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후우!
유아는 심호흡을 크게 내 뱉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는 준비다.
평범한 자신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게 될 줄이야...
스무 살, 현수와 결혼할 때는 언론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철부지 시절이었지만 무작정 현수가 좋아서 오로지 현수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100M 달리기 출발선 앞에 선 것 보다 더욱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벌려고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출현에 여기자와 카매라맨이 그녀를 아래위로 살폈다.
쫄지 말자.
유아는 하얀 마스크를 벗었다.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으니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자신의 보금자리인 503호 현관문 앞에 서자 여기자가 현관문을 가로막듯 앞에 서고
카매라맨은 유아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드디어 시작된 제 1관문!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기를...
“안녕하세요? KBC연예특종에서 나왔습니다. 이현수씨 아내 되시는 분이신가요?”
여기자의 한껏 들뜬 목소리에 유아는 딸꾹질을 할 뻔했다.
“일단 카메라 아저씨, 제 얼굴 찍지 말아주세요.”
카메라맨은 기자의 눈짓을 받고 순순히 카메라 방향을 유아의 하반신 쪽으로 틀었다.
“자 됐죠? 그럼 인터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에. 저는 현수오빠와 이종사촌관계인 동생이에요.”
유아는 최대한 어려 보이게끔 목소리 내는 데 있어 코에다 집중시켰다.
여기자는 쉽게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화장기 있는 유아의 피부를 예사롭지 않는 눈길로 보았다.
“사촌동생이라면 왜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사용하며 얼굴을 가리려는 거죠?”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묻는 여기자로 인해 유아는 손을 반복적으로 쥐었다 폈다.
가리고 싶으니까 가리는 거지.
“현수오빠가 스캔들 났다고 오피스텔에 사람들 많을 거라고 해서 혹시나
제 못난 얼굴 찍힐까봐 이렇게 한 거에요.“
유아는 서슴없이 말이 술술 나왔다.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예쁘신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듯 보이네요. 그런데 현수씨도 없는데
이곳에는 왜 오신 거죠?”
기자라는 직업이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 특성이 있는 상 쉽게 인터뷰를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동일한 직업을 가진 유아로서는 여기자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저는 오빠 집 청소해주러 왔어요. 오빠가 부탁했거든요. 일주일에 서너 번 와서
청소 해주는 조건으로 알바비 만큼 준다고 해서 하고 있어요.“
졸지에 알바생으로 변신.
“그럼 사촌동생이라면 잘 아시겠네요. 이현수씨 아내 되시는 분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가요?“
정곡을 콕 찌른 질문이 떨어졌다.
“아니요. 올케언니는 1년 전에 중국으로 유학 갔어요. 1년 뒤 쯤에 한국으로 돌아와요.”
거짓말이 술술 입에 잘도 착 달라붙어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군요. 지금 학생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스무 살요.”
나이를 다섯 살이나 깎아 먹었다.
유아의 능청스런 거짓말에 여기자는 속아 넘어가 버렸다.
“네, 그럼 인터뷰 마칠게요. 인터뷰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네에.”
복도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나마 방송으로 내보낼 자료를 구했으니
그녀를 놓아주었다.
제 1관문 무사히 통과!
인터뷰라는 건 그저 말만 뻔질나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직접 겪으니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유아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가발을 훌러덩 벗어 소파위로
던져 버리고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냉수를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정신 못 차릴 꿈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
태호와 강영은 DVD방에서 몰래 데이트 중이다.
침대 같은 매트에 몸을 길게 뻗은 채 쿠션에 머리를 기댄 시호가 상체를
일으키며 강영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강영은 영화를 보다 말고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태호의 얼굴을 모니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지금 키스하고 싶은 맘 아니야.”
“하하. 누가 키스하제?”
“그럼 왜 빤히 쳐다봐?”
태호는 다시 누워 몸을 강영 쪽으로 틀며 강영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너지? 스캔들 터트린 거.”
“어.”
강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차강영?”
“그게 두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 판단했어.”
강영의 시선은 계속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야.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는 사실 아니야?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서 이렇게 숨어서 데이트 할 수 있는 처지일 수 있지만 두 사람은
엄연히 합법적인 부부라구. 숨기며 부정하며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아.“
강영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전해주려고 진지하게 말했다.
웃으면서 말하면 태호가 농담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으므로.
강영의 진지한 모습에 태호는 적당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강영의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떳떳하게 그녀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밝히지 않는 원망어린 속내가
담겨져 있었다.
“미안하다. 차강영. 널 내 여자친구라고 밝히지 못해서.”
태호가 쓸쓸하게 말했다. 강영은 울컥거림이 목에 차올랐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리고 이해해. 말이 나왔으니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너한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나 2년간 프랑스로 유학가게 됐어.
과장님께서 날 추천해 주시는 거 더 생각해 보고 결정내리겠다고 미뤘었는데
어제 가겠다고 말씀드렸어. 일주일 뒤에 나 프랑스로 가.“
강영의 일방적인 통보에 태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을 보내며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유학? 누구 맘대로! 너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어!”
태호의 화난 눈길이 강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리에 앉은 강영은 침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미안해. 나도 널 이해했듯이 너도 날 이해해주면 안 되니? 딱 2년이야.
