지 않고 시 속에 담아 보려고도 한다. 나의 시작詩作에는 비방秘方이 없다. 나의 메모장이나 시작을 위한 노트의 분량이 많아졌을 때 작품은 탄생된다. 나의 작업을 생각의 거미줄처럼 때때로 어떤 것들이 걸려들어 시어를 풍부하게 하여 준다.
시작에 있어서 첫 행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 행은 첫 한마디가 갖는 분위기가 주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첫행은 제목과 연관되기에 내용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쓰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무래도 시의 첫 행의 소리는 오래 참았던 생각을 토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벅찬 감격이 드러난다.
나의 시 형태를 놓고 보았을 때 음률과 시의 행이나 연구분을 시작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퇴고의 마무리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스스로 읽어가며 음운적 반복이나, 어미의 통일적 조화 등을 고려한다. 특히 반복운에 대한 음악적 효과라든가 말운末韻에 대한 처리는 가급적 접두사를 제거시키는 데서 행의 자수를 제한하고 있다.
시의 연과 연 사이의 공간을 깊고 최대한의 폭으로 넓혀야 된다. 최대한의 공간적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독자가 이해불능의 심연으로 함몰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내가 책갈피에서 우연히 꽃나무 씨를 만난 것처럼 이승에 조그만 씨로 남아 그것이 땅의 기운으로 살아난 목숨의 씨앗이듯 어느 해 겨울 내가 병석에서 일어나고, 또 내 옆에는 나의 자식이 태어나고 하는 되풀이를 겪듯이 생성 성장하고 있다.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숙명의 길을 가고 있다.
요컨대 시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얽혀 있는 무명의 이미지들을 통일된 한 줄로 엮어가며 그 근원과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정체와 본질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라고 확신한다.
어느 시인은 시작 중에 서랍에 넣어둔 썩은 사과를 코에 대고 냄새 맡기를 즐거워한다든가, 몇 개의 담배를 계속적으로 피운다든가, 또 몇 잔의 차를 거듭 마셔야 시가 써진다고 한다. 심지어는 알코올에 취해 있을 때가 오히려 감성이 슬슬 풀려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자극이나 분위기보다 나 스스로 자문자답 할 수 있는 밀폐된 공간이 필요하다. 시구의 구성단계에 도달하기까지 정신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 점점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른 새벽녘의 잠이 없다. 이때 메모나 노트가 모두 나의 시작 자료다. 그러한 노트는 모든 일상어들이지만 그 말씀의 뿌리를 캐다보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발레리는 시의 천부적인 한 행을 중시했다. 이 천부적인 한 행은 올듯하면서 나에게 오지 않았다. 시의 영감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적 빛살’과 마주치지 못했다. 이 언어의 영적 빛살을 나는 갈구한다.
나는 나의 시가 예술로 얼마나 미적 가치가 있는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시가 나의 반사체로서의 구실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시작은 선禪의 구도적 행위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시작은 일상 속에서 끝없는 관심과 언어탐구가 관습처럼 이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속에는 시가 항상 들끓고 있다. 그것이 가끔 햇빛과 마주친 활자로 나타날 때, 나는 기쁘고 황홀하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속물이 순수 무구한 시와 가까우어지려는 의도만으로도 나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요즘 세상은 많이 변해간다. 이미 있었던 질서는 거의 바뀌어 가고 변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한다. 옳고 그른 가치조차 혼돈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가 지닌 말의 아름다움이다. 세기말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요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가중된 기계 문명으로 인한 물신주의의 팽배다.
