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방서예[3326]金明國筆人物圖,畵題
金明國筆人物圖,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4.2(60.6)cm * 38.8cm
이 그림에 대해서 아신다면,
적어도 어떤 정보를 갖고 계신다면 그대도 문화인임에는 틀림없으리라.
더 나아가 이 그림을 사랑하노라 하고 감격하시는 분은 예술인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그 정보의 대부분은 아래의 이야기 즉
유흥준님의 '화인열전'에서 습득한 정보일 것이리라..
*********
내가 화인열전을 펴내고 이 그림을 그냥 도사,
지팡이를 짚고 가는 도사의 그림이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이 시도 제대로 번역을 하지 못해서 기존에 있는
그 시를 번역을 한 것을 가지고 따랐는데
내 친구이기도 한 연세 대학교 철학과의 이광호 교수가 이 시를 다시 해석을 하고서
나한테 한밤중에 전화를 했어요. 이것이 연담의 죽음의 자화상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건을 쓰고 그리고 지팡이 짚고서 황천길로 가는
그 모습을 그린 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화상을 그렸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유명하지만
자기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은 몇 사람 있었을까? 또 그것도 지금 난 딱 둘 봐요.
죽음의 자화상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구름 위에 연꽃에 앉아서 멀리 극락세계로 가고 있는 꿈의
자화상 같은 거죠. 그걸 그렸어요.
단원은 그래도 고결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또 그의 마음대로 극락세계에 가는 것을 희망하는
그 구름 속에서 연 봉우리에 앉아가는 모습을 그렸지만
연담 김명국 술꾼이고 천한 인생으로 살았던
이 사람은 내가 가봐야 지옥밖에 더 가겠어?
하는 그런 심정으로 해서 황천길로 가는 이런 그림을
그린 걸 보면 참 그분의 기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얘기하죠.
[출처] 화인열전 -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
아래는 그 유흥준님의 다른 장소에서의 얘기
[중앙일보 2001-05-25 18:18]
한 서울대 학생이 1부터 10까지를 한자로 쓰지 못했다는 보도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한자교육의 상실로 요즘 젊은이들이 일상생활.
직장생활에서 겪는 낭패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한 예로 결혼식과 장례식장의 축하객.조문객을 접수하는 젊은이들은
봉투와 방명록에 쓰인 한자 때문에 생고생을 한다.
***인문학 연구 제대로 될까
나와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시각디자이너 이봉섭(李奉燮)교수는
한자 때문에 곧잘 봉변을 당한다.
대구의 어느 회사에서 교수들에게 사보를 달마다 보내오는데
그 봉투엔 항시 '이봉변 교수님 귀하'
로 쓰여 있는 것이다. 섭(燮)자와 변(變)자를 혼동한 것이다.
보다 못한 나머지 李교수는 그 회사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바꾸지 맙시다" 고
써서 엽서를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 달에 온 우편물에는 '이태변 교수님 귀하' 로 돼 있었다.
이번엔 봉(奉)자와 태(泰)자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이 당한 李교수는 체념적으로 이렇게 써서 보냈다.
"차라리 먼젓번 것이 조금 낫습니다. "
한자 때문에 이처럼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웃음이 아니라
심각한 잘못으로 나타날 때면 한자교육에 대한 과감한 단행을 읍소하는 마음으로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실상을 따지자면 한자교육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한문교육이다.
인문학, 그 중에서도 국학(國學)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문은 필수다.
아니 한문을 모르면 우리의 학문은 연구될 수 없다.
그 한문교육은 언어교육이기 때문에 영어처럼 조기교육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 배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으로 내가 조선시대 회화사를 공부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조선시대 그림과 관계된 문헌들이 모두 한문일 뿐만 아니라 그림에 쓰인
제화시(題畵詩)와 畵評은 한문 중에서도 읽기 힘든 초서로 돼 있다.
그래서 명화를 해설한다고 글을 쓰면서 "화면 우측 상단에 시 한 수가 유려한 글씨로 쓰여 있다" 고 있으나마나 한 말을 덧붙이고 슬며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일대기를 엮은 『화인열전(畵人列傳)』을 쓰면서 나는 그림 속의 한문을 해독 하느라 무척 고생했다.
그런 중 연담 김명국이라는 17세기 인조 때 신필(神筆)이 그린 명작 '은사도(隱士圖)' 는
마침 다른 책에 그림 속의 한시가 번역돼 있어 조금도 의심하는 일 없이 이에 따르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은일자의 고고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장황하게 해설했다.
