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최영규 시인 수상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리토피아 발행 수상자 최영규 시인은 1957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여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아침시집’, ‘나를 오른다’, ‘크레바스’가 있고,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바움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발전위원장,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심의위원장, 감사를 역임했다. 심사평 시 정신의 맥락에서 ‘자아에의 집중과 극복’이라는 성찰적 유사성 이번으로 어느덧 김구용시문학상이 13회 수상자를 내어놓게 되었다.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고 발표하면서 그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지만, 올해는 작년의 상황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22년은 김구용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우리 현대 시사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 마땅한 시인으로서 이를 기념하는 문단과 학계의 뜻깊은 여러 행사가 있었다. 물론 리토피아는 김구용시문학상의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김구용특집’을 마련함으로써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김구용의 위상을 우리 시사에 제대로 자리하게 하는데 그 서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진한 점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곧 성숙기에 들어선 김구용시문학상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면서 동시에 상의 위의(威儀)를 제대로 확립하는 바른 방향이기도 하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김구용은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던 1950년대에 이미 ‘시를 위한 노트’에 “비평가가 비록 절찬한다 할지라도 자기 작품에 스스로 불만을 느낄 때마다 그 공허감은 메워질 수 없다. 시는 독자를 위한 생산물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자아에의 집중이며 극복인 것이다”라는 시론을 거론한 바 있다. 이는 단순히 시인 지상주의나 시인의 권위에 대한 견해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시는 자기에의 집중이라는 시인의 무한책임을 말하고 있고, 그 극복이라는 점에서 극한의 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멀쩡하게 분열되어, 거대한 무의식과 미세한 언어에 짓눌려버린 오늘의 시인들에게는 거북하다 못해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시가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제13회 김구용시문학상의 수상자로 최영규 시인이 선정되었다. 최영규 시인은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의’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중견 시인이다. 다작(多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작(寡作)도 아닌, 외려 꾸준한 항상심(恒常心)이 돋보이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사반세기 넘게 지속한 시작에서 항상심의 원천은 ‘나를 오름으로써 나를 버리는’ 자기 극복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山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山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山으로 꽉 차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山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 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山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지나치리만치 솔직한 자기 비유와 사실적 진술이 이 시 속에 들어있다. 그래서 그냥 보면 평범하게 읽힌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솟아오르는 산은 일상의 소소한 ‘욕망’으로 치환할 수 있고, 그 욕망을 좇다 보면 “나의 복숭아 뼈에서/터져 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오르게 된다. 이 욕망은 “나의 영혼에까지” 이르면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우고 “나를 비울 수 있”게 한다. 오르는 것은 결국 내려오기 위한 것이라는 우스개가 아니라, 과연 나를 비우기 위해 나를 오르는 행위는 어떤 의미의 표상인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고도의 집중과 그 집중을 극복해서 다른 모든 것, 즉 집중하지 못했던 것들에게 기꺼이 다시 자리를 내어주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요, 참여 의지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영규 시인은 절제된 표현을 통해 시어를 낭비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행간과 여백을 떠오르게 하여 언표의 이면의 감춰진 의미를 독자 스스로 탐색하게 하는 수법을 잘 사용하기도 한다. 김구용 시인의 시사적 위상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김구용시문학상의 수상자로서 최영규 시인의 시 세계가 ‘집중과 극복’이라는 시 정신의 발현 양상을 구체적인 작법으로 변환하여 더욱 풍성하면서도 알찬 결실을 보여주길 기대한다./백인덕, 남태식, 고명철 수상소감 오랫동안 詩공부를 해오다가 수필가로 마무리한 직장 선배로부터 박제천 선생님의 문학사숙을 소개받았다. 