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명재처(人命在妻)인가? / 산자락님 글을 읽고
김 난 석
결혼은 사회 최소단위의 공동체를 만드는 의식이다. 그로 인해 평안을 찾고 행복을 꾸려나가게 된다. 허나 그건 바람일 뿐, 실제는 그렇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더 큰 사회의 안정을 위해선 최소단위의 공동체가 공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렇게 공고하게 꾸려나가는 게 쉽지 않은 것이, 세계적 부호였던 오나시스는 자기 평생에 제일 미친 짓이 재혼이었다 하고, 세기의 지성이라 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을 하고도 순탄치 못했으니, 그 실상은 백인백태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올려보며 반추해 본다.
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김 난 석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숲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아내는 출타 중이다. 책상에 홀로 앉아 지금 진정 나에게 나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향수에서나 찾아볼 것인가? 내 삶을 내 것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던 지난 시절, 나는 타자를 돌아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적 사춘기를 맞으면서부터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남들은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이웃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또 남들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하지만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준비하기도 전에 내 아내가 될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도 자신만 다가온 게 아니라 그 남동생과 그 어머니와 그 아버지와 함께 마치 나를 에워싸고 점령이라도 하듯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다. 내겐 너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시골 계신 부모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글쎄다, 나는 어쩐지 마뜩지 않는구나.” 하셨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어느 해 추석을 앞두고 지금의 장모님께서는 명절이니 양복이라도 한 벌 해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철 검은색 군복 상하의를 입고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는데 내 앞에 소공동 GQ 양복점 주인이 나타나 아래위 치수를 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급 양복 한 벌이 내 몸을 휘감아 쌌으니,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해 볕 고운 날, 세종호텔에서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약혼식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었다. 왜 많은 돈을 들여가며 호텔에서 약혼식을 올리느냐는 건 단지 내 입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래도 내 주관을 세운답시고 하는 짓이 겨우 내 은사님을 입회자로 함께 모셨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약혼식을 올리자 곧이어 결혼날짜를 잡자는 것이었으나 나는 부모님과 처부모님 앞에 내 결기를 보여드리기라도 하듯 결혼날짜를 멀찌감치 1년 뒤로 하자고 선언했다. 그 명분으로는 첫째 아직 대학 재학 중에 결혼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고, 둘째 따 논 당상은 하나 있으되 다른 것 하나 더 취한 뒤에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완강한 나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결혼날짜는 1년 뒤로 미루게 되었지만 그 기다림에 대해 첫 순간부터 미안함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일 저녁이면 낙산 기슭에서 독립문 쪽으로 출근 아닌 출근을 했으며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아, 그땐 매일매일의 밤이 꿀통에 빠진 벌이었으니... 갈무리해 뒀던 그때의 여운들을
나는 지금도 하나씩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하곤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탐닉만은 아니었다. 결혼 약속에 대해 주위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몸짓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고 해보는 것이다.
결혼 뒤에 신접살림 꾸릴 자금계획을 세워 부모님에게 보여드렸다.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 당시 상황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부모님께선 그것으로 되겠느냐 면서도 흔쾌히 승낙하셨다. 허나 처가에선 나의 제안을 모두 묵살한 채 반반한 다이아반지 하나만 나눠 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도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고 해보는 것이다.
결혼 뒤의 첫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내를 즐겁게 해 줄 양으로 다이아반지를 팔아 치운 건 아직도 비밀로 덮어 둔 대로지만 둘이 벌어도 흡족지 않은 살림에 아내는 인내할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내 앞에 주사위를 던지고 말았다.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그래서 내가 외국여인과 위장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갈 테니 안정되면 당신을 부르리다. “ 이때 아내의 반응은 쌀쌀했지만 미련과 연민이 담겨 있었으니 단물 다 빼먹고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는 것이었다. 이래서 나의 제안은 묵살되고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지만,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내게 평온이 찾아온 건 자식이 태어나고 직장생활에 보람을 느끼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남달리 이웃의 사랑을 많이 받던 두 딸 덕에 내 아내도 주변의 부러움을 많이도 샀던 모양인데 아내는 지금도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이제 두 딸은 평범하게 성장하여 결혼해 나가고 나는 내 아내와 단둘이 되자 조금 일찍 직장을 버리고 나왔으니, 그건 진정한 나의 자유를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앞날의 가정경제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연금수급권을 아내에게 주고 달랬으니, 그렇게 해서 나 홀로의 자유를 찾나 했던 것이다. 허나 두 딸이 결혼해 아이를 갖게 되자 나는 마치 사위들에게 보라는 듯이 스스로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손주들 기저귀를 갈아댄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내 것이 아니라고 해보는 것이다.