헤어지는 것이 아니야. 잠시 떨어지는 것, 그것 뿐이야.“
태호는 기가 막혀서 펄쩍 뛰었다.
강영은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태호와의 이별을 서둘러야 했다.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 몰라? 남자가 군대가면 왜 여자가
고무신 거꾸로 신는데? 이유 없이 거꾸로 신어? 하물며 니가 프랑스로 가는데
내 마음이 어떨지 생각 해 봤어!“
“떨어져 있으면 우리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소중한지 더욱 느껴지리라 믿어.
난 그렇게 믿어.“
강영은 2년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아이의 존재를 밝히고 싶었다.
그때쯤이면 지금보다는 성숙된 자세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 시 쓸 분위기 아니다. 가지마. 가더라도 5년만 기다려줘. 우리 결혼하고 같이 가.
5년 후면 나 가수직업 포기할 수 있어.”
“우리가 언제 결혼하는데? 우리나이 스물 셋이고. 5년 후면 스물여덟이야.
공부하고 싶을 때 할 거야.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너의 행복을 위해 날 가로막지 말아줘. 날 기다려 줄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다면....우리...차라리...헤어져...“
강영은 해서는 안 될 마지막 말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이렇게 헤어지면 영원히 아이의 존재는 밝히지 않을 막심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사랑보다 태호가 맘껏 가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헤어지는
거라면 헤어짐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태호는 강영이 답답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곧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을 자제시키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프랑스유학은 핑계에 불과해. 차라리 솔직해져. 나 같은 놈과 연애하는 게
힘들었다고. 누구는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한 없이 예쁜 너
내 여자라고 우리나라? 아니! 세상에다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싶다.
그래, 나보다 공부가 우선이라면 잡지 않겠어. 프랑스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꼭 호텔리어로 성공하길 바란다. 2년이면 나 같은 놈 충분히 잊고도
남을 시간이지. 니 말대로 내 행복을 위해 널 가로막을 권리는 없지. 행복해라.“
태호는 눈가에 차오르는 슬픔을 강영에게 보일 수 없어 재빨리 등을 보이고
떠났다.
‘강영아....차.강.영....널 잊을 자신이 없다.’
갑자기 찾아온 예견치 못한 이별.
준비된 이별이라도 사무치게 가슴 아픈 건 매한가지이다.
영원히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사랑스런 여인. 이제는 보내줘야만 한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앞을 가로막지 달라는 부탁 한마디에...
손을 놓고 말았다.
그녀에게도 꿈이 있고 미래가 있다. 사랑보다 소중한 꿈이라면 존중해줘야
마땅하지만 막상 존중이라는 선택을 하고나니 가진 것 모두를 잃은 것만 같은
나약함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태호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빈자리를 살며시 쓰다듬는 금영의
눈동자에 반짝거림이 밀려들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서럽게 빈자리를
적셨다.
‘미안해...미안해...태호야...내 소중한 사랑...’
**
영화촬영을 마친 혜은은 곧장 이연이 운영하고 있는 헤어샵으로 찾아갔다.
이연은 현수의 신문기자를 본 후로 계속 혜은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더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혜은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었는데 다행히 혜은이 와 주어서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언니, 나 오늘 무지하게 기분 뭐 같거든. 내 얘기 좀 들어줘.”
혜은의 계획이 흐트러지면 곧잘 신경질을 내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연은 혜은의
그러함을 귀여운 투정으로 받아들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연이 현수와의 영화촬영이 어떤지 먼저 묻고 싶은 걸 억누르고 혜은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실내에는 컷트 연습중인 스텝 두 명 빼곤 없었다.
혜은은 이연의 손을 잡고서 응접실로 향했다.
가죽소파에 쓰러지듯 앉는 혜은은 팔짱을 꼈다.
“언니. 이현수, 그 남자 유부남인 거 있지. 나 그 말 듣고 뒤로 넘어갈 뻔 했다니까.”
!!!
이연은 혜은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었다.
‘현수가 유부남이라니!!!’
“내가 이현수씨랑 잘해 보려고 계획까지 다 짜놨는데 말짱 도루묵 되 버렸어.
아, 정말 짜증나. 결혼한 지도 꽤 됐어. 5년 전에 했는거 있지. 유학가기 전에
신혼살림 차리고 있었던 거야.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서.“
이연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그게 정말...사실이니?...”
간신히 힘을 내어 이연이 물었다.
“언니 왜 그래?....얼빠진 사람처럼....얼굴이 창백해.....”
‘제발....사실이 아니라고...농담이라고...말해줘...우리...우리 지은이 어떡해...’
이연이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이마를 짚자 혜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언니....수상해...현수씨와 무슨 관계가 있나?....’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사랑, 그 곳으로 [6]
천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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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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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아... 너무 늦게오셨어도, 지은이 아빠가 현수라는 설정으로 유아가슴에 못을박는 그런 설정만 아니라면 용서해 드릴수가 있어요(전 정말 감정이입이 너무 잘되서ㅠㅠ)
어떻게 그려질지 끝까지 봐 주셔요^^ 저도 다른소설 읽으면 감정이입때문에 가슴이 메어지거나 콕콕아파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