그 속에서 시는 물질이 아닌 인간에 대한 탐구 곧 자아탐구를 기본적인 것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시는 이 시대의 갈등과 아픔을 극복하는 깨달음이라고 믿는다. 남은 인생도 시를 쓰며 시에 매달려 지낼 것이다.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 조선문학에 연재할 수 있도록 밀어주신 시인 박진환 사형께 감사한다. 또한 찬찬히 살펴 평설을 집필해준 평론가 이형권 교수의 노고에 고맙고 원고의 타자와 정리를 맡아준 맏딸 최지은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2016년 늦은 여름
둔산 금정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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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 詩集 [※저녁을 위한 명상※]
[ 시집해설 ] -
영원 회귀의 시학
이형권(문학평론가)
어느 순간 보일 듯 없어지는/허망한 것이 아니드뇨/마침내 강으로 흘러 바다에 가고/강에서 만난 거센 파도 앞에서 서서히/하늘에 올라 이승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드뇨/흐르고 멈추고 솟고 흐트러짐이/우리가 가는 길이 아니드뇨
-「금강보에 와서」에서
1. 종심從心의 별무리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을 하면서 도달한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허무주의이다. 그의 허무주의는 서구형이상학이 오랜 시간동안 견지해 왔던 견고한 아집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허무주의 철학은 강고한 관념에 얽매여 살아가던 인간의 마음속에 구체적인 생의 감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인생이란 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절대적이고 불변하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적이고 순간적이고 우연한 것들이 반복될 따름이라고 보았다. 허무한 인생 혹은 고통스런 영원한 반복,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니체가 말한 인생의 본질이다. 니체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서구형이상학자들이 오랫동안 신봉해온 사유의 패러다임을 전복했다. 서구 형이상학자들이 죽음이란 삶의 타자로서 종교적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의 것이라고 여겼지만, 니체는 죽음이 삶과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니체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은 그 자체가 인생의 본질이라고 본 것인데, 이는 불가에서 인생이란 인연법에 의해서 돌고 도는 윤회의 일종이라고 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이 시집에는 이러한 니체적 사유와 불교적 인생론의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다. 최원규 시인은 일찍이 불가에 심취하기도 하고 니체의 생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러한 사상을 시 창작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이 시집에서도 그러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다만 이전의 시편들과 다른 점은 노년의 인생 문제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여든이 지나면 즐겁다 슬프다 말하지 마라
눈물은 매운 연기 때문이지 가슴이 시려서가 아니냐
잡풀 같은 수염은 허옇게 시들고
정강이 마른 뼈마디가 시리구나
안개같이 번져오는 번뇌의 물결
새벽이 되어서야 서산으로 물러서니
어찌 종심從心이라 일컫는가
해 저문 노을 끝자락에서
입 눈 코 살의 구멍 밖으로
모조리 빠져나간 돌부처인양
길 한 모퉁이에 서 있을까
아니 오랜 나무 뿌리의 구덕에 고인
빗물이듯 밤하늘의 별무리나 기다릴까
-「나의 하늘」전문
이 시는 화자인 노시인이 어느덧 종심從心의 나이를 지나 희수喜壽와 미수米壽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시의 경우 화자는 곧장 시인과 일치되는데, 일평생을 시를 창작하면서 시를 가르치는 일로 일관하신 시인다운 성찰의 언어들이 마뜩하다. 시의 첫 행에 제시된 “여든이 지나면 즐겁다 슬프다 말하지 마라”는 경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넘어선 높은 마음의 경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이미 “종심”의 경지, 즉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도 세상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마음은 나이 팔십을 넘기고도 여전히 “안개같이 번져오는 번뇌와 물결”로 일렁이지만, 그것은 항상 “새벽”이 다가오면 어느덧 “서산으로 물러서”는 경지, 즉 “종심”지경에 올라서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번뇌와 물결”을 초월한 “돌부처인양”혹은 “오랜 나무뿌리의 구덕에 고인/빗물이듯” 여유롭게 “밤하늘의 별무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삶은 “별무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삶은 “별무리”가 되고 “별무리”는 시인의 언어가 되어 영원히 돌고 돈다. 시인에게 “여든”아 지난 것은 속가의 나이일 뿐 시심의 나이는 아직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청춘이다.
2. 불멸,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
이 시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시편들은 “여든이 지나”는 연륜에 이르기까지 한 시인이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그것을 성찰하고 초월하려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집은 유년기의 순수와 청춘 시절의 희망과 중년기의 열정, 그리고 장년기의 안정과 노년기의 허무 등속이 원숙한 촉기의 언어들로 교직交織되어 있다. 일평생을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고통도 남다르게 마음 깊이 새기면서 살아온 노시인의 인생이 생동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노시인은 1999년에 정년을 맞이하여 수십 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도 시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변함없이 이어왔다. 2000년에『최원규 시전집』을 상재한 이후에도 각종 문예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꾸준하게 상재해 왔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시창작반을 이끌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토록 삶과 시에 대해 열정적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 이전의 시, 시 이상의 시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것은 차라리 인생 달관의 경지에 이른 어느 노스님의 일갈처럼, 별다른 언어적 수식이나 장치 없이도 인생의 깊은 경지를 깨우쳐 주는 시적 경지라 할 만하다.
