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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경이로운 삶
출 16: 13-18, 눅 11: 2-4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하여 부대에 전입한 다음 한 주간의 자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 때 처음 휴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면 가장 보람 있는 첫 휴가가 될까?” 혼자서 생각해보니 할 일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만나야 할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일, 모든 사람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차피 다 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것만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부모님께 인사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훈련을 잘 마치고 왔노라고 인사하고 곧장 기도원에 갔습니다. 가서 며칠을 기도하며 찬송하며 지냅니다. 그 때 하늘을 봐도 신비롭고, 나뭇잎을 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물소리는 어쩜 그리 아름다운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원에서 내려와 부모님께 인사하고 부대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매일 보는 것이 경이롭고 재미 있습니까? 매일 접하는 일들이 정말 재미 있고 신비롭게 다가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의 일과가 기대되고 가슴이 뜁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활기가 있습니까? 내 삶이 생각만 해도 은혜롭고 즐겁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존 템플턴은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그 속성상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80-20법칙에 의하면 20%의 생각은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으로 매일의 삶을 경이로운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늘에는 희망이 있고, 새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어떤이는 침울하고 지겨운 삶을 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이지만 어떤이는 유쾌하고 희망찬 삶을 삽니다. 최근에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이 쓴 ‘생각의 법칙’(Thinking for Change)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 같은 말이지만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적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침에 땅에 내린 만나를 보고 경이롭고 신비했습니다. 매일 똑같은 음식이며 똑같은 날이지만 이 경이와 신비가 40년을 계속했다고 했습니다. 매일 경이로운 삶입니다. 매일 신비로운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매일 경이와 신비가 가득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과 아침에 각각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저녁 메뉴와 아침 메뉴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매일의 양식에 싫증이 날까봐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양식은 매일 내리는 양식입니다. 하루에 적절하게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어떤 날은 많이 먹고 어떤 날은 적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많이 거두어 먹고 남으면 벌레가 생겨 먹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안식일애는 거두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먹을 양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매일을 수고하지 않고 먹는게 신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는 신비한 음식입니다. 먹을 때마다 맛이 있는 음식입니다. 40년을 똑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고 그들은 “오늘 뭐 좀 다른 것 없어?”라고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신비롭게 먹었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며칠만 똑같은 반찬을 먹어도 “우리는 왜 매일 이것만 먹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40년을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40년 내내 경이롭고 신비한 음식이 만나였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3년 동안 매끼를 다른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중 요리사들이 각 집의 온갖 음식을 다 동원하여 중국의 음식 종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요리 책에 있는 요리 가지 수만 하더라도 3천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 까다롭습니다. 자기 입맛이 없는 것은 모르고, 며느리 손재주만 타박하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입맛이 없으면 아무리 맛있어도 맛있는 음식이겠어요? 날마다 감사하면 맛없는 음식이 없습니다. 수도원의 음식은 최소한의 음식입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입니다. 매일 거의 똑같은 음식입니다. 밀가루 빵과 콩 삶은 것과 올리브가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하니 맛이 있어요. 하나님의 신비가 있으면 매일 경이로와요. 매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매일 똑같은 지겨운 삶을 살기도 하고, 매일 다른 신비로운 삶도 삽니다.
어떤 분의 가게에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근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이 제게 “우리야 매일 똑같지요. 아침에 나와서 가게 문 열고, 저녁에 들어가고, 집에 들어가서 정리하고 잠자고 또 아침이면 나오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오늘 돈 얼마나 벌었어요?” 그 분이 얼마를 벌었답니다. “어제는 얼마를 벌었어요?” 어제는 얼마를 벌었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 보세요. 어제 보다 오늘이 조금 더 벌었네요. 매일 조금 수입도 차이가 나고, 오는 사람도 다르고, 다른 얘기하는데 왜 똑같다고 그럽니까? 매일 다른 삶이지요.”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매일 다르고, 신비롭고, 재미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사람 만나고, 가르치고, 설교 준비하고, 심방하고 그리고 주일이면 설교하고, 또 사람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매일 다른 삶이지요. 매번 다른 사람 만나지요. 대화의 내용이 다르지요. 설교할 때마다 다른 설교하지요. 결혼 주례할 때면 매번 다른 사람이지요. 장례식 가면 매번 다른 사람이 돌아가시지요.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매일 “이것이 뭐냐”라고 경탄하는 신비로운 삶의 연속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대가 하루 하루 그대의 생활의 기적에서 나오는 경이를 그대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대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놀라움을 보이게 되리. 그리하여 그대 슬픔의 계절들은 평온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기대감이 넘치고,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즐거움도, 놀라움도, 감사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볼 때에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신비로 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아는 것을 내려놓고 모르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양식입니다.