아, 나는 언제 나의 것이 되려는가... 이런 넋두리를 하면서도 나는 화접일몽(花蝶一夢)을 생각한다. 나비가 꽃에게 무얼 부탁하던가. 꽃은 하늘을 향해 온몸을 열어 보일 뿐이요 나비는 허공을 날다가 꽃에 내려 날개 쉬고 꿀을 빨 뿐이니 그러다가 허공에 흔적 없는 파문만 그리며 떠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꽃을 떠날 순 없다. 떨어진 꽃잎도 매달린 씨앗도 또 휘청거리는 줄기도 모두 내 인생의 달고 쓴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니, 그래서 가끔 추억 속에 있는 여인을 불러내어 노래도 불러본다.
나에겐 수줍은 여인이 하나 있지
열두 송이 봉숭아꽃이었을 소녀
시냇물 휘저으며 송사리 게아재비 좇던 시절
꽃술 꿈 머금고 수줍어 고개 숨기며
톡톡 튀는 상큼한 몸짓도 하였을 소녀
나에겐 붉은 가슴의 여인이 하나 있지
열네 주름 맨드라미였을 소녀
호기심 찬 눈망울로 먼 하늘 바라보다 삐죽이며
이유 없는 시샘도 하였을 선 가슴의 소녀
나에겐 정열의 여인이 하나 있지
스물두 겹 장미꽃이었을 여인
가슴이 부풀어 옷고름 굽이굽이 여미며 먼 데 임을 그리던
성년이 지나 막 분홍 물들었을 여인
눈을 감아도 미소로 다가오는 나의 소회 글로 적어
두고두고 읽어보아도 좋을 추억이라는 이름의 여인
이젠 민들레 꽃씨 되어 하얗게 흩날려서 더 좋을
그런 여인 하나가 나에게는 있지.
(졸 시 '추억이라는 이름의 여인' 중에서)
시인 정지용에겐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의 향수가 있다. (정지용의 ‘향수’에서) 하지만 나에겐 굽어진 등을 나의 처진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여인이 있어 떠나고 말면 내 등조차 무너져버릴 테니, 그래서도 나는 내 것이 아니라고 해보는 것이다.
나는 세월을 뒤따라가며 추억을 담아내는 걸망일 뿐이라 자처한다. 만약 누가 위안을 삼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니체의 글귀 하나를 들 수밖에 없겠다.
”자신의 모든 행위는 다른 행위와 사고, 결단 등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되거나 혹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떠한 행위도 전혀 영향을 마치지 않는 것은 없다. 먼 과거 옛사람들의 행동조차 현재의 현상과 강하게 혹은 약하게 결부되어 있다. 모든 행위나 운동은 불변한다. 그리고 한 인간의 어느 작은 행위도 불변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들은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모두 내 것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지난날의 단상)
오늘도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일어났다기보다 깨었다고 해야겠다. 가스 불을 켜 미역국을 데운다. 식탁 위에 밥그릇과 수저 두 벌을 내놓는다. 냉장고엔 김장김치가 들어있다. 아내가 담갔는데 이미 시어버려 김치찌개 감으로 쓰면 된다. 얼마 전 카페 회원 황새님으로부터 김장김치를 샀다. 그걸 꺼내놓는다. 달걀 두 개를 깨 전자레인지에 익힌다. 식탁 뒤에 있는 김통도 내놓고 멸치볶음도 내놓는다. 이렇게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밥상 차려달라고 하기보다 내가 직접 차리는 게 속편 하기 때문이다.
