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롤롬보이(Lolomboy)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롤롬보이(Lolomboy)에는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학생이
마카오에 유학중이다가 1837년 8월 마카오 민란으로 피신을 하였던 당시 도미니칸 수도원 농장이 있다.
다음해 1838년 12월 마카오로 돌아 갔다가 1839년 4월 다시
민란으로 이곳에 와서 그해 겨울 11월에 마카오로 갔다.
그후 김대건 성인은 1842년 2월 28일 대만으로 가기 위해 다시 이곳에 들러 10일 정도 머물다가 간
인연 깊은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 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은 2월 6일에,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히며 수련 중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양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부터
1838년 겨울까지, 1839년 4월 6일부터 11월까지,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와 롤롬보이로 피신하였다
.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Cecille)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rigone)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 2월 28일 마닐라를 도착하여 10일후인 3월 10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대만을 경유
오송(吳淞)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 29일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Besi)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성인이 머물러 공부하였던 이 자리에 그분의 거룩한 삶과 그분의 순교정신을 기리고자
오기선(요셉)신부의 지도하에 마닐라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과 고국의 신자들이 뜻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과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 임석하에 1986년 5월 22일 동상을 세웠는데
성인을 이곳 관할 롤롬보이 성당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후 2002년 10월
수원교구산하 성 안드레아 수녀원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관리를 하게되어 현재 해당
수녀원 수녀들이 그곳에 머물며 관리하고 있다.
필리핀 현지 주소와 국내 성 안드레아 수녀원 연락처는 다음과 같다. St. Maria of Korea Foundation Inc. 623 Mendoza St., Lolomboy, Bocaue, Bulacan, Philippines Tel 001-63-(0)44-692-4013 HP 001-63- (0)927-902-9082(이 요셉피나 수녀)
성 안드레아 수녀원(원장 김화숙 수녀)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미장리 444 Tel : 031-673-8560 FAX 031-674-7164 정 마리안나 수녀 (011-9007-4820)
2. 마닐라 시내의 성당
● 끼아포 성당(Quiapo Church)과 블랙 나자렛
마닐라 시내 끼아포에 있는 성당으로서 서민들이 사는 상가지역이다. 이곳에는 기적의 블랙 나자렛이 모셔져 있으며 블랙 나자렛은 검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로 17세기에 멕시코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 십자가에 침구를 하고 기도를 하면 병자의 병이 낫기로 유명해 가정에 병자를 둔 가톨릭 신자들의 방문이 많다. 특히 매년 1월 9일에 블랙 나자렛을 선두로 시내 순례를 하는 축제를 하며 참가 인원이 필리핀 축제 중 가장 많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십자가가 여러 전쟁 중에도 파손되지 않아 신의 가호가 있다고 믿는다. 이 성당 앞으로는 끼아포 시장과 Quinta 시장 등으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다. 그리고 5분만 걸어가면 차이나 타운이 있어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 성 어거스틴 성당(St, Agustin Church)
인트라무로스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교회로 1571년 기초가 세워지고
1599년에 현재와 같은 석조로 개축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에 완성되었다. 마닐라 베이에서 가까운
인트라무로스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부는
바로크식 인테리어로 지어졌다. 옛 도미니코
수도원에 붙어 있으며 필리핀 가톨릭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성당 옆에
있는 옛 도미니코 수도원은 우리의 김대건
성인이 마카오에서 처음 오실 때 30일간
머무셨던 곳이기도 하다. 여러 대지진과
2차대전 중에도 파괴되지 않은 기적의 교회로
불리워지며 이후 수도원에서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파이프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마닐라의 첫 번째 총독인 미구엘 로페즈데 레가즈피
장군의 무덤과 스페인 정복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다.
1898년 스페인이 미국에 항복하는 조인식이
거행됐으며 수도원은 인상적인 스페인 시대의
그림과 조각품, 가구, 서적 등을 소장하고 있다. 귀중한 산토스(Santos), 카로사스(Carrozas),
그리고 골동품 책들을 포함한 식민지시대 종교예술의 폭넓은 수집품은 1층의 박물관에 있다.
1층 입구에 3.4톤 상당의 무게의 범종이 있다.
2층 복도에는 멕시코인들의 문화를 엿볼수 있는 그림들이 있고 68석의 성가대와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그 옆방에는 지금까지 신부와 수사들이 입었던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개장 시간은 오전 8시에서 12시,
오후 1시에서 5시까지 연중무휴이다. 길 건너편에는 바리오 산 루이스,무랄라 레스토랑,
19세 기 필리핀 맨션을 재연출한 카사 마닐라가 있다.