만나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은 음식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어떤 사람은 경이롭고, 어떤 사람은 경이롭지 않은 음식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경이로운 음식입니다. 모두에게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면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정당한 요구입니까? 당시에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 생활이란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당시의 상황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잘 난타납니다. 아마 구약 시대는 이런 음식에 대한 갈급함이 더 했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감히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삶은 여호와가 목자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목자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8: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왜 만나를 주셨습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마침내”란 말을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구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하여 낮추시고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면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근거는 만나입니다. 하루에만 넉넉한 양식이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먹고 남고 버리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에 인디언들의 삶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주문하여 보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욕심 없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침범한 백인들이 땅을 차지한 자격지심으로 포악한 사람, 몽매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디언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연에 대한 지혜가 넘칩니다. 그 책에는 “백인들은 그들의 끝없는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치우는 것도 모자라 끝내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모든 바닷물을 다 삼키고도 모자랍니다. 오마하족의 격언에는 “훔친 음식은 결코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대지와 친화하고 가지는 것보다 베푸는데 의미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신비로와질 것입니다.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의 경이로움, 신비로움은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경이로운 삶은 40년을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35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사람 사는 땅”을 “가나안 지경”이라 합니다. 광야는 사람 사는 곳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살 데가 못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도 못되는 척박한 곳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은혜롭게, 풍부하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놀라는 경이로운 40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명기 2:17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고 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움, 신비로움, 놀라움,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매일 계속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난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 경이로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지금도 주시는 은총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가다듬고 보세요. 뜨는 해와 스치는 사람, 호흡하게 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신령한 가나안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감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마다 “하나님 무엇을 주시렵니까?”(창 15:2)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엇인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면 수지 맞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렵니까?”라고 하는 신비한 기대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이 불행한 어린이를 부모는 아주 어렵게 키웠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15세쯤 되는 해에 수술을 하여 어린이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눈을 뜨고 보는 이 세상은 신비롭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느날 이 소년을 아룸다운 대자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만에 보는 자연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왔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원망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이 땅 위에 있음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울먹이며 “난들 왜 말해주고 싶지 않았겠느냐.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가 설명을 한다 해도 네가 알아들을 수 있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름답고 신령한 세계를 우리가 아무리 설명을 잘 듣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 소년과 같은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주셔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둔해 깨닫지 못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보고도 경이로울게 없다고 합니다. “왜 나에게는 감격도, 기쁨도, 경이로움도 안 주십니까?”라고 어리석은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온통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것은 경이로음과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말했습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a gift).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도 신비, 오늘도 신비, 내일도 신비이다”. 정말 우리의 삶이 경이로움의 연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경이감과 열정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세계가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말을 배우면 “이게 뭐야?”로 시작합니다. 보는 것마다 “이게 뭐야?”라고 묻습니다. 아기들은 매일 만나를 경험하는 삶을 삽니다. 어른이 되면 “이게 뭐야?”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이 우리 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만나의 경이로움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온통 신비입니다.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사람의 몸은 생체의 경이로움 덩어리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경이로움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의 경험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런답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은 망해야 되고, 재무구조나 노사문제나 모든 문제를 보면 안돼야 하는데 되고 있어서 이상한 나라라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지난 달에는 수출이 172억 달라로 월간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부산항의 크랜인이 태풍에 무너져 망해야 하는데 망하기는커녕 더 잘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은 참 경이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신비롭게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매일 경이로움의 연속으로 삽시다. 우리의 사는 날이 앞으로 40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하루하루의 남은 날동안 날마나 “이것이 무엇이냐”, 아침마다 경이롭고, 밤마다 감사가 넘치는 감동의 연속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출 16: 13-20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도 역시 독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독도가 무주지, 즉 주인없는 섬인 독도를 선점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선점이라는 것은, 즉 주인없는 땅을 먼저 발견하여 소유한 국가가 그 영토의 주인이 된다는 논리입니다.1905년 독도를 편입하였다는 일본의 '편입설'에 따른 내용입니다.
