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명(姜士明)
광해 29권, 2년(1610 경술/명만력(萬曆) 38년) 5월 12일(병진) 12번째기사
의금부가 사면자중에서 석방않은 자에 대해 아뢰니 대신들과 의논토록 하다
금부가 아뢰기를,
“오늘 사면령을 반포한 후에 본부에서 현재 수감중인 죄수들의 석방여부를 분별한 별단(別單)을 적어서 아뢰었습니다. 다만 석방되지않는 자 중에 이전(李琠)과 같은 자는 처음에 전라감사의 이문(移文)에서 ‘말 30필을 훔쳐서 달아난 죄로 갇혔다.’고 하였으므로 장오(贓汚)를 범한 죄로써 전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관련된 사람을 잡아왔을 때에 제주판관(濟州判官) 김치(金緻)가 다시 억지로 사들였다는 죄로 논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가 장계를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고 보면 억지로 사들인 죄는 마땅히 석방하는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만, 전지가운데 ‘장오’에 관한 말이 있었으므로 그대로 석방하지않는 자로 분류하여 적어 올렸습니다.
또 조형도(趙亨道)의 죄목가운데 군사를 잘 조련하지못하고 오래도록 집에 있으면서 군졸을 수탈하여 자기 집을 지었고 소금을 굽게 하거나 부판(浮板)을 한 몇몇 조항은 반드시 사면해야할 대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에 관계된 조득부(曺得富)·강사명(姜士明)을 먼저 석방하는 문서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역을 빠뜨렸다고 하면서 인원을 계산하여 포목을 징수하였다.’고 한 조항은 장오죄에 저촉이 되고있으나, 애당초 장오에 대한 증거가 드러나지않았으며 또 떠도는 말에서 나왔으므로 끝내 근거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마땅히 분간해야할 것인데 본부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기에 아울러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신들에게 물어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홍위(洪瑋)에 대한 일도 아울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하였다.〉
○(禁府啓曰: “今日頒赦後, 本府見囚罪人放未放, 分秩別單開錄入啓矣。 但未放中, 如李琠者, 當初全羅監司移文中, 以‘馬匹三十匹偸竊而去爲罪囚’, 故以罪犯贓汚, 捧傳旨。 而厥後事干捉來時, 濟州判官金緻更以抑買論報, 監司至於狀啓。 則抑買之罪, 當在於應放之中, 而只以傳旨中, 有贓汚之語, 故仍錄於未放之中矣。 且趙亨道罪目中, 不能操鍊, 長在其家, 侵虐軍卒, 造成其家, 煮鹽、浮板數款, 則必在蒙宥之中。 故事干曺得富、姜士明, 爲先錄於放秩。 而唯役闕稱, 云‘計口徵木’一款, 涉於贓汚, 而初無現贓, 又出於風聞, 終難爲據。 亦似當分揀, 而自本府不敢擅便, 敢此竝稟。” 傳曰: “問于大臣議啓。 洪瑋事, 竝議大臣處置。”)
조형도(趙亨道)
[무과] 선조(宣祖) 27년(1594) 갑오(甲午) 단독별시(單獨別試) 병과3등(丙科三等) 250위(261/418)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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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 조원도(趙遠道)【補】(주1)
자(字) 경달(景達)
자(字) 대이(大而)(주2)
호(號) 동계(東溪)
호(號) 청계도사(靑溪道士)【補】(주3)
생년 정묘(丁卯)【補】(주4) 1567년 (명종 22)
졸년 정축(丁丑)【補】(주5) 1637년 (인조 15)
향년 71세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함안(咸安)(주6)
거주지 청송(靑松)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훈련원주부, 보성군수, 경주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자는 대이(大而)·경달(景達)이다. 호는 동계(東溪)이다.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일컬었다. 생육신 조여(趙旅)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조지(趙址)이다. 큰아버지 조우(趙堣)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부윤 오운(吳澐)의 딸이다.
1583년(선조 16)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했다.
1587년 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 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이러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임진왜란을 계기로 무과를 지원해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청하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경산현령이 되었다.
1606년 고성현령에 임명되었다. 1608년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인 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본영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옥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4년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7년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들었다. 이 때 토포사를 겸행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청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순변사 유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지켰다. 이 공으로 보성군수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켰다. 또한 미납되어 온 4,000여 석의 세미(稅米)에 대해 감사에게 진정해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본도중군을 겸하고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했다. 1625년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으로 차송되었다.
1627년 청나라의 침략 낌새가 보이자 본도호소사(本道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다가 별장이 되었다. 영장제가 설치되자 진주영장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했다. 다시 상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괴산군수에 임명되어 소를 올려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영장이 되어 3년 간 재직했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또한 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도 기록되었다. 청송의 덕봉사(德峯祠)에 배향되었다.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저서로 『동계집』 3책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형도(趙亨道))]
[이력사항]
선발인원 418명 [甲1等1‧乙2等10‧丙3等407]
전력 주부(主簿)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조우(趙堣)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만호(萬戶)
[생부(生父)]
성명 : 조지(趙址)【補】(주7)
[처부(妻父)]
성명 : 오운(吳澐)[文]【補】(주8)
본관 : 고창(高敞)【補】
[주 1] 이명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이명을 추가.
[주 2] 자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자1‧2를 추가.
[주 3] 호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호1‧2를 추가.
[주 4] 생년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5] 졸년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6] 본관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본관을 "함양(咸陽)"에서 "함안(咸安)"으로 수정.
[주 7] 생부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생부를 추가.
[주 8] 처부 : 『동계집(東溪集)』 卷5, 附錄, [행장(行狀)](李秉夏)과 [묘지명(墓誌銘)](申楫)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만력22년갑오1월○일별시무과방목(萬曆二十二年甲午正月○日別試武科榜目)』(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고서(II) 353.00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