달이 구름 속에 헤매고 있다
구름 속에 숨어있는 너를 찾아
헤매어도 끝내 보이지 않고
나뭇잎새 사이로 숨어 버린다
숲속에 잠겨있는 너의 뒷모습이라도
찾아가 잡아보고 싶다만
나뭇가지와 들풀이 엉겨
그림자만 어슴푸레 비칠 뿐
봄 밤 슬피 우는 풀벌레의 간절한 흐느낌
달빛 속에 흔들려 부서진 여울 따라
가늘고 길게 뒤따르고 있을 뿐
간데없이 어데론가 사라질 뿐이다
마침내 달은 뜬눈으로
어디지경 헤매다가
끝내 묻혀있는 옹달샘 속을 찾아
살며시 누워 있을 뿐인가
-「불멸의 밤」전문
이 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드러낸다. “달이 구름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이상을 향해 현실의 고난을 감내하는 모습을 표상한다. 그 이상이라는 것은 이승에서 실현될 수 없는 어떤 불가지의 대상을 일컫는 것일 터,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을 향한 부단한 추구심이 결국 인생의 본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항상 “헤매어도 끝내 보이지 않고/나뭇잎새 사이로 숨어버리”는 존재로서 “그림자만 어슴푸레 비칠 뿐”이다. 이때 “그림자”는 현실 속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실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터, 비록 그 실체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부단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자 한계이다. 시인이란 그러한 언어의 실재, 존재자의 실재를 찾아 평생을 헤매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인생은 “밤새워 찾아 헤매는 애달픈 되풀이”(「가을 벌레」)일 뿐이다.
그런데 인생에 대한 이러한 통찰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왜 “불멸의 밤”(「제목」)이라고 했을까? 사실은 인생이 지닌 한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니 ‘순간의 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시는 인생의 순간성을 전경화하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생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인생론과 맞닿는다. 인생을 불변이나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변화와 생성을 통해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생을 시와 더불어 그러한 인식 속에서 살아오신 선생님이 노년을 맞이하여 도달한 인생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의 “불멸”은 인생에 대한 대긍정-삶은 고통 자체이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야 한다. 죽음은 삶과 모순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의 높은 경지의 인생론을 암시하는 핵심 시어인 셈이다. 이 “불멸”의 인식은 선생님께서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차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지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불멸”에 대한 인식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운 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다른 시에서도 삶은 허무한 것이고, 그러한 삶이 죽음과 분리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통찰에 이른다. 즉 “담으려 애쓸 필요 없이/채워도 이내 비우고 마는/옹색한 바람이 잠시 머물 뿐”(「버려진 질그릇을 위하여」)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나아가 “모과나무에서/노랗고 묵직한/한 알의 모과가/쿵 하고/풀밭에/낙하하는 순간/그 사이…그 고요…바람 한 점/목숨은 숫하게 태어나고/목숨은 숫하게 죽어가나니”(「날이 어두워 진다」전문)라는 관조적 인생론에 이른다. 나아가 “사실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열매가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의 소리와 같아/툭 하는 몸짓에 불과 하지만/ 그 순간 바람의 파동은 물살을 만들 수 있나니”(「금강보에 와서」)와 같이 윤회적 인생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죽음의 문제는 많은 시인들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시의 테마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실존적 문제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차원의 공동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또는 문화적 차원의 상징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것은 실존적 죽음의 문제인데, 그것은 이승에서의 인연을 넘어서서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통과제의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선산에 오르면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 능선의 뒤편/소나기가 지나간 새벽 숲에서/내 하늘이 기다리고 있으리라”(「산에 오르며」). “우연히 초인종 소리 울리고/묵직한 택배는/다형茶兄의 유골인 양/하얀 뼈의 사리가 보인다”(「모년 모임」)는 시구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나아가 현실에서의 인연이나 이승에서의 삶을 초월하려는 의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한 잎 두 잎 떨어져