주인없는 땅인 독도를 1905년 자신의 영토 시마네현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선점을 하였기 때문에 독도는 그 이후로 자신들의 소유 영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독도가 일본의 설명대로 임자없는 땅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독도는 512년부터 신라 지증왕13년에 독도를 우산이라 불러서 신라에 속해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14년의 지도에도 우산 즉 독도가 울릉현에 속해 있음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태정宮>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朝鮮東海岸圖>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일본전쟁실기>,1936년 일본육군 참?br>齊뻠恝【?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1905년에 주인 없는 땅을 일본에 편입했다는 억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환영 받으며 들어갔으나 노예가 된 히브리민족
역사는 이렇게 가끔 오랜 역사를 지나다 보면 생각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민족은 야곱의 11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면서 기근을 피하여 요셉 덕분에 대우 받으며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 요셉도 죽고 요셉의 공로를 아는 왕과 관리도 죽으면서 애굽왕과 관리들이 이스라엘민족을 미워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이스라엘민족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400여 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민족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으로 10가지 재앙을 쏟으셔서 바로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은 극적으로 해방을 받게 되있습니다. 해방을 받은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함께 그들의 본토인 가나안을 향하여 민족 대 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은 거의 사막길입니다.
그 괴로운 사막길을 군인도 아닌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200만 명 가량의 인구가 이동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약 2개월 쯤 지난 후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최대한의 양식을 준비하기는 하였지만 2달쯤 지나니 양식이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더 가야 될지 잘 모릅니다. 양식을 떨어 졌습니다. 배는 고프고 어린아이들은 밥을 달라고 울고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먹을 양식을 어디서 구합니까? 결국 모세에게 원망을 합니다
.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는 노예이기는 하지만 먹을 것은 먹고 살았는데 이렇게 끌고 나와서 먹을 것도 없어 주려 죽게 한다고 원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너무 답답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꼭 응답하십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템플 목사가 한 번은 케임브리지 대학 채플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채플에서는 이런 제목의 설교는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채플이 끝나자 한 학생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이 과학시대에 아직까지도 기도의 응답이라는 미신 같은 소리를 믿고
계십니까? 우연의 일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템플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가 우연의 일치라고요?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학생,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그쳐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기도 응답을 우연히 운대가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내가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채우시리라" 고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메추라기가 날아가다가 동풍에 날지를 못하고 모두 주저 앉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나가서 그 메추라기를 잡아다가 입에 고기가 냄새가 나도록 사막에서 고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아침에는 이슬이 마른 후에 작고 둥글고 서리같은 것이 소복이 내려 있어서 "이것이 무엇이냐?" 궁금해 하는데 이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만~후" 입니다. 그렇게 감격하였던 것이 이름이 되어 "만나"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 사막
에서도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만나를 주시면서 매우 중요한 재물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1)하나님은 재물의 욕심을 가지지 말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한 카드회사에서 광고할 때 "부자 되세요" 하는 말이 한 때 인기였습니다. 부자되라는 말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 클수록 욕심이 커집니다. 욕심은 위험 한 결과를 낳습니다. 황소의 거대한 몸짓을 본 개구리가 황소처럼 되어보겠다고 바람을 마셔 배를 부풀게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 버렸답니다. 뱀이 두꺼비에게 접근하니 두꺼비가 몸을 한 없이 부풀려서 뱀과 대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만 황소만해 지려면 터져 죽습니다.
고깃덩어리를 훔친 개가 다리를 건너다 강 밑을 보니 어떤 개가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 고기를 빼앗겠다고 짖다가 그만 물고 있던 고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욕심은 이렇게 자기를 망치게 합니다. 미국에서 어떤 장사꾼이 열심히 노력하여 육십세에 미화 백만달러를 모았습니다.(12억) 그가 돈을 모으자 친지들과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그만 벌고 나머지인생을 재미있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적어도 앞으로 이십년은 더 살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백만달러로는 안심이 안 돼. 나는
돈이 더 있어야만 해" 라고 말하며 쉬지 않고 기를 쓰며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삼년이 지나기도 전 에 병들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 꼭 하루 분만 거두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틀 분을 거두어 가면 썩고 벌레 나고 냄새나게 하였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썩습니다. 냄새납니다. 그리고 결국 망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죄가 자라면 죽는다고 야고보서에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세요 옷을 만들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창고가 없어도 굶어 죽는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삶의 원칙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듯이 우리의 일용할 것을 날마다 채워 주십니다.
