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任允摯堂.1721.경종 1∼1793.정조 17)
조선 영⋅정조시대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의 딸로 18세 때 선비 신광유(申光裕)와 결혼 원주에서 살았던 여성 유학자. 평생 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해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원리를 체득했고, 부단한 수양과 도덕적 실천으로 높은 인격을 완성해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비록 여자지만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품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남성전유물이던 성리학을 평생 탐구, 성리학의 쟁점이 됐던 `이기심성'과 `사단칠정'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탐구한 인물이다.
결혼 8년 후(27세)에 사별해 불우한 생을 산 윤지당은 독서와 저술에 힘써 여류작가로도 명성을 얻고 있으며 작고(73세) 3년 후에 간행된 상하 2편 1책 목활자본 <윤지당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묘는 강원도 원주시(原州市) 호저면(好楮面) 무장리(茂長里) 소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정조대의 여성 성리학자(性理學者). 본관은 풍천이고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의 딸이며 증이조판서 윤부(尹扶)의 외손녀이다. 부친이 양성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청주근처 옥화(玉華)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17세 때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에 와서 살다가 19세 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갔다. 28세 때 청상과부가 된 윤지당은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결혼 후 난산 끝에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고 그 후에는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793년(정조 17) 원주에서 죽었다. 동생인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가 기록하기를,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하였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로 성천부사를 지낸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면서 열 살 아래인 윤지당을 가르쳤다. 윤지당은 오빠로부터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을 배웠고 5남 2녀였던 형제들과 경전, 사서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윤지당이란 당호(堂號)는 임성주가 지어준 것인데 윤지(允摯)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독실이 신봉한다’는 뜻이다. 이는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로, 신(莘)은 문왕의 부인이었던 태사의 친정 고향이며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친정 고향이다. 태임의 성씨가 임씨(任氏)였으므로 윤지당과 임성주는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묘는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에 있다.
【사상】
여성관(女性觀)에 대해 별도의 독립된 논설을 펴지는 않았지만, 임윤지당 문집(文集) 곳곳에서 여성관이 나타나며,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교육론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여성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 임윤지당은 전통적인 통념과 마찬가지로 부녀자로서의 직분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념이기 보다는 가정의 법도와 부부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정도(正道)로 나아가는 바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도 문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소학(小學)이나 사서(四書: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책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는 표준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은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같은 실학자가 여성들의 교육에 반대한 것에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것이다.
임윤지당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여성을 존중하였다. 오빠 임성주의 친구였던 유학자 송능상(宋能相)의 부인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식견과 행실이 탁월하고 문예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독학과 자습으로 사서(四書)·삼경(三經)의 경서와 역사책들을 공부, 상당한 수준에 오른 것을 흠모하였다. 전통시대에 여성이 교육을 받고 학문을 닦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임윤지당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자신의 집념과 노력에 의해 학문을 이룰 수 있었다.
그녀가 평생을 통해 추구하였던 학문의 핵심은 심성(心性)의 수련과 도덕적 실천에 있었고, 이러한 도덕적 실천에 대해 남성과 여성을 차별해 인식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고귀성(高貴性)에 주된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임윤지당은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음양(陰陽)의 우주질서와 같이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 남녀는 사회에서 똑같이 중요한 필수적 존재이지 우열의 차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이 본래 다른 것일 뿐이며,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도리를 다하고 수양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는 일은 똑같은 것으로 보았다. 임윤지당은 또 강상(綱常)과 의리(義理), 그리고 용기(勇氣)를 중시해 여성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당시에 어떤 모녀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로 한 남자를 찔러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임윤지당은 두 여인의 용기가 남자들도 미칠 수 없는 것이라고 매우 칭찬하였다.
그러나 임윤지당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따라 남녀를 대립적 구도가 아닌 보완적 구도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사람의 보편적인 심성수양과 예의범절을 익히는 한편, 학문과 예술의 재능을 발휘해 자아실현을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전근대의 한국여성사에는 선정을 베푼 여왕들과 국정을 내조하던 왕비들도 있었고, 나라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들도 많았다.
그리고 문학과 미술에서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던 여성들도 있었지만, 남성들과 대등하게 학문활동을 하고 여성의 자존의식을 극대화해 정체성을 확립하였던 의식 있는 여성학자들은 드물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임윤지당은 매우 희귀한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임윤지당은 그녀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독특한 여성론으로 보아 한국여성지성사(韓國女性知性史)의 제일인자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한국여성예술사(韓國女性藝術史)에서 신사임당이 가진 위치와 필적할 만한 것이다.
【저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출처] 조선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