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다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미신은 왜 생기는가?>
복음: 요한 6,1-15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이 기적은 ‘산’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도 광야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까?”라고 대답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여전히 자기 능력에 의존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숫자 ‘12’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민족이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려면 먼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빵이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선악과로 배를 채웠습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척박한 땅에 살면 사람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빵은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살립니다. 그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고 에덴동산이십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헛것을 보며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척박한 땅에 사는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 욕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입니다.
욕구에서 벗어나지면 그냥 자연은 자연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할까요? 왜 우리는 사진을 찍어놓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았느니, 성모님을 보았느니, 천사를 보았느니 하며 놀라워할까요?
점이 많이 찍혀있는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상상으로 동물이나 자연의 일부분, 혹은 무기와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경우를 상상하도록 했고, 두 번째 그룹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휴양지에 놀러 와서 편히 쉬는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상상 훈련을 통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을 보는 두 그룹의 결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저건 뭐 그냥 점들만 찍어놓은 거네요”라고 대답했고, 첫 번째 그룹은 무의미한 점들 가운데서 동물, 나무, 단어 등 온갖 것이 그림에 담겨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조: ‘마음의 법칙;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널리 퍼지는 이유’, 폴커 키츠, 포레스트북스]
이렇게 내가 불안한 상황에 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착각해서 자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모두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둘 다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나뿐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을 만나야 합니다.
옛날 공주 지방에 한란이란 이름의 총각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그래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지만 손대는 것마다 잘 키워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시장에 나갔다가 누군가 팔고 있는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잉어를 나무를 판 돈으로 사서 강에 방생해줍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아이는 처음이구나. 그런 마음이라면 흉한 땅에 가서도 살기를 녹여버릴 수 있을 게다. 동쪽 오송벌로 가거라.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땅이지만 넌 큰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게야.”
잠에서 깨어난 한란은 너무나 생생한 꿈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오송벌은 엄청난 황무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려고 하면 지네신의 저주받는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황무지 북쪽에 지네창이라 불리는 흉가에 커다란 지네가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산 여인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고 3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출도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 윤달이 오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윤달이 왔고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 온 한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을 본 한란은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갔을 때 한란은 지네창으로 향했습니다. 집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의 뼈가 너저분하게 있었습니다. 지네의 냄새가 났습니다. 여인은 기절한 상태로 기둥에 묶여있었습니다. 한란은 처녀를 구해왔지만, 지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혼인하여 열심히 일하여 황무지를 엄청난 곡식 지대로 변화시켰습니다. 만석꾼이 된 한란을 보며 마을 사람들도 지네창을 불태우고 황무지를 일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땅을 파보니 그곳의 퀴퀴한 냄새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네창을 팠더니 물이 많이 나와서 황무지에 물을 댈 수 있었고 그래서 모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주 한 씨 시조 한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출처: ‘금 손 총각과 처녀 제물; 청주 한 씨 시조 한란’, 유튜브 채널, 노가리 사랑방]
왜 한란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지네신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손만 대면 황무지에서도 곡식이 잘 자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싫었거나 혹은 그 황무지에서 그런 축복이 올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은 그 핑계를 지네신에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지네신을 만들어놓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물줄기가 있는 그곳을 파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신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을 버리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이유를 대기 위한 자기합리화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나를 휴양지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이런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내가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셨고 제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보는 이를 선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한란과 같이 모두를 먹일 수 있는 에덴동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람이 헛것을 보며 나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 전삼용 요셉신부님 -
https://youtu.be/41vcaQeaND0
첫댓글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