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공통점은 ‘참나[實我]=아트만(산스크리트어), 아나타(빨리어)’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서는 ‘참나’는 없다는 뜻으로, ‘참나’라는 생각을 가지면 보살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나’를 찾고자 하는 수행은 불교의 수행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 유행했던 종교적 수행으로 수정주의(修定主義), 고행주의(苦行主義)가 있었다.
수정주의는 괴로움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게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어떠한 의식(意識)이나 사념(思念)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정(定)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행주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음을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고 이 욕망은 주로 육체적 유혹이나 자극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육체적 고행의 수련을 통해 모든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후 수정주의를 닦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일체의 사념이나 의식이 없는 정(定)의 상태에서는 욕망과 고통이 없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지만 정(定)의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사념과 의식이 일어난다. 즉, 괴로움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이란 영원히 사념이나 의식이 없어야 하며, 이러한 상태는 결국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나이란자나 강을 건너 숲에 들어가 고행의 수행에 들어갔다.
6년간의 고행으로 신체는 극도로 쇠약해지고 의식은 혼미해졌다. 부처님은 육체를 극도로 학대하는 고행은 괴로움의 해탈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고 수행의 방법을 바꾸셨다.
싯다르타 태자는 나이란자나 강에서 6년간의 묵은 때를 씻고 강가 언덕의 풀밭에 지친 몸을 뉘였다. 마침 이 근처를 지나던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드시고 기운을 차렸다.
강가 낮은 언덕의 보리수 아래에 풀자리를 깔고 앉아 고요히 마음을 다스리고 명상에 수행에 들었다.
불교의 명상에는 위빠사나와 사마띠 수행이 있다.
위빠사나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하는 일을 그대로 조견(照見)하는 명상이며, 사마띠는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여 관조(觀照)하는 명상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이 보리수 아래에서 위빠사나와 사마띠 수행으로 드디어 부처님이 되셨다.
첫댓글 오욕락을 즐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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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하고
사서 고생하지 말고 ----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