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때 정문 앞에서 자취를 했었다.
동문 선후배들이 서로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반경 500미터 안에서 대부분 자취를 했거나 하숙을 했다.
그래서 자주 뭉쳤다.
자취방에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담배도 숱하게 피워댔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안주 삼아 열심히 씹어삼키곤 했었다.
격동기의 불안과 좌절 그리고 희망의 노래가 시시때때로 변주되던 시절이었다.
하룻밤을 지새우고 나면 방안이 온통 술병, 담배꽁초, 안주나 과자 부스러기 등으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었다.
진짜로 꼴불견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동물농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딱 맞는 닉네임이었다.
더 이상의 뛰어난 작명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몹시도 더러웠지만 그 안에서 우리들만의 우정과 신뢰가 켜켜이 쌓여 갔다.
더러움과 인간적인 끈끈함이 공존했던 작은 공간이었다.
81학번부터 90학번까지 대략 10여 년 간 '동물농장'은 늘 시끌벅적했고 끈적했으며 시종일관 훈훈했다.
나는 1년 재수하여 84학번으로 입학했지만 고교 선후배들의 모임이라 늘 83학번으로 통했다.
재수나 삼수 또는 군대를 다녀온 후에 입학을 했어도 그건 상관 없었다.
동문회 커뮤니티는 언제나 고딩 졸업 횟수가 기준이었다.
그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원칙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략 40여 년이 흘렀다.
하지만 '동물농장' 모임은 아직도 건재하고 친밀하기 그지 없다.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이 문제될 건 없었다.
그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이민 간 형제들까지 우리들 모임에 관심이 지대했다.
참석하지 못한 형제들은 사진이라도 많이 올려달라고 난리였다.
주말에 '석모도'에서 24년도 상반기 M.T를 진행했다.
캠퍼스 시절부터 네트웍의 중심에 있었던 나는 40년이 흐른 현재까지 회장겸 총무를 맡고 있는데 행사 때마다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았다.
신경 쓸 게 많아 어느 땐 머릿속이 복잡할 때도 있지만 그리운 형제들의 환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냥 설렜고 감사했다.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이젠 모두가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이 되었다.
속절없는 세월 속에 우리도 늙어 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곱고 향기롭게 익어 가는 중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어 미덥고 자랑스럽기 그지 없는 형제들이다.
먼 훗날 우리들이 7080이 될지라도 늘 캠퍼스 시절 같은 치기와 해학 그리고 싱그런 하모니를 열정적으로 합주했으면 좋겠다.
역동성은 떨어지겠지만 관록과 연륜은 더욱 깊어 지고 그윽해 질 것이다.
그 바람 하나 뿐이며 또한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세상살이가 그러하듯 화기애애하고 공고한 동문회 커뮤니티가 어찌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오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무수한 기다림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동물농장'도 존재하지 못했으리라.
단언컨대 인간의 조직이나 단체가 스스로 폭풍 성장해 거목으로 성장하는 케이스는 좀처럼 경험키 힘들 것이다.
각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니까.
앞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신뢰를 엮어가며 인생 2막을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동물농장' 형제들의 건강과 평안을 소망해 본다.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