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왓트의 피라미드
앙코르톰은 크메르의 수도가 아니고 약 3세기 전에 바푸온사원으로 있다가 황궁과 중첩이 된 후에 왕정이 망해서 1906년에 버려진 땅이 되는데
앙코르톰은 시가 되고 앙코르왓트는 사원이 된다.
첨탑은 힌두의 신화적인 메루산을 표시하며 5개로 되어있는데 시바-신의 남근상을 의미한단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건물
1861년 독일의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은 4년간의 동남아 여행에 착수했고 이 여행에 대한 그의 설명은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6권에 달했다.
모든 사람들은 1864년 왕립지리학회를 통해 출판된 앙코르, 인도차이나, 시암, 캄보디아, 라오스 중부 지역의 여행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앙리 무오의 유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조리기구, 무기 또는 의복 품목을 포함하여 평범한 주거지나 집 또는 기타 정착의 흔적이 없었고 대신 기념물 자체에 대한 증거만 있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과 동심원 갤러리의 후기 계획의 독특한 조합이며, 대부분은 원래 힌두교의 종교적 신념에서 파생되었다.
앙코르 와트의 건축은 또한 사원의 특정 특징에 천상의 의미가 있음을 시사 하는데 전면이 추분날 정확히 서쪽을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맨트가 없었던 시절 돌들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는 아직도 모른단다.
내가 7명을 동반 골퍼 2썸을 만들어서 월남, 캠보디아, 그리고 태국을 다녀온적이 있는데 캠보디아의 문화가 가장 뒤떨어져 있었다.
위의 비포장도로는 차가지나가면 황토 흙먼지가 많이 일었다.
골프장도 시외가 되어서 발전기를 돌려서 식당을 오픈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원의 동서 방향과 특정 탑이 동지 일출의 정확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원 내부 테라스의 시선에서 관찰된다.
사원은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고향인 메루 산을 표현한 것이다. 탑의 중앙 퀸컨은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하고 벽과 해자는 주변 산맥과 바다를 상징한다.
폴폿트가 정권을 잡았던 시절 그의 준군사단체 이었던 크메르 루즈집단이 죽인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은 총 138만명이나 된다고 했다.
오래전 우리집의 잔디를 깎아주던 켐보디아에서 온 사람은 배운사람을 싫어했던 크메르루즈 집단이 학생들을 사살할적에 도망을 했는데 앞에있던 학생을 관통한 총알은 힘이 없으니자기의 가슴뼈에 박히는 바람에 살아남았다면서 갈색 흉터를 보여주었다.
타이로 6명이 도망을 치는데 그믐밤에 숲속에서 방향을 잃었을적에 한학생이 나무에다가 볼을 대보고는 따뜻한쪽이 남쪽이라고 해서 방향을 잡아 탈출에 성공을 했는데 종아리 부근의 옷은 없어지고 피부는 가시에 긁혀서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고 했다.
지근의 탈북자들은 건물을 이용하지만 그 당시의 난민캠프는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곳에서 집단생활을 했다는데 그 부근에서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는 여인곁에는 딸이 있었는데 미국의 배려로 타이랜드로 난민을 대리러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미국행비행기에 같이 탑승하여 지금은 이곳 클로버리에서 살고 있다.
자기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무남독녀 딸은 늣잠을 자 아침에 식사하라고 깨워야하니 부지런 한 자기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여름한철 벌어서 돈을 저축한 후에 겨울이면 고향을 방문, 두달동안 지내다가 온다고 했다.
첫댓글 캄보디아 이야기 잘 봤습니다.
7년전 캄보디아에 가서 3년간 한국어 교사로
근무했기에 캄보디아에 대하여 조금 압니다.
그리고 우리집에 캄보디아 서강대 유학생들이 세들어 살고 있고 제자들도 한국에 근로자로 결혼 이민자로 여러명 들어와서 직접 또는 페이스북으로 교류하고있습니다.
어제도 캄보디안유학생이 방을 구하기에 옆집 소개했습니다.
사진속에 학생들 3명이 지금도 한국에 근로자로 일하고있습니다.
한국으로 시집와서 당구의 여신으로 등극한 스롱 파이비 선수를
아세여?
유명한 그녀는 만나본적이 없으나
알고는 있습니다.
제자들은 전국에 흩어져 일하고 있고
명절마다 서울에 초대하여 관광시켜 주었는데 2년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초대를 못했습니다.
2년전 코로나 터지기전 추석에 초대했어요.
이외로 게장을 잘 먹어서 놀랐어요.
@사명 인사동도 방문하고.....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올리신글이 없네요/
감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