2)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산다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셔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받아야 함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일 산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은 정말 재산을 모아야 마음 편히 산다고 생각합니다. 돈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을 많이 모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생각이 점점 식어지고 자기 재산으로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이 큰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그 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대출을 많이 받았습니다.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어서 저도 축하하러 그 뒤에 한 번 갔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신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담임목사님을 입이 닳도록 자랑합니다. 저도 갔으니까 예배를 드리지는 않아도 성경을 한 구절 읽고 그 분의 손을 잡고 기도 해 드렸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마음이 긴장이 되기는 한가 봅니다.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정성스럽게 감사헌금을 드리셨습니다. 그 후 그런 마음을 귀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그 사업을 ?br>萍▤構?하셨고 빚도 다 정리하고 재산이 모아져서 걱정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한 번 그 사업장에 갔는데 그렇게 담임목사님 흠을 말합니다. 전에는 그렇게 어려워도 감사헌금을 꼭 하더니 식사대접 할 시간도 없다고 바쁘다고 밖으로 나가서 나도 속히 나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그 분은 하나님을 처음처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살 만큼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산다는 철학이 확실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철학을 기르기 위하여 매일 만나를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분이 순종하거나 말거나 저는 강조합니다. 매일 새벽기도 해야 합니다. 성경매일 읽어야 합니다.
3)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만나를 주일 일을 7절에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크신 위엄을 말할 때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 빽빽하여 하나님의 기절할 만큼 놀라운 능력을 보이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아침 한끼를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늘 보는 가족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감격으로 보고 살아야 합니다. 매일 먹는 음식에서 하나님께 기절할 만큼 큰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세무서 직원이 한 목사의 집에 불쑥 찾아왔답니다. "댁의 재산을 조사하려고 세무서에서 왔습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엄청난 부자라고 얘기하던 목사답게 그는 대뜸 이렇게 실토했습니다. "저는 숨겨둔 재산이 아주 많습니다."
세무 공무원은 한 건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부리나케 장부를 꺼내 들었습니다. 당시는 전산화가 되지 않았을 대이기 때문에 더 합니다. 이제 재산 목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려 합니다. "저에게는 열정을 주시고 또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고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저에게는 가장 귀중합니다." 세무서 직원은 그것 ?br>뺐?이 세상에 있는 빨리 대라고 재촉했습니다. "예, 저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주님을 위해 나를 돕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지요. 그 아내야말로 제게는 보물입니다. 솔로몬 왕이 말했듯이 귀한 아내는 보석보다 가치가 큽니다." 다소 실망한 세무서 직원은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건강하고 믿음 좋은 자녀들이 있지요. 커서 하나님을 위해 귀히 쓰일 귀금속이지요." "그것 말고 뭐 없습니까?" "예. 제 마음 속에는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 "그 외에 다른 건 없습니까" "예, 그것이 저의 전재산입니다." 세무서 직원은 아무 것도 적지 못한 채 장부를 덮으며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댁은 정말 부유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 가운데 세금을 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군요." 우리가 늘 대하는 가장 평범한 것에 하나님의 감격이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지난 월요일에 오산리기도원 추석특별성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성회인도후 목사님께서 식사를 대접하여 주시는데 식당입구에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잘하는 음식점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잘하는 본점은 어디냐고 물으니 본점이 아니라 '당신 집입니다." 맞습니다. 평범한 중에 ?br>斂資?영광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신 것은 만나처럼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주셔야 산다는 고백으로 식사 한끼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감격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감격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으로 늘 축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출 16:13-20)
유대인 한 사람이 아랍인 두 사람과 함께 비행기를 탔습니다. 유대인이 구두를 벗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옆구리를 위협적으로 찌르면서 “어이, 가서 주스 두 잔만 가지고 와”하고 다그칩니다. 유대인은 기분이 나쁘지만 싸우기 싫어서 얼른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갔습니다. 그러자 아랍인들 둘이서 유대인이 벗어 놓은 구두 속에 침을 마구 뱉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대인이 가지고 온 주스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유대인이 구두를 신으려고 보니 구두 안에 침이 질퍽거렸습니다. 그 구두를 들고 유대인이 아랍인들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평화로우려면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구두에 침을 뱉지 말아야 되고 유대인은 아랍인들이 마시는 오렌지 주스에 오줌을 싸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인 평화 속에서 현세천국을 누리려면 버려야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망하는 버릇입니다. 2, 3, 7, 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원망합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민 21:4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원망합니다. 그들은 그 원망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갑자기 불뱀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뭅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뱁의 독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갑니다. 여기서서 불뱀은 악한 영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원망이 신앙을 죽인다는 사실과 원망이 인생에 고통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후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추억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들은 “차라리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죽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주려 죽게 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소행을 참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하늘에서 양식이 비와 같이 내리게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의 이름은 만나입니다. 