그런데 『화인열전』을 읽은 연세대 이광호 교수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은사도' 에 쓰여 있는 시는 어떤 은일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가 자신의 죽음을 그린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인데 (將無能作有)
내가 그림으로 그릴망정 유언으로 전하겠는가 (畵貌豈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지만 (世上多騷客)
누가 이미 흩어진 넋을 불러주리 (誰招己散魂)
그림 속의 시에 의하건대 이 그림은 '죽음의 자화상' 인 것이었다.
죽음의 자화상이라!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극적인 내용인가. 저승길로 유유히 떠나는 자신의 죽음을 그린 그런 처연한 그림을 두고 그저 냉랭하게 '은사도' 라고 설명한 것은 비록 미필적 고의이기는 하지만 거짓을 세상에 퍼뜨린 죄에 해당한다.
***한글전용과 한문은 별개
지금은 그래도 이광호 교수처럼 한문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그 잘못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누가 이런 오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누구 못지 않은 한글전용론자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주장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전용과 한문교육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한글전용을 강화할수록 우리는 한문교육을 강화하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서양사람들이 그네들의 고전을 읽기 위해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우리는 그 이상으로 한문을 일찍부터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민족정신은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 · 한국미술사
************
유선생님께서 무슨 무당이 작두타듯, 깜빵 속의 요한이 계시록 써제끼듯 신명나게 써내려간 위 그림의 풀이....
이후로 이 그림은---나로선 도무지 이해안되는 그림, 굳이 이해를 해볼라치면
양해梁楷의 그 무슨 발묵선인도인가 하는 그 술주정뱅이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
이 그림은 '죽음의 자화상'이라는 그야말로 극적인 전개를 펼치게 된다.
그래서 식자간에는 그의 신필 '달마도' 보다 '은사도'라는 이 그림이 더 스팟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먼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두 분 다 한마디로 전혀 그림도 글씨도 제 맘 내키는 대로 풀이한 얘기이다.
그대의 눈에도 위 그림에서 상식적으로 연담이라 쓴 필체와 제시의 필체가 같아 보이는가?
그대의 눈에도 종이가 같아 보이는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위의 시가 연담의 시라고 단정하는가 ?
위의 제시는 연담선생 자신의 시가 아니라 당대 또는 후대의 이 그림을 감상하거나
그림의 소장가가 찬시로서 붙였을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한데
그림에 대한 객관적 분석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 시를 연담 자신의 시로 단정하여 풀이하는
무리수를 둔 것이라.
또 백번 양보하여 연담 자신의 시라고 해도
위의 이 교수님께서 다시 풀은 한시의 풀이도 잘못된 것이다.
위의 시는 죽음의 자화상은 커녕 오만한 시인들의 콧대를 납짝하게 만들고
화인(화가)들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준 김명국 할배를 대신한 '사자후'이다.
위의 시를 다시 풀이하면 이러하다.
將無能作有 無에서 有를 만듬에 있어서.
畵貌豈傳言 모습을 그려 전하지 어찌 시로 전하랴.
世上多騷客 세상에 시인들은 많이 있었으나
誰招己散魂 흩어진 혼을 위해 누가 초혼해 주었던가
* 無는 그리지 않은 백지를 의미한다. (그림을 그림에 있어 이런 표현은 늘상 유행하던 표현이다.)
* 作有는 백지에다가 글씨나 그림을 그리려 하다. 의 의미이다.
將無能作有는 無의 상태인 백지에서 글씨나 그림을 그리면 有로 된다. 그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논어 팔일의 회사후소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조선 그림에 이 無作有의 구절로 된 찬시가 더러 있다. (나중에 찾아서 올림)
* 言은 여기서 詩의 의미로 쓰였다. 韻 때문에 그런 것이다.
言과 魂이 운이다. (上平성, 元운임)
왜 言이 詩로 쓰일 수 밖에 없느냐 하면 앞의 畵와 對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으로 전하지 어찌 시로 전 하랴
畵貌豈傳言에서 傳畵貌에서 傳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으로 전하지 어찌 시로 전하리오.
* 이교수님의 결정적인 미스는 傳言을 傳遺言으로 창작한 데서 기인한다.
이 미스를 또 생각없이 유교수가 수용함으로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웅성거리게 되어 결국 이 그림의 주인공, 어느 은사隱士인지 어느 주정뱅이인 연담선생 자신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헤어날 길 없는 '죽음의 자화상'으로 굳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미술의 평론도, 세상의 평가도 이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이 畵貌의 구절에서 이 그림의 주인공이 물론 어느 술꾼일 수도 있겠지만,
호가 醉翁인 김명국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이 그림을 감상하고 이 찬시를 쓴 사람도 연담선생의 행적을 떠올렸거나,
아니면 이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느 술꾼의 기운생동(氣韻生動)에 있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 풀풀 풍기는 이 그림 한 폭이 앵무새같은 시
백편보다 낫더라고 시각(그림)의 위력에 감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제목 붙이자면 "醉翁圖'라 이름 붙일 수 밖에 없다.