어디론가 가버린 마른 나뭇잎
그 행방은 알 수 없어도
저항 할 수 없도록 가볍게
바람과 함께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지난날 푸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튼튼히 버텨온 억센 잎새
아침과 황혼의 햇빛과 노을 속에
그 푸름은 간 데 없고 누런 껍질로
망가져가는 손과 발 그리고 갈라진 살갗
이제는 모든 인연을 끊고
온 몸으로 뒹굴며 날아가는 우수의 잎새
그렇고 말고 섭섭다 하지 말고
사무치다 하지 말고
훌훌히 떠나거라
늦겨울 찬바람 속에 가벼운 날개만 달고
황홀한 달빛 속에 가지와 줄기에서
그리운 인연을 잘라내라
-「가랑잎에 대하여」전문
이 시의 “마른 나뭇잎”은 세속의 인연을 초월하고자 하는 존재자를 표상한다. “마른 나뭇잎”은 한때 “푸른 나뭇가지에 매달려/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튼튼히 버텨온 억센 잎새”였다. 한때 “마른 나뭇잎”은 “푸른 나뭇가지”와의 “인연”으로 푸르른 시절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 푸르름은 간 데 없고 누런 껍질로/망가져 가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마른 나뭇잎”은 인간으로 말하면 청춘 시절을 다 보내고 노년을 맞이한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시절을 탓한다든가 늙음을 탄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제는 모든 인연을 끊고/온 몸으로 뒹굴며 날아가는 우수의 잎새”가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의 “인연”에 얽매여 번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작은 것을 버려서 더 큰 것을 얻으려는 깊은 정신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다.
세속에서의 인연을 능동적, 자발적으로 넘어선 사람 앞에는 자유와 초월을 통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기다리기 마련이다. 한 인간으로서 늙어간다는 것,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주 원숙한 정신적 경지를 간직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가령 “더는 쓸쓸하지 않습니다/아무렇게나 울긋불긋한/들꽃처럼 웃음이 번져/부서지며 흩어지는 소멸을 주소서”(「소멸을 빈다」)에서 보이는, “소멸”에 대한 의연한 태도도 그런 인식과 상통한다. 이런 태도는 니체가 말했던 초인의 것이라 할 만한데, 아래의 시에서는 그런 태도가 새로운 삶 혹은 상징적 삶을 향한 역설적 인식론으로까지 나아간다.
햇빛이 유리잔 속에 침몰한다
잠 못 이룬 어린 새와 나란히
여울처럼 마침내 세월은 간다
동네 공원 마당에 서있는
오랜 느티나무는 무성하던 이파리 떨어지고
먼 하늘을 보고 홀로 밤의 고요를 새긴다
목숨이 다해가는지 한 가지마다 무너진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손짓하는
사람다운 흔들림은 아직 남아 있어
서럽게 온몸이 병들어 있는지 몰라
지금 있는 하늘의 별은 알고 있는지 몰라
바람이 불어도 미동하지 마라
더 버티거라 푸른 하늘을 가슴에 품어라
홀로 슬프디 슬픈 너의 뿌리를
아득한 땅 속에 깊이깊이 거느리거라
황혼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러나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치 한 쌍이
가지 끝에 새날을 설계한다
-「오랜 느티나무」전문
이 시의 주인공인 “오랜 느티나무”는 역설적 존재이다. “오랜 느티나무”는 많은 세월을 살아온 존재이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성하던 이파리 떨어지고” 말았지만, “먼 하늘을 보고 홀로 밤의 고요를 새긴다”는 부분에서 그러한 초월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어린 새와 나란히/여울처럼 마침내 세월은 간다”는 표현은 그런 역설적 초월을 예비하는 복선 구실을 한다. 이 시의 “오랜 느티나무”는 노년을 맞이한 시인 자신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을 터, 시인은 자신의 노년을 삶의 소멸을 향해 가는 시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하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 느티나무”를 향해 “더 버티거라 푸른 하늘을 가슴에 품어라”고 하는 요구는 시인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지 혹은 다짐으로 인하여 노년은 낡은 삶의 표상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황혼을 고요하다”고 해도 “까치 한 쌍이/가지 끝에 새날을 설계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꿈에 대한 인식은 이 시집에 이별이나 죽음의 이미지만큼이나 빈도 높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눈부신 빛의 번득임이 가득한 오늘/너의 빛나는 날개의 힘으로/황홀한 무지개 산맥의 틈새로 날으라/숨가삐 숨가삐 굽이도는 산맥과 깊은 골짜기/한 숨에 날아갈 그 날을 꿈꾸며/높은 하늘 그곳으로 비상할 채비를 한다”(「새 목숨을 위하여」)와 같은 시구를 보라. 이것은 노년을 시가 아니라 청년의 시이다. 흔히 말하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시인은 노년의 삶 속에서도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찾으려는 열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산다. 이것은 바로 시인이 간직하고 살아온 정신성의 위대함이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정신성의 밑바탕에는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과거와 현재를 분별하지 않는 통합적 사고가 깔려 있다.
