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육사12기출신 이영진씨(예비역 대위)가 미국 LA에서 신동아 편집실에 보내온 수기를
발췌한 것이다*
나는 사단장에게 가서 그간 서울에서 들었던 내용을 보고한 다음 중대로 돌아왔다.
군생활에 절망감을 느낀 나는 하숙집으로 소대장들을 불러 놓고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셔대고 있는데
사단헌병중대의 낯익은 소위 한명이 백차를 몰고 와서는 “중대장님을 모셔오라기에 제가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 길로 사단헌병중대에 수감됐다.
수감돼 있는 동안 취조를 한다고 헌병중사 한명이 감방을 들락 거리면서 내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한림장군이 혁명군에 연금 당했다면 반혁명분자인데 반혁명분자를 동정해서 서울까지 갔다면 너도
반혁명분자 아닌가 하는 식이었다.
울화통이 터진 나는 “너하곤 입씨름 하고 싶지 않으니 취조를 하려거든 장교가 와서 하라” 말하고나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단사령부에는 헌병참모가 있는데 직접 나설수도 없고 헌병중대장은 나와 동기생이라 시킬수도 없어
하사관을 대신 보냈던 것이다.
나는 원주에 있는 1군헌병중대 감방으로 이송돼 2주일 정도 수감돼 있었다.
감방에는 1군예하 각 군단과 사단에서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대령들도 몇 사람 있었는데 거기서 특별히
심한 낭패는 당하지 않은듯 했다.
무슨일로 감방에 수감됐는지 모르나 며칠동안 고생하다가 자기가 쓰려고 가져온 세면도구 일체를 내게
건네준 1군감찰참모 박영석대령(후에 보안사령관역임) 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약 2주일후에 개정된 군법회의에서 나는 파면, 전급료 몰수, 징역 6일, 미통 6일 등의 선고를 받았다.
선고가 끝난후 낯익은 육군중위가 와서 군사령관을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낯익은 그방으로 갔다.
이한림장군이 군사령관시 당시 5군단장이던 박임항장군이 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있었고 낯익은 중위는
전속부관인 송석중위였다.
갑종출신인 그는 내가 육군본부의장대 소대장시 이강석소위 방에 출입하면서 나와 낯이 익었던 것이다.
뜻밖의 호의로 만나게 된 박임항중장은 “당신이 이영진 대위요?” 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 하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수 있는일은 전형집행정지뿐이오” 하기에,“감사합니다”
하고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후 나는 나대로 재심 청구와 새로운 보직문제 때문에 바빠서 박장군에게 인사를 치를 겨를도 없었다.
몇년이 지난후 박임항장군이 이한림장군, 박정희장군보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육사1년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장군이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잘해줬는지 짐작이 갔다.
답답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나는 그 서슬퍼런 혁명검찰부로 박창암 혁검부장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동기생 최필규대위가 수행부관으로 있었기도 했지만 비서실에 있던 다른 동기생인 김영건대위가 한번
만나 보는것이 낫지 않겠는가 권유했기 때문이다.
박창암부장과 안면이 있었지만 그와 이한림장군의 사이가 나쁨을 알고있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박부장을 만나서도 내입에서 살려달라는 소리는 없고 이장군을 두둔하는 듯한 말이 나오자 그는 역정을
내면서 “네가 그런 태도를 취하니까 의심받지 않는가” 하는 통에 그만 면담도 끝이 나고 말았다.
다음회는 "박태준 대령과의 인연"이
올려 집니다.
첫댓글 한순간의 판단이 인생을 좌우하는군요?
역사는 바뀔수 있다는 것이......
군대는 특히 줄을 어떻게 서느냐에 따라서 행로가 결정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