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폰 리벤트로프(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 1893년~1946년)

평화 시에도 전쟁을 치른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외교 정책도 수행할 수 없다.
내가 체결한 강화 조약은 구닥다리 스타일의 모든 외교 정책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리벤트로프의 이름은 제국 외교장관으로서 독일인과 독일 민족을 고양시킨 인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ㅡ 아돌프 히틀러
독일 제3제국의 외교관으로, 제국외무장관(Reichsaußenminister)으로 유명했던 인물.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외교 수완을 발휘해 독소 불가침조약, 삼국 동맹 조약 등 제3제국의 중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공헌하여 거물 외교관으로서 활동했지만,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치당에 충성한 죄목이 입증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1. 나치당 입당 이전
1893년 4월 30일, 독일 제국 라인란트 주의 베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프로이센 보병 연대의 육군 중령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했고, 후에 캐나다의 퀘벡 지역에서 일했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리벤트로프의 출세길을 열어 준다. 리벤트로프는 독일과 스위스의 사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불어, 영어에도 능통했기에 1910년부터 1914년에 걸쳐서는 독일 와인의 무역상으로서 캐나다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류 산업의 성공에 힘입어 몬트리올과 오타와에서 캐나다 상류층의 일원이 된 그는 영국 총독부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과 영국은 서로 적이 되자 리벤트로프는 영국군에게 신병을 구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급히 뉴욕을 경유하여 독일로 귀국했다. 리벤트로프는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동생 로터에게 캐나다의 주류업을 맡겼었지만 동생은 영국군에게 체포당했고 1918년에 사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미국을 거쳐 독일로 돌아가 장교로 종군하였고, 독일 제국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에서 근무한 리벤트로프는 중위까지 승진해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8년 4월에 부상을 입고 난 후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한 리벤트로프는 여기서 한스 폰 젝트 장군과 프란츠 폰 파펜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싸웠으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고, 독일이 패전했을 때 한스 폰 젝트 장군의 부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도 참가한 리벤트로프는 참가 당시에 큰 굴욕을 받았다고 한다.
1920년 7월에 리벤트로프는 장사를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가 운이 좋아 샴페인왕(王)이라고 불린 헨켈의 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수출입 상인으로 재산을 모았다. 리벤트로프 부부는 총 5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리벤트로프는 큰어머니에게 자신을 양자로 넣어 달라고 해 이를 승낙받아 결과적으로 리벤트로프는 귀족의 칭호인 폰(von)을 이름 앞에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반유대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2.2. 나치당 입당
아돌프 히틀러와는 1928년에 알게 되었고 1932년대 초반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는 귀족 출신인 데다 외교관 경험도 있었기에 그는 히틀러에게 호감을 샀다. 리벤트로프는 사업가로서의 사업 수완과 외국어 습득 능력을 바탕으로 당의 비공식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리벤트로프는 전문적인 외교 업무에 무지했고, 어릴 적부터 외국에 살았으며 독일어 철자법에 서투른 데다가 가끔 헛소리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를 비롯한 독일의 정통 외교 관료들은 리벤트로프를 무시했으나 히틀러가 절대 권력으로 떠오르자 리벤트로프는 독일의 외교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2.3. 외교계의 거물이 되다
리벤트로프는 나치당에 입당해 1933년에는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목되기 전까지 프란츠 폰 파펜과 히틀러 사이에 비밀 회담을 맺어 주는 등 베를린의 자택에서 정치 공작을 담당했다. 히틀러는 이런 그를 높이 평가했지만 리벤트로프 자신은 나치당 내에선 신참이었고 간부들은 그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특히 귀족이 아니면서도 귀족적인 취미를 즐겼던 열등감 많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귀족 작위를 가진 리벤트로프에게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서 그를 매우 싫어했다. 괴링 역시 이 전직 와인장수의 외교적 무지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신임을 바탕으로 독일의 외교 정책을 뒤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독일 외무성의 엘리트 관료들은 국외 정세를 히틀러에게 보고했지만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아첨하며 히틀러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전했다. 1933년에는 무장친위대 명예 대령이 되어 잠시 친위대 전국 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우호 관계를 가졌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에는 영국 대사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히틀러의 뜻에 부합해 오스트리아 병합, 주데텐란트 획득,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독소 불가침조약 등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맺어진 각종 중요 조약들의 협상과 조인을 담당했다.
대전 초기에 독일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을 때, 해군·외무 관료·경제계와 결탁하여 소련과는 공존 관계에 있으면서 영국을 공격하여 아프리카 등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일본 제국을 설득하여 독일-이탈리아 왕국-일본의 추축국 라인을 구축하고 영국의 분할을 꾀하였으며 동맹국이나 점령국의 괴뢰 정부에 대한 외교 활동도 맡았다.
2.4. 2차 대전 말기와 최후
하지만 전쟁이 심화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리벤트로프가 지녔던 정치적인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어 갔고,1941년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고 소련을 불시에 침공하자 자신이 맺은 불가침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소련 외교관을 불러 선전포고를 한 후, 리벤트로프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독소전쟁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을 겪으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으며,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던 1945년 4월 20일,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56세 생일 파티에 참석했고 이것이 히틀러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파티 후에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종전 후 리벤트로프는 카를 되니츠에 의해 해고되었는데 그 후에 6월 14일에 함부르크에서 숨어 지내던 리벤트로프는 영국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피고로 호출됐고 감금되었다. 그러나 감금된 후에도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재판 당시에 리벤트로프는 자신의 행위를 모두 부정했지만 재판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보다 절대 영향력이 못하지 않았던 거물 인사이자 외교 실력자, 그리고 전쟁의 책임자이며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주범으로 죄가 인정되었고 결국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사형 선고를 들은 직후 반응이 걸작이다.
죽음, 죽는다라. 이제 내 아름다운 회고록을 못 쓰게 되는 건가.
본래 괴링이 먼저 교수대에 올라야 했으나 그가 자살해 버리는 바람에 처음으로 교수대에 오른 리벤트로프는 사형 직전 유언으로
신이시여, 독일을 지켜 주소서!
Gott schützt Deutschland!
라고 외친 뒤에는 나의 마지막 소원은 독일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과 동서양이 서로 이해하는 것이오.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리벤트로프의 유해는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11명의 핵심 전범들과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