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실감되는 날 (과똑똑이의 변명)
심삼일
고등학교 동기동창회 총무로부터 친구 한 명의 본인 상 부고가 문자로 전송되어왔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지낸 리더십 강한 친구였다.
서부 경남의 명문 고등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회장 선거에 부회장후보가 러닝메이트로 함께 출마하고, 차점 회장 후보는 대대장이 되는 제도였다.
학교 내에 태권도 유단자가 회원인 약간 불량한 서클이 있었는데, 학업성적이 5위권이고 태권도대회 밴텀급 우승컵도 땄던 한 친구가 나에게 러닝메이트로 나가자고 제안했지만, 모범생이었던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 친구는 서울 S 대에 떨어지고 재수해서 축산과에 들어갔는데, 지금은 잊힌 인물로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때 세 후보팀이 출마해서 차점자로 대대장을 지낸 친구는 육사에 입학하여 졸업식 때 수석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하나회’에 연루되어 별을 달지 못하고 결국 대령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육사에 간 다른 친구는 합참의장까지 지내고 전역했다.
나하고 한동네에 살았던 그 대대장 친구는 2학년 때 내가 다니던 학교 앞 태권도 도장에 몇 주일 나오다 그만뒀다. 나는 편도 3km나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는데, 그 친구가 도장에 나올 때는 뒤에 태우고 아침 일찍 도장에 다녀오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 친구가 사회에 나와 직장을 찾을 무렵, 내 친구의 부인이 운영하던 제법 큰 횟집에서 내가 당시 상장회사의 전무로 있으면서 사장으로 모시던, 다른 친구와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을 끝으로 그 대대장 친구는 동창회에서도 볼 수 없었고, 저명한 기업체에서 이사 직책으로 잘 지낸다는 소식만 들었다.
학생회장 친구는 서울 광진구 K 대학교 재학시절에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한창이던 유신헌법 반대 데모에도 앞장선 줄로 알고 있다.
이 친구와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덩치는 컸지만, 성격은 온순하고 조용해서 반장이던 나와 친하게 지냈다. 그때는 고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 친구는, 민권변호사를 지냈고 나중에 국가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동창 친구가 꼬마 민주당 시절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대책본부장을 맡아 열심히 뛰었다. 물론 3등으로 낙선했지만.
그 후에도 이 친구는 K 대학교 동문회 일을 보면서 정계 진출을 꿈꿔 온 것으로 아는데, 어찌 된 일인지 기대처럼 그렇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고등학교 동기동창회 모임에는 빠짐없이 나왔고 회장도 한번 맡아봤다.
고교 동기생 420명 중에 동창회 홈페이지에 등록된 회원은 200여 명쯤 된다. 오륙 년 전만 해도 석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서울 동창회 모임에 40명 넘게 참석했다. 그런데 점점 숫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30명도 채 안 나오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이제는 못 나가고 있지만.
나는 육군에 입대해서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를 했다. 부모 65세 이상인 독자여서 방위병 근무를 해도 됐지만, 군대 생활을 체험해보고 싶어서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 늦게 만기 제대할 선임병들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이기적인 욕심의 소치라 부끄럽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나는 남보다 군 복무를 2년쯤 적게 한 덕분에 사회에 일찍 진출했고, 다른 친구들보다 당연히 승진도 빨라 부러움을 사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물론 직장생활에 충실했던 결과로 만 27세에 대기업 연구소 과장이 되고, 32세에 부장이 되었다.
그때 핸드폰 개발책임자로 S 전자보다 1년 앞서 국내 최초 출시를 했으니, 엔지니어의 자만심도 대단했다. 핸드폰 크기가 거의 벽돌만 해서 허리에 차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때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엄청나게 잘난 줄 알고 안하무인에 기고만장의 지경에 이르렀다.
겁도 없이 이사 발령 영순위인 자리를 박차고 나와 39세에 회사를 차렸고, 철저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지금은 집안에 칩거하며 글이나 쓰는 주제이면서도 옛 친구였던 재수생, 대대장, 학생회장 들의 근황을 떠올리며 나는 잘살았고, 지금도 잘살고 있다는 억지 자존심을 세우고 자위해본다.
고인이 된 학생회장 친구의 발인 며칠 뒤에 동창회 모임이 예정되어있다.
친구의 부고를 받은 날, 진정한 삶의 가치는 돈도 권력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과똑똑이는, 나의 생존에 희열을 느끼며, 친구들에게 뭇매 맞을지도 모를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 계간지 [문예 감성] 2018년 봄호 게재 >
첫댓글 3선 서울시장이었던, 전쟁영웅이었던 죽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일까요.
살아있음에 그 분들에 대해 미천한 사람이지만 뭐라고 평가 한마디 할 수 있는 거죠.
(2주일마다 치르는 2박3일간의 항암치료 제7차를 잘 마치고 와서...)
아이쿠~! 병고 치르고 계시는군요.. 쾌유바랍니다..
건강한 몸으로 문학 오래하셔야죠..
늘 웃음 함께 하시길 깊이 기도 드립니다..
@玄光/윤성식 네, 현광 선생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남기시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시고요ㆍ글 쓰기가 스트레스가 많다는데 천천히 하세요ㆍ그래도 좋은 글 쓰시고요ㆍ성공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착한 일 하고 살면 되겠지요
네, 신이비 작가님 덕담 감사합니다.
님의 동화 작품 수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친구가 떠나게 되면 나를 돌아보게 되죠.
병고 잘 이겨 내고 오래오래 좋은 글 부탁합니다.
네, 개동님 그런 것 같습니다.
벌써 친구 본인상 소식을 몇 번 접하다 보니 심난합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생존 자체에 비중을 둬야할 것 같습니다.
나이가 같거나 비슷하여 친구로 지내다보니
인생의 주요 시기가 같다고 해야할까요?
예를 들면 주변 결혼 소식이 무성하며
나 또한 결혼 준비를 한다던가...
그렇게 특정 시기에서 주변의 부고 소식이 계속 나온다면 좀 흠칫할 것 같습니다ㅠㅠ
아직 병원이십니까 어서 완쾌하십시오!
네, 시인님 관심 감사합니다.
그렇지요, 동연배 분들 지내는 분위기와 삶의 흐름을 쫒지 않을 수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