만나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게 하셨고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이슬처럼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물체를 보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 말이 이것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수많은 보화 같은 음성이 있습니다만 오늘도 몇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방이 막힐 때도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방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나갈 길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봐야 할 곳은 바로 하늘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던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사막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든 곳이 광야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가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유대 광야를 보았습니다. 풀은 간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한 그루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이 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은 족히 넘는 숫자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광야에서 먹을 양식을 구할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정말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주님은 찾아오셨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백성들의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구약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약1:17을 보면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구약 시대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신약시대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07:19,20을 보면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위경을 만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한 집사님은 집을 샀는데 마지막 잔금 삼백만 원을 지불하지 못하여 계약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아는 곳에 다 연락을 해 보았지만 삼백만 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 함께 군 생활을 했던 친구가 서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내려왔다가 옛 친구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가 집사님의 얼굴을 보며 말했습니다. “자네, 얼굴이 좋지 않네. 왜 그래?” “사실은 오늘이 잔금 만기일인데 삼백만 원이 없어서 집도 잃고 계약금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네.” “그래? 마침 내게 삼백만 원이 있네.” 그래서 집사님이 잔금을 치르고 그 집을 샀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사방이 막혀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방이 막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만났는데 내 힘으로 풀 능력이 없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방이 막혀도 우리가 기도하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2.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맙시다.
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령대로 그날의 양식을 당일에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치를 한꺼번에 거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한꺼번에 며칠 먹을 것을 주시면 덜 번거러울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날마다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날마다 공급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쌓아놓지 않았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신실하게 공급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 한 달이 지난 때로부터 시작해서 39년 11개월 동안 변함없이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쌓아놓지 않아도 염려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없고 앞으로도 공급될만한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콘웰 목사님이 필라델피아 템플 침례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어느 날 저녁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십일조 헌금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이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일곱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콘웰 목사님은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와서 간증을 하게 했는데 모두가 십일조 헌금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로 나온 한 부인은 좀 머뭇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간증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실 하나님께 정직한 십일조를 드리느라 참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저는 나이가 많아졌고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곧 나와야 할 실정입니다. 이제 직장을 잃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이 여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고 냉냉하고 낙심한 분위기로 기도회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콘웰 목사님은 당시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존 워너메이커에게 점심초대를 받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식사를 하면서 자기 회사의 일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회사에서 오랫동안 잘 근무한 직원을 위한 연금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수년 동안 연구를 하고 계획해 왔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25년 정도 잘 근무한 한 직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의 자랑스러운 일이요,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그 때 콘웰 목사님은 “그 평생 연금을 타는 회사원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그 최초로 연금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콘웰 목사님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저녁에 일곱 번째로 나와 간증했던 바로 그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가일스 플레처의 에수님에 관한 은혜로운 글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이며,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이며,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이고, 병든 자에게 강건이며, 눈먼 자에게 광명이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다시는 잃지 않는 즐거움이며, 도둑맞지 않는 보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9년 11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염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3. 하늘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오지 마을 사람들이 구토하고 신음하고 피부병이 퍼져나가더니 마침내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정부에서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이곳저곳을 조사하다가 저수지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잠수복을 입고 연구원들이 식수원 상류의 수중을 탐색했습니다. 연구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커다란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떼로 죽어 수원 입구에 끼어 썩어 있었습니다. 돼지들의 썩은 사체가 오염시킨 물을 사람들이 마신 것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이 죽은 돼지들을 치우자 물은 다시 깨끗해 졌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물을 마신 마을 주민들의 건강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 양식을 먹었습니다. 시105:40에 보면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 양식을 먹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은 하늘 양식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상징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늘 양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늘 양식입니다. 