●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
인트라무로스 내 로마 광장 이라 불리는 광장에 1581년에 세워진 마닐라 대사원은 스페인 통치의 유산이다.
가톨릭 선교에 큰 역할를 해냈고 화재와 태풍, 지진 등으로 파괴될 때마다 새로 지었으나 최후로 2차
대전 때 미국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1945년에 시작하여 1958년에 필리핀 건축가 훼르난도
오캄포에 의해 재건된 현사원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가며 바티칸으로 부터
원조를 받아 세웠다고 한다. 총 7번에 걸쳐 지진이나 태풍, 화재 등으로 그때마다 부분 수리하거나 다시 지어졌다
. 이 성당은 필리핀에서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종교적 상징주의로 만든 스테인글라스 창문과 성당의
역사를 묘사해주는 청동문으로 유명한 로마네스크-비잔틴양식으로 1958년 재건된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과거 재해 발생연도의 간격을 조사한 결과 평균 발생기간으로 추측하건대 2006년에
다시 파괴되는 재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 파코파크 성당(Paco Park Church)
파코공원은 1820년대 콜레라의 공습으로 인한 공동묘지의 부족과 필요에 의해 건축되어진 필리핀의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묘지중의 하나이다. PACO라고 유명한 San Fernando de Dilao 도미니칸 신부에 의해 1859년 마닐라 최초의 교회밖 묘지가 건축되었고 필리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Dr. Jose Rizal의 1896년 12월 30일 사형후 이곳으로 이전되어 묻혔던 곳으로 유명하다. 1966년 "파코공원"이라는 명칭과 국립공원으로 선포하였으며, 또한 이곳 안의 St. Pancratius 성당은 시정부의 도시계획 프로그램으로 산뜻한 새 단장을 하였다. 타원형의 돔을 감직하고있는 St.Pancratius 성당은 시민들의 조용하고 엄숙한 미사를 제공하고 있다.
● 내츄럴 성당(Natural Church)
필리핀의 모든 성당 건축 양식은 스페인풍의 영향을 받았으나 내추럴 성당만은 필리핀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야외 성당으로 자연 여건을 활용하여 만든 성당으로 유명하다.
3. 필리핀 관광지
●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1571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치하기 위하여 건설한 성벽 도시로 스페인인 레가스피가
선점하고 있던 지배자인 회교도 (라자 슐레이만)을 자기 지배하에 두고 활동해온 근거지였으나
1574년 중국 함대에 공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주변에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외적에 대비해
왔으나 1583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인트라무로스(성벽도시) 라는 이름 자체가 말하듯 당시 내부에는 스페인 총독 관저와 군사 시설
, 지배 계층의 저택, 12개의 교회, 3개의 수도원 ,여러 개의 병원,두 개의 대학과 약 300여 개의
주거용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거주자로는 스페인인과 스페인계 혼혈민에 한해서 자격을 주었고
인트라무로스 축조에 가담한 필리핀인들은 지금의 리잘 공원 주변에, 중국인은 대포의 사정거리
내 현재의 차이나 타운에 살도록 강요 당했다고 한다.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에 대부분 파괴 되었으며 지금은 성벽과 성문 일부만이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성 어거스틴 교회와 마닐라 대성당 등이 있고 성벽 바깥 쪽에는 18홀의 숏홀로만
구성되어있고 야간에도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골프 코스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인트라무로스 관광에 관한 안내는 산티아고 요새에 있는 인트라무로스 방문 센터에서 담당 한다.
이 방문 센터에서 인트라무로스의 관광이 시작되고 각종 안내 자료를 제공하며 이곳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하는 18분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한다. 30분, 1시간, 2시간짜리 3종류의 관광 프로
그램이 마련되어 있는데 충분히 관찰하려면 1시간 이상 걸린다.
●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인트라무로스 성내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마닐라만의 동정을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스페인
식민지 당시의 스페인 군대의 사령부이자 감옥으로 쓰였던 곳이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정문앞에 해자 도량을 만들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으며 성문과 연결되는 곳은 돌로 된 다리가 있어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으나 미군 점령시 말라리아 모기의 서식처라는 이유로 메워 버렸다.
요새 내부에는 리잘 기념관을 비롯하여 무기 탄약고와 지하 감옥의 자취가 있으며 지하
감옥은 바로 옆의 바다로 이어져 있다. 감옥은 바다의 수면보다도 낮기 때문에 밀물 때는
감옥 천장까지 물이 차올라 죄수가 익사하게 되어있고 시체는 수문을 열면 바다로 떠내려 가
게끔 해놓았다. 잔디밭 옆 쇠창살이 박혀있는 작은 감옥 앞의 길바닥에 박혀있는 사람의
발자국이 눈길을 끈다. 이것은 호세 리잘이 감옥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간 여정을
표시한 것으로 리잘 공원까지 이어져 있다.