물결은 틈새를 찾아간다
기울어진 햇살이 땅에 스며들 때
어둠이 몽땅 세상을 지탱하듯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틈새는 어디고 서서 버티었지만
우리들의 삶을 뒤쫓는
죽음이 아주 조용조용 재촉할 뿐
우리들은 서로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언어의 의미가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든이 넘어서야 깨닫는 아침이다
-「틈새」전문
물은 살아있고 또 죽는다
물은 있다가 또 없다
물은 서 있고 또 눕는다
물은 오르고 또 바닥에 스민다
물은 편을 가르고 또 하나가 된다
물은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 간다
물은 마침내 땅에 묻히고 하늘에 오른다
물은 마침내 내가 되고 모두 하늘이 된다
-「물에 대하여」전문
이들 두 편의 짧은 시에는 경계를 초월하려는 정신적 태도가 나타난다. 앞의 시에서 “물결”은 “틈새”를 지향하면서 그러한 경계를 무화시키는 매개이다. 즉 “죽음이 아주 조용조용 재촉할 뿐”인 상황에서 “언어의 의미가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죽음”과 삶(「언어」)에 대한 분별적 인식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인식을 통해 삶에 대한 집착도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넘어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뒤의 시에서는 경계 초월에 대한 인식이 더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시의 중심 소재인 “물”은 앞의 시에 쓰인 “물결”이라는 시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행의 앞자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은 현실적, 논리적 경계를 넘어선 역설적 존재이다. 우선 “물”은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기상과 누움, 위로 오름과 아래로 스밈 등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존재이다. “물”은 비록 여러 지류가 되어 “편을 가르고” 나아갈지라도 결국은 “하나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 시구 “물은 마침내 내가 되고 모두 하늘이 된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물”은 “나”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나”와 “하늘”의 분별마저 넘어서는 경지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3. 산과 시를 향한 경배
사람들이 말하길, 노년은 고독하고 쓸쓸하다고 한다. 청년의 열정과 도전 정신이 사라지고 육신마저 늙어가니 생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의 가치에 얽매어 사는 범부들의 이야기다. 최원규 시인은 80대 중반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년의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시를 쓴다. 시인은 평생을 ‘시를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한시라도 망각하지 않고 살아오면서, 시를 쓰는 일을 통해 인생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서 세속의 인연이나 죽음마저도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다. 나아가 인간적 한계에 대한 인식을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신을 향한 경배의 마음을 드러나기도 한다.
어찌 기도뿐이랴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
나는 너에게 손이 될까 부다
나의 임종의 날씨를 점친들 무엇하랴
하늘에 솟구치는 새도
절망의 낙하를 짜릿하게 느껴도
두 날개를 펴지 않아도 바람에 스친다
문을 닫지 않아도 열리게 마련
밤의 노래는 아침을 마신 빈 잔의 허무인가
어찌 나를 너와 견주랴
내 하늘의 환한 어느 곳
구름의 뼈 아름다히 아름다히
흩어진 신神은 내 앞에 서있다
-「저녁을 위한 명상」전문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신은 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아무리 완벽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도 그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한계내에서 완전한 삶을 지향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신 앞에 겸허한 마음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무한한 경배를 올리며 사는 일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내 하늘의 환한 어느 곳”에서 “신”을 찾아서 그 앞에 서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나의 임종”을 생각하면서 “고향”을 생각하고 “허무”한 삶을 성찰하면서 “신”을 생각하는 자세는 신성한 제의의 하나다. 즉 “내 하늘의 어느 곳/소나기가 지나간 새벽 숲에서/멀리 가버린 흔적을 따라가/신神의 손을 잡으리”(「가랑잎이 되어」)라고 다짐한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하나님 나라의 뜨락”(「꽃이 눈을 뜰 때」)에 깃들고자 하는 것이다.
