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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밀가루 반죽
한미영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初面)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 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차질어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조금 어색한 조어가 허락된다면, 한미영은 생활시인이다. 생활의 달인에 이른 사람의 사유는 한미영 시에서 빠질 수 없는 고갱이다. 이를테면 빨래는 옷이 아니라 삶에 잉여로 달라붙는 고단함과 외로움 따위를 “더는 비틀어 쥐어짤 수 없을 때까지 / 몇 번이고 쥐어짜”는 것이며, “땟국물 빠진 원래의 마음들이 / 다시 희게 펴져 빛나”는 것이란 성찰에 이를 때(<빨래를 말리며>), 혹은 고추장 단지 속의 “내용물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에서 “남을 향해 경직된 사람 속”을 유추하고, “경직돼 있던 내 딱딱하게 굳은 속이 / 저러했을 거라고 생각”할 때(<고추장 단지를 들여다보며>), 혹은 다림질을 하며 “달궈진 다리미에 나도 모를 힘이 가해”지고, “불행의 안감 같은 행복이 조금씩 펴진다”는 느낌에 이를 때 시인은 시가 생활의 구체적 약동(躍動)과 한몸임을 보여준다. 그의 상상세계에서 날것들을 찌고, 다듬고, 끓이고, 삭히고, 치대고, 뒤섞고, 발효시키는 부엌의 조리과정에서 발견된 찬탄과 기쁨의 은유들은 하나같이 알뜰하게 시적 상상력으로 변주된다.
〈밀가루 반죽〉에서 반죽은 그저 물질로써 아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몸의 익명성을 드러낸다. 그 재료가 품은 원소적 성질은 “역하던 생내”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다. 생내와 오기는 저를 둘러싼 것들과의 불화를 불러온다.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르고 시간에 “팍팍 치대다 보면”, 끝내 “차질어”질 터다. 차질어진다는 것은 재료의 뻣센 물질성이 유연해지며 밀도가 높아짐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인격의 그윽한 성숙이라는 은유로 읽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라고 묻는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이미 그 안에 대답을 품은 물음이다. 대답을 품지 않은 물음, 혹은 물음을 품지 않은 대답이란 귀담아둘만한 함량이 모자라는 것들이다. 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라. “모든 대답은 그것이 물음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동안에만 대답으로서 효력을 유지한다”(하이데거, 《숲길》)라는 언명은 대답을 품은 물음의 완벽한 역상(逆像)이다. 역한 생내와 빳빳한 오기를 빼고 부드러움의 심오함에 도달한 자만이 말랑말랑하다. 세계의 모든 명령과 입법이 존재를 옥죄는 딱딱함이라면, 말랑말랑한 것들은 아기, 웃음, 미소, 자유, 호의(好意), 관대함, 천진무구함 같은 것들을 품는다. 이 실존적 양태는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르고,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 뒤에 얻어진 몸 바꾸기의 결과다. 한그릇 안에서 몸을 바꾼 것은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이다. 아하, 시인은 밀가루 반죽 만들기에서 결혼 관계에 대한 은유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하며 꾸린 가정은 이승 속의 피안이 아니다. 그것은 딱딱한 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져서 피 흘리는 지옥이다. 이 시는 밀가루와 물이 만나 차진 반죽이 되듯 서로의 다름 때문에 부딪치고 깨지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말랑말랑해져” 얻게 된 관계의 평화에 대해 노래한다.
한미영의 시들은 대체로 투명하다. 말라르메는 “시에는 언제나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때 수수께끼란 전체로서의 존재가 품고 있는 신비성을 말한다. 한미영 시의 투명함은 그 수수께끼를 희생함으로써 얻어진 평명성의 다른 이름이다. “엿기름물에 / 잠긴 밥알들이 / 속속들이 / 몸을 / 삭히고 있다 // 저 / 편안한 / 소멸의 풍경 // 나도 / 잘 삭혀진 밥알로 / 가볍게 / 세상 속을 / 떠다니고 싶다 // 누군가의 가슴 한 켠에 / 잘 발효된 / 한 그릇 / 시원한 식혜로 / 남고 싶다”(<식혜>) 밥알들이 엿기름물에 몸을 삭힌 뒤 식혜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이 시는 한미영 시가 지향하는 투명함의 방향을 보여준다. 사물을 해석하는 데 이보다 더한 명석함은 없다. 그러나 그 명석함은 사물의 비의에서 비켜섬으로써 읽는 이의 마음에서 솟구치는 영적(靈的)인 찬송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의 어려움이 있는데, 시인이 그것을 애써 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가 수수께끼의 표면으로 미끄러지는 것, 즉 신비의 윤리학에 가 닿지 못한 채 문자적 자명성에 머무는 까닭이다.
한미영은 생활의 고통과 행복을 버무리고 비벼서 시를 만든다. 그에게 생활은 제일의적 명제이자 추구해야 할 의미의 전부다. 그의 시들은 생활의 요구와 정언적 명령에 대한 응답이다. 생활은 무수한 반복으로 이루어지고, 그 반복은 낯익음을 낳는다. 동일한 반복의 재귀(再歸) 속에서 시를 찾아내려면 먼저 그 안의 낯섦을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반복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수고와 피로들은 뜻 없는 것으로 무화시킨다. 그 반복 안에서 우리는 너무 지쳐 죽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는 재처럼 흩날리리라”(니체). 흩날리는 재 속에서 시를 찾는 일은 요원한 일이다. 숨을 쉬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시인은, 놀라워라, 재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시를 건져낸다. 한미영은 지금까지 쓴 것보다 앞으로 쓸 것들의 가능성으로 빛나는 시인이다.
한미영(1964~ )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한미영은 안동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오고, 2003년에 계간지 <시인세계>로 등단했다. 2007년에 시집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관한 기억》을 펴냈다. 한미영의 시들은 생활 경험의 구체적 국면에서 은유를 끌어다 쓴다. 마늘을 까고 꽃게를 다듬고 녹차를 마시고 다림질을 하고 빨래를 하는 따위의 특별할 것 없는 생활 경험이 다 시의 바탕이 된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잠자는 몸의 움직임은 생활의 구체적 국면이다. 바로 바로 그 자리가 한미영의 은유가 솟구치는 자리라는 얘기다. 그래서 생생하다. 누구나 경험이란 곧 존재가 겪는 사건이다. 존재의 본질이 그냥 있음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있음이다. 존재라는 것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덧없이 사라진다. 시인은 그 사건을 “사라지려는 것을 붙잡아놓음을 통해 사건의 현전”(알랭 바디우 《비미학》)을 불러내 명명하는 자다. 드물게 제 과거사를 피력하는 〈사랑의 내력〉이란 시에 의하면, 시인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마흔이 훨씬 넘어 낳은 늦둥이다. 이 늦둥이의 양육은 큰고모가 맡았는데, 이 고모가 시집갈 때 “부담짝처럼 딸려 가” 태백시에서 공고를 어렵게 마쳤다. 시인이 태어날 무렵에도 아버지는 고모 곁에서 살다 결혼하고, 시인은 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다. 고모는 첫 조카를 몹시 사랑했다. 시인은 빨리 어른이 되고 돈을 벌고 싶었다. 큰고모에게 “근사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큰고모는 시인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 산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