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욥의 친구들이 자기에게 한 말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반박하며 나섭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실제로,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1절, 2절). 욥은 욥의 친구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고,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이야기들의 내용들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2절).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들의 요점은 인과응보(因果應報)였습니다. 욥이 죄를 지었으니 욥이 그런 고통과 고난을 겪게 된 것이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욥은 그러한 원칙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자기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욥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3절). 마치 재판장에서 재판관인 하나님 앞에서 욥의 죄를 기소(起訴)하는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해서 욥이 변론(辯論)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겠다는 것입니다. 욥은 욥의 세 친구들이 한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며, 그들은 욥은 위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욥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4절).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잠잠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고 책망합니다(5절).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들의 내용을 보면 틀린 말이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論理整然)합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이 말한 논리는 욥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론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든 의롭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욥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의 논리는 맞지만, 그 논리가 욥에게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
욥은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변(代辨)하며 욥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7절, 8절). 욥의 친구들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빗대어 욥에게 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 한다면 욥의 친구들도 욥과 같은 신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9절~11절).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도 꼼꼼히 감찰하신다면, 그 친구들에게서도 반드시 죄를 찾아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상황이 찾아올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엔 매우 빠르지만, 자신도 그러한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것은 마치 재 같은 속담이요,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논쟁하는 것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처럼 기초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2절). 재 같은 속담이란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마 욥이 이렇게 말하자 욥의 친구들은 술렁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13절은 잠잠히 내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어떤 결과가 오든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라는 14절은 새번역 성경에서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번역했는데, 욥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변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 자신을 죽이려고 하신다 해도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론이라도 하겠다고 말합니다(15절).
욥은 세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합니다(16절~19절). 경건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할 것이지만,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16절). 욥이 자신을 스스로 변론(辯論)하면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누군가가 욥의 죄를 입증한다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복(承服)하겠다고 말합니다(19절). 욥은 자신의 무죄(無罪)함을 변론하고 있습니다. 아마 욥은 매우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까닭 모를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도 힘든데, 친구들마저 욥이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지적하자 ‘나는 이런 고통과 고난을 당할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抗辯)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욥의 친구들이 가만히 있었더라면,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고 격려했더라면 오히려 욥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회개하라고 하니 오히려 욥은 발끈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의 말을 듣자 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욥이 더욱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 없음을 호소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겸허한 태도를 가졌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욥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으니 친구들의 진지하지 못한 충고에 발끈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에 대해 흑백논리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맞는 것이어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충분히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해야 하고, 더 충분히 공감(共感)해 주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도 우리 주변에서는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난과 재해, 그리고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날 때 너무 쉽게 속단(速斷)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억울하게 조언이나 충고를 해오더라도 너무 쉽게 발끈하지도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마음에 상처가 되고, 마음의 고통이 되지만 내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겸허함마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고, 자신의 변론할 수 있지만 우리 앞에는 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시고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겸허한 모습은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들을 종종 겪게 되는데, 억울하다고 앞뒤도 보지 않고, 자신의 억울함만을 호소하는 데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태도를 잊지 않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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