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년~1945년)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년 10월 30일 ~ 1945년 2월 3일)은 독일의 법조인이자 나치당원이다.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 첼레(Celle)의 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2년 예나 대학에 입학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독일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소위로 진급했다. 나름 무공을 세웠는지, 철십자 훈장을 두번 받았다. 러시아군에 잡힌 후에 근면한 자세가 인정받아서 포로 대표로 일하였다. 포로 수용소 생활 중에 공산주의를 접하고는,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0년 예나 대학에 되돌아와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2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서 사무소를 열었다. 1924년 카셀 지역에서 법률가로 활동했는데, 이 때 수시로 당국에 잡혀 들어가던 나치 돌격대원(SA)들을 변호해준 것을 시작으로 나치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때 공산당원이었지만, 기회주의자에 전형적인 출세지향적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치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전향해서 1932년 나치당에 입당한다.
나치당 법률고문으로 시작해서 1932년에는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에는 프로이센 주 법무부 행정사무관, 1934년 프로이센 주 법무차관과 제국 법무차관을 겸임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나치독일 체제가 굳어진 1942년 1월에는 법무장관 대리로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에 영향을 미친 '반제 회의'에도 참석한다. 그리고 1942년 인민재판소장 오토 티라크가 법무장관이 되면서 그 후임으로 인민재판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라이슬러의 재임기간 동안 인민재판소가 내린 사형 판결이 총 5,000여건인데, 프라이슬러 혼자서 수많은 반나치 인사들을 포함해서 무려 2600여건의 사형 판결을 내렸다. 당연히 제3제국 재판관 중 가장 많은 사형 판결을 내린 것으로 피의 재판관이란 악명을 얻었다. 다만 프라이슬러가 정치범만 전담한 것은 아니라, 그 사형 대상자들 중에는 정말 사형 선고가 마땅한 흉악범이나 간첩 같은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자들만 사형에 처했으면 애시당초 전범(戰犯)으로 규정되지도 않았겠지만.
인민재판소는 사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재판을 모방하여 군중선동으로 판결하려는 의도로 설치된 것이었으나, 전쟁말기가 되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간략한 재판(단심제)과 신속한 처형(판결후 수시간 안에 처형)을 위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판사의 원맨쇼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판사는 검사보다도 더 피고를 다그쳤으며, 변호사마저도 피고를 변론하기는커녕, "피고는 동정의 여지가 없으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 정도의 막장재판이었다.
그중에는 영화 '조피 숄의 마지막 나날들'로 유명한 백장미단 사건의 조피 숄과 한스 숄 남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라이슬러는 제국 법무장관이 되기를 애타게 희망했고 나름 능력도 있었지만, 결국 출세는 차관에서 멈췄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꼽히는데 우선 나치당내에서 프라이슬러의 인기가 형편없었다. 최소한의 공정성조차 가지지 않고 무작정 나치에 충성하는 것만 생각인 작자였기에 미치광이라며 경멸하는 인사가 많았고 힘러 등 일부만 프라이슬러를 좋아했다. 또한 전직 공산당원으로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를 우리의 비신스키(대숙청 당시 소련 검찰총장)라며 추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론 볼셰비키라고 경멸했다. 이때문에 프라이슬러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에서 나치로 전향한 괴벨스는 프라이슬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나치당원이면서 반나치주의자를 변호하고 1939년 투신자살한 남동생 문제도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슬러의 재판방식은 피고인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며 고압적인 자세로 심문하며,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프라이슬러의 재판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있으니 한번 보도록 하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재판 장면으로, 괴벨스가 선전용으로 촬영을 지시했다. 그런데 프라이슬러의 과도한 욕설과 미치광이 같은 태도로 국민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해 주간뉴스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역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이 이를 증거자료로 상영하였고, 헤르만 괴링은 이를 보고 홀로코스트 기록 영화보다도 불쾌하다고 프라이슬러를 욕했다. 얼마나 프라이슬러가 막장이었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
나치 주요 인사 중 하나로 전쟁이 끝나면 다른 나치 주요 인사들과 함께 반드시 처단받아야 될 인물 중 하나였으나, 프라이슬러에 대한 심판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 전에 죽었기 때문. 자세히 말하자면, 종전을 두달여 앞둔 1945년 2월 3일 11시 3분, 대피 도중 베를린의 법원에 놓고 온 피고인 서류를 가지러 갔다가 미군의 폭격이 법정에 명중, 붕괴되는 건물 안에서 사망했다. 여담이지만 그 서류의 주인은 당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관련으로 재판을 받던 파비안 폰 슐라벤도르프(Fabian von Schlabrendorff,1907~1980)였는데, 프라이슬러가 타이밍 좋게 뒈지는 바람에 살아남아 서독 대법원 판사까지 역임했다.
또라이 짓이 얼마나 심했는지 심지어 같은 나치들에게도 미움 받아서, 프라이슬러의 시체가 뤼트초프 병원에 실려왔을 때 거기서 일하던 다른 악질 나치이자 독일 국방군의 핵심중 하나인 알프레드 요들의 아내인 루이즈 요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직원이 그 시체를 보고 "신의 천벌을 받은거지, 암"이라고 말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들 모두 다 함께 고개를 끄떡였다고 한다. 현재도 전쟁범죄자로 규정되어 있으며 아마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복권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