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25년(1443)년 7월 19일 명나라에서 칙서를 보내옵니다.
요사이 절강 도사(浙江都司)가 해문위(海門衛)에서 왜구(倭寇) 7명을 생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해 왔는데..... 심문(審問)해 안 것은, 강관토(江官土)는 너희 나라 납주(臘州) 고을 막련공 목판관(莫連公木判官) 아래의 백호(百戶)로서, 금년 3월 초4일에 막련공이 군인(軍人) 문아니(門阿尼)와 아우[弟]의 종인(從人) 문첩마니(門帖麻尼)와 물러가 한가하게 있는 조 참판관(趙參判官)의 가인(家人) 조곽실리(趙郭失里)와 본주(本州) 둔소(屯所)의 연호군(煙戶軍) 금새(金賽)·송의(松義)·오진막(吳眞莫), 아우[弟] 금아나길(金阿那吉)과 이미 죽은 강눌득(江訥得)과 함께 배를 가지고 바다에 내려가 고기를 잡다가 5월 초3일에 큰 바람과 비를 만나서, 배가 바람에 밀려 해문(海門) 도저 천호소(桃渚千戶所)의 장도사만(長跳沙灣) 지방에 이르러 관군(官軍)에게 배까지 한꺼번에 잡혔다고 말하는데, 다만 각사람들이 말을 꾸며서 벗어나려고 하는가 의심된다. 그러나 바람과 환난(患難)은 혹시 있는 것임으로, 이미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식량을 급여하게 하고, 붙들어 두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였으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은 즉시 조사해서 국내의 사람인가 아닌가를 감정해서 명백하게 아뢰어 구처(區處)하게 하라. 이런 이유로 이르노라." 하였다.
중국 절강성 해문위 도저천호소(지금의 절강성 태주시 椒江区) 라는 곳에서 왜구 7명을 잡아서 북경으로 압송해왔는데(1명은 죽음) 조사해 보니 그 사람들은 왜구가아니라 조선의 납주라는곳에서 표류된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 납주라는 지명은 없지요. 근데 이 칙서를 받은뒤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즉시 사복 판관(司僕判官) 박원형(朴元亨)을 나주(羅州)로 보내어 표풍(漂風)된 사람을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표류한 사람들중에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북경에 올라와서 심문을 하는 도중에 북경에 있는 중국측 통역인이 서툴러서 그랬던 것인지, 어떤 문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에서는 이들이 납주에서 왔다고 적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조정과 세종은 저 납주가 우리나라 나주지방을 말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관리를 파견한 것 입니다.
한 열흘 뒤에 박원형이 보고가 없자 혹시 모르는 일이라 며칠 뒤에 일단 다른 지방에도 조사하도록 공문을 보내기는 하지요.
여럿이 말하기를, "그 칙서(勅書) 내의 강관토(江官土) 등이 공초(供招)한 것을 보면 바로 나주(羅州) 사람입니다. 원형(元亨)이 반드시 찾아낼 것이오나, 혹시 찾지 못하오면, 원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각도에 명령하여 조사하는 것은 과연 더디게 될 것이오니, 마땅히 미리 조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각도에 전지(傳旨)하여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박원형으로 부터 보고가 올라 오는데, 박원형의 조사 결과 나주에서 표류한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도서지역 수색은 더 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되자 같은해 8월 8일 조정과 세종은 주문사를 파견하여 대질 심문을 하기로 결정, 북경에 정분이라는 관리를 파견하게 됩니다.
본국은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변민(邊民)이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갔다가 바람에 불려서 간 향방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자주 있사오나, 신이 이제 조사해서 납주관(臘州官) 막련공 목판관(莫連公木判官)·강관토(江官土)·문아니제(門阿尼弟) 등의 자양(字樣)을 보니, 본국의관호(官號)와 인명(人名)과 음운(音韻)이 같지 아니하므로 쉽게 조사하지 못하겠사와, 배신(陪臣) 공조 참판(工曹參判) 정분(鄭苯)을 시켜 경사(京師)에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옵서는 배신 정분으로 하여금 강관토(江官土) 등과 면대해서 심문하도록 허락하옵소서. 삼가 아뢰나이다.