”여보, 아침 먹읍시다. “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식탁으로 나와 앉는다. 이제 다정한 대화시간이다. ”일본에서 오미크론이 극성을 부린다는데. “ ”그래? 그게 왜 그렇대? “ ”이제 그걸 규명해 들어가나 봐요. “ ”우리도 그럴 텐데 참 큰일이네 “ ”하지만 덜 치명적이라니 그나마 다행히 아닐까? “ ”글세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겠지. “ 설거지는 늦게까지 먹는 사람이 하게 마련이다. 늘 내가 늦게 먹으니 그쯤이야 내가 하고 만다.
아내는 외부활동이 활발하다. 카페모임도 있고 수영모임도 있고 남사친도 있다. 물론 나도 여사친이 있긴 매한가지다. 오늘도 아내는 아침에 나가 저녁 무렵 들어왔다. 나는 내일 나들이를 위해 이발소에 들렸다가 병원에 다녀왔다. 열차 데이트하기로 되어있는 벗으로부터 너무 추워서 계획을 변경하자는 문자가 왔다.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내 운명은 인명재처인가? 아니다. 집안일은 함께 나눠하고, 나가면 각각이요, 얼마 되지 않는 연금수급권은 아내에게 준지 오래지만 나는 틈틈이 회계 컨설팅을 하며 용돈을 조달받는다. 거동이 불편하면? 요양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치료도 받지 않고 섭생도 하지 않고 그냥 물만 마시며 사위어갈 작정이다. 그렇다면 내 운명은 인명재처가 아니지 않은가. 팔팔하던 때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했지만 기력이 떨어지면 나는 나의 것이라고 고쳐 부르리라.
첫댓글 인명재처나 인명재부 할만한 배우자를 만난분들은
평생의 복을 모두 한꺼번에 받은 남여 공히 몹시 럭키한 경우이겠지요
옛사람이 말했던 인명재천처럼 이루기 힘든 바램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인명재처란 말은
여인은 현모 양처 요부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남성들의 부질없고 이룰 수 없는 욕심같아 보이기도 하구요
네에 무슨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저도 평생 내 마음 갖고 내 마음대로 살아번 적이 없는 것 같으니
기력 떨어질 때라도 나를 찾을 수 있을런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이에요.
올리신 수필도 잘 읽었습니다.
저에겐 오랜만의 단비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1.12 13:2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1.12 13:30
나는 나의것이 아닌게 아니라~
니체에 의해 나의것이 되어가고!
인명도 재처가 아닌듯하지만, 재처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휴^
그런데 마지막,, 그 요양원~ 이 문젠데요^
그 동네 문까지는 여시지 않았으면~ 하는게
저의 소견입니다.
치료도 안 받으시고~
섭생조차 거들떠 보시지 않고~
물만 마실거 뭐할라 거길 들어 가시겠읍니까요~
글쎄요.
글이 그렇게 써지던데
누가 또 안내하면 따라야겠지요.
인명은 재천이라 하고 싶습니다.
나머지 인생 함께 가려면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 가기엔 너무 외로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나의 것을 찾다보면,
서로가 상대를 탓하기 십상입니다.
탓이 아니라,
덕분이라 하고 싶어요. 이제는~^^
오늘은 건강검진도 하고
새벽에 나가면서,
남편의 아침식사는 챙기고 나왔습니다.
석촌님의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에...ㅎ
오늘은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게 되었네요.
내가 지은 아침밥이 내 것이 아니었네로~
이만, 마칠까 합니다.^^
네에 바쁘셨겠네요.
날도 추웠는데.
인간은 결혼이라는 사회구조 를
통하여 집단을 이루고 공동생활의
기본을 만드는거 같읍니다.
내것이면서 내것이 아닌 것이 의외로 많이 있네요.
우선은 지금 이순간의 나자신도 내마음 대로 할수 없으니 말입니다.
집을 떠나 며칠 어딜 다녀오려 해도 나를 대신 하여줄 형제자매중 그 누군가가 시골로 내려와 주어야 하니까요.
맞아요.
매사 뜻대로 되기가 어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