만나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25) 예수님은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자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 양식입니다. 신 8:3에 보면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삽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 양식을 날마다 먹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날마다 하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묵상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하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3일 혹은 일주일동안 밥을 먹지 않고 있다가 한번에 3일치 혹은 일주일치를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몸에 이상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양식을 그런 방법으로 섭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에 하늘 양식을 먹고 3일간 참았다가 수요 예배 시간에 또 하늘 양식을 공급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하늘 양식을 먹고 또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다음 주일에 하늘 양식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병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는 이른 아침에 거두어야 했습니다. 새벽에 이슬처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이 뜨면 만나는 곧 스러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살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늘 양식은 이른 아침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슬 또한 이른 아침에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슬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이른 아침 새벽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얻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움직였듯이 영적인 만나를 얻어먹으려면 새벽기도회에 나와야 합니다.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응답하시고 새벽에 도와주십니다.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늦게 자기 때문입니다. 늦게 자면 정신병과 우울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날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새벽을 여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건강하고 영적으로는 신령해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은 축복의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새벽잠을 포기하면 하늘의 보물창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려면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저는 18살 때부터 새벽기도를 했지만 아직도 새벽체질이 되질 못했습니다. 30년을 새벽기도를 하고도 새벽마다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나의 육체는 잠을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쳐서 복종시키고 새벽기도를 나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새벽기도 기간은 하늘의 보화를 캐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양식이 내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몸의 상태도 달라지고 정신상태도 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양식을 먹어야 영적으로 건강하고 생활에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늘 양식을 먹어야 사람이 변화됩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는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과 눈썹이 빠지고 소화불량으로 우유와 크래커로 연명했습니다. 그리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수십 명의 보디가드가 지켜야 했고, 불면증으로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조사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회개하고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구호단체, 의학연구소, 대학 등을 도왔습니다. 페니실린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개발된 것입니다. 록펠러는 건강을 되찾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영원한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고 또 하늘의 양식인 말씀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어야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야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사람답게, 가치 있게, 뜻있게, 보람 있게 살려면 하늘의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4. 욕심 부리지 말고 욕심을 비우고 살아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했습니다. 먹을 만큼은 1인당 한 호멜씩입니다. 한 호멜은 약 2. 3리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호멜을 재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짐작으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짐작으로 만나를 거둬다가 호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 게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욕심을 부린다고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조금 비운다고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비우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말씀합니다.
톨스토이 우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 속에 담겨있는 [우리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글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시골에 사는 한 농부는 결혼해 소작을 하며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소작을 하다 보니 지주와의 충돌도 있고, 주변에서 땅을 사기 시작하자 농부도 땅을 살 필요를 느끼게 되면서 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사서 풍작이 들고 여유로워 지면서 점점 더 넓고 좋은 땅을 찾아가던 어느 날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하는 마을에 머무르게 됩니다. 땅을 사고 싶은 사람이 하루 동안 걸어 다닌 땅을 모두 1천루블에 양도하는 대신 출발한 당일에 출발점에 되돌아오지 못할 때는 지불한 돈이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천천히 출발하였는데 앞으로 나갈수록 자꾸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15리쯤 왔을 때 돌아가려고 했는데 땅이 너무 좋아서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고, 습지가 너무 아까워서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습니다. 목표점의 푯말이 점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다가, 자기가 욕심 부린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출발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걸음을 재촉해도 5리 밖에 못 왔는데 벌써 해가 지평선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출발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그는 쓰러졌다. 땅을 차지한 순간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 농부의 일꾼은 주인이 가져갔던 삽으로 그가 누울 수 있는 6척의 구덩이를 파고 주인을 묻었습니다. 결국 그가 목숨을 걸고 차지했던 땅은 한 평도 되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마치 모래사막에 자동차가 빠져서 바퀴가 헛돌면서 빠져 나오지 못 하는 것처럼 인생의 함정에 깊이 빠져있다면 욕심을 비우십시오. 모래사막에 자동차가 빠져서 바퀴가 빠져 나오지 못할 때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타이어에서 바람을 조금 빼냅니다. 그리고 운전하면 헛바퀴가 돌지 않는답니다. 탄탄하게 바람을 많이 넣은 타이어보다 조금 덜 바람을 넣으면 된답니다.
지금 여러분이 빠진 인생의 모래사막에서 나오려면 바람을 빼십시오. 욕심을 비우십시오. 높고자 하는 욕심,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을 비우십시오. 그러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을 정리합니다.
1. 사방이 막힐 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맙시다.
3. 하늘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4. 욕심 부리지 말고 욕심을 비우고 살아야 합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