* 貌는 스케치.
* 騷客은 이소를 지은 굴원으로 시인의 대칭이다.
* 招는 위 교수님 풀이한 초청, 초대의 뜻이 아니라
초혼, 즉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위로하는 것으로 招魂祭조차 올려 주더냐의 뜻이다.
바로 밑에 산혼이 나오기 때문이다.
* 散魂은 흩어진 혼, 죽은 혼.
이를 다시 의역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將無能作有 흰종이를 앞에 두고 붓을 들었으니.
畵貌豈傳言 그림으로 전할뿐 어찌 시로 전하랴.
世上多騷客 세상에 시인들이야 수많이 있었지만
誰招己散魂 죽은 뒤에 누가 초혼하여 위로해 주었던가
그래서 이 시 내용은 한마디로 百詩가 不如一畵라.
이 그림 하나가 시인들의 백마디 짹짹거리는
시들보다 감동이 크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왜 이런 해깔리도록 어려운 제화시가 붙어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그림의 제시나 찬시에는 그림의 의경에 감탄한 것과
그림 자체를 의론한 시들로 양분되는데 이처럼 그림자체의 경지에 대해서
의론한 것들도 많다. 신윤복의 미인도도 그러하고..... .
아아.. 誰招己散魂..... 연담 할배의 혼은 누가 위로해주나
개인적으로 대놓고 솔직히 얘기하자면,
은사도(隱士圖)란 제목부터가 엉터리로 생각된다.
(하긴 동양화 제목의 태반은 엉터리인 것을 말해 무엇하랴).
하물며 죽음의 자화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벌써 동양적인 사고가 아니다.
(이 비슷한 오류가 심경호 교수님인가?
쓰신 김시습 평전에서 서시를 해석한데서도 보인다.)
여러분은 그림의 모습이 은사의 고고한 자태로 보이시는가?
아니면 술 취한 늙은이가 술이 취해 꼬꾸라지기 직전의
닐리리야 춤을 추는 것으로 보이시는가?
글씨를 사리하고 가만히 그림만을 보라.......
[출처] 연담 김명국 은사도?|작성자 허생
마지막으로 살펴볼 그림은 달마도 내지 선종화가 아니다.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 짚은 인물을 그린 것이다.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은사도(隱士圖)>라고 제목을 칭한다.
인물은 고개 숙인 모습인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저 먹을 한 바퀴
칠해두기만 한 형국이다. 이처럼 기묘한 형상과 상단에 쓰인 제시(題詩) 탓에,
유홍준은 이것이 김명국이 자신의 황천행을 그린
'죽음의 자화상'이라는 소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합당한 해석인가?
취옹이라는 호를 즐겨 쓰며 무슨 그림이든 취필로 달관하였을
김명국의 말년을 생각하면, 저토록 처연하게 저 자신의 죽음을 소묘하였다는
주장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제시를 쓴 사람이 김명국 본인이라면
정녕 그럴지도 모르지만, 반론이 가능하다.
제시가 쓰인 상단을 살펴보라. 종이가 다르다.
김명국이 아니라, 후대의 수장가가 별도의 종이를 장황해서 발문을 붙였음을
추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수장가들은 그림 원본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이 방법을 애용하였다). 그림의 분위기가 숙연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과연 추포(麤布)를 걸친 자의 처량함인지,
아니면 그저 도포자락 휘날리는 은일자의 고독함인지는 제각기 판단해봐야 할 몫이다.
하여간 제시를 붙인 자의 경우, 이 그림에서 죽음의 형상을 보았던 듯하다.
내겐 초서를 해독할 재간이 없다만,
유홍준이 제시한 정자(正字) 원문을 참조하여 아래와 같이 번역해보았다.
將無能作有 대저 무(無)에서 유(有)를 능히 짓나니
畵貌豈傳言 그림으로 본뜰 뿐 어찌 말로 전하겠는가
世上多騷客 세상에 떠들어대는 객들 많지만
誰招已散魂 이미 흩어진 혼을 누가 불러줄련지
수구(首句)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
이에 대해 유홍준(의 친구)이 제출한 번역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이다.
보다 매끄럽게 읽히긴 한다만 얼마간 의역이다.
과연 셋째 글자가 能이 맞는지 의아한데, 추후에라도 살펴볼 일이다.
하여간, 내겐 이것이 고인이 된 김명국을 애석해하는 초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