2층 건물로된 리잘 기념관은 스페인 포병대가 막사로 사용하던 곳으로 1층에는 리잘이
갇혀 지내던 감방이 있다. 리잘이 소유하던 예술품, 책, 원고, 곤충 채집,의상을 비롯한
개인용품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리잘이 총살될 때까지 수인의 나날을 보냈던 방이 아직
남아 있다. 리잘이 처형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조국에 바친시 (미울띠모 아디오스-내 마지막 안녕)가
각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고 우리나라 말로도 번역되어있다. 2차대전 당시 파괴됐던 많은 부분을
1950년대 복원해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과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리잘 공원(Rizal Park)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잘(Jose Rizal)을 기리는 공원으로 마닐라만 근교 로하스 거리에 있다.
마닐라 중앙부에 위치해있는 시민의 휴식처로서 옛 이름은 루네타 공원이었다. 필리핀 독립의 영웅
호세 리잘의 동상은 공원의 상징이며, 기념탑 뒤에는 그가 처형당하기 직전 조국 필리핀을 위해 남긴 시
"나의 마지막 고별(Mi Ultimo Adios)"이 세계 주요 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스페인 식민정책에 항거하던
리잘이 1896년 이곳 리잘 공원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공원내에는 잔디밭과 수목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고 중국 정원과, 국립도서관, 지구본, 분수
등이 있으며 카페테리아도 있다. 공원 입구의 리잘 기념탑 앞에서 무장한 헌병이 이곳에서 매일
경계 근무를 선다. 공원 동쪽의 인공 호수에는 필리핀 군도 전체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7107 개의 섬으로 된 필리핀 군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공원 북쪽의 수족관에서는
아름다운 열대어를 구경 할 수 있다. 지구본 분수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그리스 신전 양식의
필리핀 정부 관광국 건물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재무부 건물이 있다.
● 팍상한 폭포(Pagsanjan Falls)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05km 지점에 있는 세계 7대 절경의 하나인 팍상한 지역은 장엄한 폭포와
스릴 넘치는 계곡에서의 급류타기가 으뜸이다. 미국의 콜로라도 강의 급류타기의 모험을 기대 하기는
어려우나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역적으로 베트남과 비슷하기에 월남전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킬링필드,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등은 유명하다.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광고
등을 촬영한 장소이고 뮤직 비디오로도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다.
벙커라로 불리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를 타고 급류를 1시간 20분 정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낙차 90m의 팍상한 폭포를 보고 난후 그 폭포를 맞으며 조그맣게 형성된 동굴 안으로 들어 갔다
나오는 코스로 팍상한 관광은 절정에 이른다. 돌아올 때는 타고왔던 벙카를 다시 타고 빠른 속도로
계곡을 타고 내려오게 되는데 그때의 스피드와 스릴은 오래오래 간직하게 될 것이다. 팍상한은
눈으로 보는관광과 마음으로 보는 관광을 다 할 수 있는곳이라 한다. 그럴만한데는 이유가 있다.
방카를 모는 사공을 보면서 마음으로 보는 관광을 할 것이고 주위 절경을 보면 눈으로 보는 관광이
될 것이다. 우선 벙커는 1~2인승로 대개는 2명이 타게 되고 앞뒤로 사공이 탄다. 처음에는
모터 보트에 견인되어 호수를 따라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모터 보트는 떨어져 나가고 이때
부터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 까지인가를 실감케 된다. 2명의 사공은 우리가 타고 있는 벙커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면서 계곡의 끝인 폭포 까지 올라
가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벙커를 들기도 하고 노도 저으면서 장소에 따라서는 70~80 cm 밖에 되지
않는 협수로를 통과 하기도 한다. 벙커에 타고 있는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주위의 절경을 구경하면서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공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줄 몰라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게 직업이고 숙련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안써도 된다. 그 행동을 보면 이 사람들이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상류로 올라갈 때의 중노동과
내려 올 때의 민첩한 연결 동작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 사람들은 전체 벙커 운영 협회에
가입이 되있어서 기본적인 운임은 여행경비에 포함(마닐라 투어)이 되 있지만 팁은 손님
개개인이 주어야 한다. 1인당 보통 200페소에서 300페소 까지 주면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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