면담하러 동숭동으로 간 날, 박 선생님의 서재에서 ‘구용丘庸’선생님을 만났다. 박 선생님 서재이름인 방산제芳山齋. 붓글씨가 아니고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고등학교 문예부 지도 선생님 댁 책꽂이에서 복사되어 철끈으로 묶여있는 시집이 눈에 띄어 빼내들었던, ‘구용丘庸’선생님의 '시집1'. 복사된 시집의 가운데쯤을 쩍~벌려 두 편 정도를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읽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그 첫 만남 이후, 20여년 만에 박 선생님 서재에서 뵙게 될 줄이야. 구용선생은 서예가이자 시인이자 한학자시라고 설명해주시며 시서화詩書畵에 아주 능하신 분이고, 특히 추사秋史의 예술세계에 대해서 독보적인 시각을 갖고 계신분이시라며 설명을 끊지 못하셨던 박제천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년 전 봄. 산악연맹에 일을 보고 있는 후배의 권유로 연맹이 주관하는 히말라야원정대(힘룽히말 7,132m) 상비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해를 넘기며 7개월째 맞은 훈련 중에 오래전에 수술하였던 무릎에 이상이 생기며 중단하게 되었다. 훈련중단 후, 일반 산행조차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내안에서는 많은 것들이 뒤섞이며 혼란이 왔다. 그때. 먹고사는 일, 등반, 문학(詩) 이 세 기둥 중에 하나가 부러지며 쓰러지고 있는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뜩 산악계와 시단의 대선배님이신 장호(김장호) 선생님은 등반을 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시기에 어떤 시들을 쓰셨을까? 그분의 山詩들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하여 그동안 써왔던 나의 산시(산악시)들을 정리하여 '설산 아래에 서서'를 출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으로 ‘구용丘庸’선생님을 기리는 <김구용시문학상>을 받게 되다니. 물론 詩 안에 있는 소재나 내용들이 평소에 우리가 써온 시들의 것과 다른 작품들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수상은 내게 위로일까? 아니면 다시 정신을 살려내어 세우라는 매서운 회초리일까? 오래전 신춘문예 당선되어 시인으로 첫걸음을 떼었을 때 소감 중 일부를 이것에 대한 답으로 대신해 볼까 한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책상 위에 전화메모가 놓여 있었다. 혹시~ 가슴이 뛰었다. 간신히 자리에 앉았지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잠시 후, 누군가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는 詩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른 채 속만 썩이던 시절의 나였다. 그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 내 안에 온전히 남아있는 나의 체온. 희망이 담겨있고 건강한 詩를 열심히 써보겠다.’ 솔직히 이번 ‘김구용시문학상’의 수상을 전해준 전화는, ‘그래! 쓰고 읽는 이들이 함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함께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온전한 나를 다시 찾아 세울 수 있는 시를 쓰라고, 이것들을 위해 흔들리지 말고 매진하여 나가시오!’ 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오래전 ‘공간시낭독회’ 뒤풀이 자리에서 한 잔 하신 성찬경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다. ‘최 시인! 시인이라서 소재가 되는 대상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마음을 가졌다는 거 이거~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詩 쓴다는 거 이거~ 행복한 작업인 거야!’ 제게는 과분한 상을 받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김구용 선생님의 유족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수상자 최영규 수상 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중에서 빙하 지금을 영원이라고 하자 생각의 흔적마저 지워가는 시간의 눈빛이거나 고뇌라고 하자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아름다움처럼 영원을 지금이라고 하자 크레바스* 칼질을 당한 커다란 흉터였다 아니 긴 시간 날을 세운 깊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목을 뻗어 내려다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바닥 그 어두운 곳으로부터 빙하의 서늘한 입김 훅 올라왔다 색깔을 분간할 수 없는 기억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던 그런 어둠이었다 순간 주춤,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두려움이 힘을 썼다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속박(束縛)의 공간 입구에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섬광처럼 잠깐씩 반짝거리곤 깊은 얼음벽을 따라 나의 시선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함정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크레바스는 좁은 곡지를 흐르던 빙하가 넓은 장소로 나가는 곳이나, 곡류하는 지점을 만나게 되면 그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생성된다. 바람이 되어, 바람의 소리가 되어 새벽까지도 바람은 텐트를 잡아 흔든다 정신에 섬뜩 불이 켜지고 밤새 어둠을 밟고 온 새벽은 칼날처럼 선연하다 고요한 함성, 명치 끝 어디쯤에 뭉쳐 있던 불꽃인가 라마제* 때 건 불경(佛經) 빼곡히 적은 깃발들이 바람 앞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온몸을 뒤척이던 바람은 나를 흔들어 세우고 낭파라를, 갸브락 빙하를, 끝없는 티베트 설원을 간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여기, 이 땅의 끝 초오유 정상 너머로까지 뜨거운 갈기를 세운다 아, 거대한 빙하와 속을 알 수 없는 높고 거친 설산들 그들 앞에 내팽개쳐진 듯 나는 혼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러나 가고 싶은 그곳으로 바람이 되어, 그 바람의 소리가 되어 *라마제(lama祭): 일반적으로 원정대들이 등반의 성공과 무사귀환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전통적인 티베트의 불교의식. 