신을 항상 경배의 마음은 온몸으로 시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시인에게 언어를 향한 열정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일평생을 시를 위해, 시에 의한, 시의 삶을 살아온 시인에게 신은 곧장 시이고 시는 곧바로 신이다. 시를 쓰는 일은 인간이 완전한 시(혹은 신)를 향한 경배의 행위이므로, 그 경배를 부단히 실천하는 일은 시의 신을 향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최원규 시인은 그 길을 망각하지 않고 시신詩神 일치 혹은 시 삶 일치의 경지를 일평생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시는 오늘도 오래된 책상에 앉아 시의 등불을 켜고 있을 노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석양의 새는 숲에서 내려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짝지어 날아온다
무인 등대에서 내뿜는 불빛같이
저녁하늘의 노란 빛줄기 국화 속에 묻힌다
날은 저물고 희미해지는데
밝은 시를 남기려 애써보지만
가랑잎처럼 바스락 거릴 뿐
애써 넘어가는 햇빛을 잡아당길 뿐이다
빈 것 속에서 가득한 것을 찾아
바람 속을 헤맨 지난 꿈의 열매
찌…찌…벌레는 길게 울고
가랑잎 하나 낙하하는 순간
한 줌 남아 있는 햇살의 줄기를 찾아
오늘도 안경을 닦는다
-「저녁 난간에 기대어」전문
이 시는 노시인의 삶을 “석양과 새”에 비유한다. 그는 “무인 등재에서 내뿜는 불빛”과 같은 존재로서 세속의 잡다한 일상에서 초월한 상태이다. 그가 지향하는 “저녁하늘의 노란 빛줄기 국화”도 원숙하고 관조적인 삶의 경지를 비유한다. 그런 존재로서 “밝은 시를 남기려고 애써보”는 일은 한 시인으로서의 숙명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비록 “밝은 시”라는 시적 이상은 평생을 추구해도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애써 넘어가는 햇빛을 잡아당길 뿐”일지라도 그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의 궁극, 시의 이상을 향한 부단한 지향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 의하면, 시를 쓰는 일은 “빈 것 속에서 가득한 것을 찾아/바람 속을 헤맨 지난 꿈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시가 “꿈의 열매”를 거두는 일이라면 그것은 현실의 열매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꿈의 열매”를 향한 영원한 지향일 터, “오늘도 안경을 닦는다”는 사실이다. 시에 대한 이와 같은 절대적 추구는 신을 향한 경배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 경배의 자리에서 노년이라든가 늙음이라든가 하는 것 따위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시심은 언제나 청춘과 이상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시집에는 노시인의 인생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의 언어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불멸의 삶에 대한 인식을 위해 속가의 인연을 초월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세속의 연륜에 아랑곳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시에 대한 열망에 이르는 준엄한 구도의 여정을 상징한다. 시와 삶의 새로운 경지에 대한 열망은 그 절실함으로 인해 세속의 연륜을 넘어 선다. 이 시집의 지향점이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넘어선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그러한 초월의 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은 신과 시를 향한 경배를 통해 맑고 깊은 영혼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배후로 삼는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생물학적인 늙음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하는 것은 사소한, 너무도 사소한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들의 모두에 제시했던 “하늘에 올라 이승을 내려다보는 것”(「금강보」)과 같은 높은 경지는 그렇게 완성된다. 시인은 현실의 삶을 넘어서 상징적인 삶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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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시는 내 정신의 재가 타고 남은 자리에 재가 남듯 싸늘히 식은 ‘재’같은 언어가 내 가슴에 남았을 때 그것이 바로 나의 시가 된다. 나의 남루한 옷가지부터 새로 사 온 음반까지 이미 타계한 가족의 얼굴에서부터 낯선 나라에서 잠깐 만나 스쳐 지나간 기억 속의 얼굴까지 나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연민 속에 몰아넣는다.
마침내 어느 날 밤 길게 꿈에서 이들과 만난다. 그 꿈의 헛된 일들을 나는 놓치지 않고 시 속에 담아 보려고도 한다. 나의 시작詩作에는 비방秘方이 없다. 나의 메모장이나 시작을 위한 노트의 분량이 많아졌을 때 작품은 탄생된다. 나의 작업을 생각의 거미줄처럼 때때로 어떤 것들이 걸려들어 시어를 풍부하게 하여 준다.
- <시인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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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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