그리고 정분은 9월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11월에 백성들과 조선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정분(鄭苯)으로 하여금 바다에 표류하여 바람을 만난 사람 조곽실리(趙郭失里) 등 6명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지금 왕의 나라 사람인 것이 인증(認證)되었다. 조괴실이(趙怪失伊)는 즉 조곽실리(趙郭失里)이고, 강권토(康權土)는 즉 강관토(江官土)이고, 문제만(文弟萬)은 즉 문첩마니(門帖麻尼)이고, 김초송(金草松)은 즉 김새송의(金賽松義)이며, 오준모지(吳俊毛知)는 즉 오진막제(吳眞莫弟)이고, 금어눌지(金於訥只)는 즉 금아나길(金阿那吉)이므로, 모두 짐꾼과 식량을 주어 분(苯)에게 부치어 데리고 돌아가게 한다.......임금이 조괴실이(趙怪失伊) 등에게 유의(襦衣)와 모관(毛冠)을 내려 주고 그 고향인 제주(濟州)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15일
명나라에서 파악했던 사람 이름들이 조금씩 달랐고 무엇보다 중국이 파악한 지명은 납주였지만 이들의 출발지는 제주였던 겁니다;; 대체 어떻게 이야기들을 했길래 중국사람들이 제주를 납주로 듣게 되었는지는 모를일입니다만....(제주방언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문외한이라^^;;)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표류사건이라고만 볼 수도 있겠는데
근데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중 - 한 사이에서 표류사건이 발생을 했는데 표류사건 처리에 있어서 이러한 양국간 음운문제가 부각 되어서 조선의 외교문서에 기록되기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이전과 이후에도 한자를 모르는 일반 조선 백성들이 중국에 표류했지만 이런 식으로 음운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이 된 일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백성들 귀국한지 한 달뒤 이 해 마지막날 조선 반만년역사 일대사건이 벌어지니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였죠.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조 - 명간 외교상에서 양국간 음운문제가 발생하였고, 그 문제가 외교문서에 공식적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하필이면 그 몇달 후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단순한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겠으나 저는 좀 다른 식으로 접근을 해보고 싶네요.
외교문서라는게 어디 옆동네 애인한테 보내는 편지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세종대왕이 명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할때 단어 하나라도 허투로 쓸리가 없을텐데 음운을 콕찝어서 적었다는 건 뭔가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는게 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이었을까.
최만리의 반대상소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큰 관심사는 명나라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할지였고,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작업하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하는 과정에서 그걸 신경안썼을리가 없었겠죠.
최만리 : 중국 반응 생각해서 해야합니다!
세종 속마음: 내가 그거하나 생각 안했겠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나라는 조선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명나라 측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딴지를 걸게 되면 저 외교사례는 얼마든지 매우 좋은 빌드업의 소재로 활용될 수가 있거든요.
명나라 : 야 니들 갑자기 왜 안하던 짓 하고 그럼???
조선 : 아 지난 번 일 잊었어요??? 음운이 안 맞는 것 때문에 제주도 애들을 나주가서 찾는 헛고생을 했구만. 아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훈민정음도 창제하면서 당신네들 홍무정운도 역훈작업 들어갔어요?
무엇보다 표류사건이 발생했을때가 아마도 훈민정음 창제가 어느정도 마무리되는 단계였을 텐데, 그 단계에서 마침 이런 사건이 발생을 했는데 세종이 과연 그냥 넘어갔을까.
조선조 내내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몇십년 혹은 몇백년전 유리한 전례 하나하나 찾아내서 외교에서 써먹었던 걸 생각해 본다면 그랬을리가 없을 거라 봅니다.(홍무제: 아니 내가 죽은지가 언제인데 내 새끼들도 아니고 왜 조선애들이 날 더 들먹이는 거임)
뭐 이런건 어디까지나 그냥 추측의 영역입니다만, 실제로 저러한 정치적 목적때문에 그랬던 거라면 세종대왕의 치밀함에 좀 소름끼치기는 하네요 ^^;;
첫댓글 킹세종이라면 설득력이 높아지지요 ㅋㅋㅋ
갓 세종 ㅋㅋㅋㅋ
(뭔가 댓글을 적고싶지만 까이기만 할까봐 못적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맘 편히 적으세요 ~
그동안은 잘 적으셨으면섴ㅋ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해석이신거 같습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