심정(心旌)* 피가 섞인 콧물이 흐른다 침을 삼키려면 터져버릴 것 같은 목울대, 온몸을 웅크린 오소리 꼴이 되어서는 주위를 살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핏덩이 섞인 가래를 한 움큼씩 뱉어낸다 허기로 숨 쉴 기력조차 없지만 막상 밥알은 단 한 톨도 목구멍 속으로 삼킬 수 없다 누가 내 머릿속에서 맷돌질을 하는가 틈 없이 덤벼드는 두통 아, 모든 게 자근자근 나를 무두질해대며 하산! 그만 하산하라고, 후들거리는 허벅지로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밀어 바람 앞에 세운다 오후 4시, 한낮도 훨씬 지났는데 햇살은 여전하다 저 기세라면 어제 내린 폭설도 농담처럼 가볍게 녹이고, 바람은 다시 구름을 불러 모아 하늘을 잘게 부숴놓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반복되는 폭설 그리고 오한 오늘이 며칠이더라, 환각처럼 보이는 저 멀리, 빙하 아래쪽으로 소용돌이치며 흩어지는 내가 보인다 *심정(心旌): 마음의 깃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산란한 상태를 이르는 말. 높이의 힘 높아질수록 거칠어질수록 돌부리에 채이며 쓰러질 뻔한 숨소리가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침묵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어둠일까 눈뜰 수 없는 설원의 밝음일까 겹겹이 껴입었지만 불편하도록 두꺼운 장갑과 삼중화를 스미고 들어오는 바라보는 눈빛을, 소리를, 만용과 깍지 꼈던 자신감까지 얼려버리는 저 비탈의 정리되지 않은 높이의 힘 처참한 사고의 상상 걸을수록 그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 안 깊숙한 곳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덜그럭거리고 있는, 새파랗게 질려서 투명한 알몸처럼 감춰지지 않는다 그러나 있지도 않았던 일 같았던 없을 곳에 대한 사라지지 못한 끌림이 없던 소리가, 없어진 소리가, 오르기로 오르겠다고 결정했던 처음 그것이 걸음이 되어 걸음이 되어 여기를 오르고 있다 설산 아래에 서서 발을 헛디뎌 몸이 넘어진다 산도 넘어진다 겨우 추슬러 마음 하나 도로 세우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너를 혼자서 본다 설사면에 튀긴 햇살이 칼끝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냄새로 찾아가는 설산의 내막 바람은 울음으로나 길을 찾아 가는데 여러 번 꺾인 몸은 조각난 얼음 속으로 파묻히고 밟히면서 누구를 찾아 가는가 끝도 없는 고집 혼자 앞장 세워 겨우 모퉁이 돌 때 아, 저기 설산 아래 까맣게 떠오르는 사람 이름도 지워버린 채 울지도 못하면서 무릎만 젖어 흐르는 너는 오래 흔들리면서 무한정 기다리는 나는 비박 숲을 뒤흔드는 바람이 비질하듯 내 볼을 쓸고 간다. 바위 바닥을 만지작거리며 흘러내리던 계곡의 물소리, 어둠이 깊어지자 온 숲을 다 파내어 가려는 듯 아우성치며 내 귀를 잡아 뜯는다. 견디지 못하고 랜턴을 켠다. 겨드랑이를 허옇게 드러낸 나뭇가지들이 덤벼들어 나를 덥석 끌어안는다. 가지 끝에 나뭇잎들은 피곤한 나를 더듬어 깨워 앉히고, 바람은 어느 틈에 턱 아래 내 목을 다시 감아 잡는다. 나는 두려움에게 멱살 잡힌 채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다. 어렵게 짙푸른 여명의 틈이 어둠을 들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숲은, 계곡은, 너무 어둡다. 내 옆에 밤새 시달린 새벽이 계곡 아래로 떨어질 듯 위험스럽게 졸고 있다. 나는 다시 짧게 토막 낸 매트리스 조각에 어깨와 엉덩이를 맞추어보려 무릎을 오그려 누워본다. 깜빡, 졸음이 저 계곡 아래로 떨어지며 눈을 뜬다. 이별 -설악산 장군봉에서 세상을 달리한 岳友 강성백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리워해야 되는 것은 무엇인가 케케묵은 장롱 밑 먼지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그냥 두자 이 부서져 내린 마음을 저 그늘 없는 바다 위 뙤약볕 아래 낱낱이 들춰낼 필요는 없으리 곱고 하얀 재가 되어 파도 위에 뿌려져서도 날카로운 파도 끝으로 매달리며 파도에 섞이지 못하던 그러나 그를 맞은 바다는 까마득한 수평선까지 파도 파도 파도의 산 파도의 산맥 파도의 바위벽을 만들어 주며 그렇게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육지를 향해 돌아오던 파도를 타고 우리를 따라오던 우리들의 기억에게 나를 보라 손짓하며 벌써 멈칫 멈칫 과거로 가는 우리를 흔들어 세우던 나를 오른다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山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山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山으로 꽉 차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山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 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山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덕항산 동무들 산허리를 안고 돌아가자 길을 터주는 나뭇가지들이 처음보는 나를 만져보느라 야단이다 나는 잠시 앉아 쉬기로 한다 산옥잠이 저만치 떨어져서 하얀 꽃을 흔들어 보인다 깨알같은 꽃들을 접시만하게 묶어 피운 당귀 곰취의 꽃은 길게 뻗어 오른 줄기 끝에서 흩어질 것같이 피어있다 바람이 분다 머리 위의 나무가지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뭇잎들은 비질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숲은 금세 비질하는 소리로 가득차 버린다 기억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 소리에 지워진다 투명해진 숲을 바라본다 이미 산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