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준수한다는 전제 아래 제도 정치권에 들어와 있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김진표 원내총무 등 민주당 의원들 발언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단어와 수사법 몇개가 있다.
민주화, 민주주의, 민주 대 반민주, 현정부는 반(反)민주정부 등등.
그들의 주장은 민주화와 민주정부는 오로지 김대중-노무현정권에서만 구현되었다는 것이고, 지금은 다시 민주화를 투쟁하고 쟁취해야 하는 암흑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그런 근원적인 의문이 든다.
이런 의문에 명쾌한 답변이 나왔다.
한 원로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좌파진영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민주화와 복지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참여민주주의나 경제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만 벌리면 이명박 정권은 민주정권이 아니니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라고 합니다.
만약 그것이 그들의 소원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 하고 그 명확한 모델을 제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이러한 모델을 제시한 일이 없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화란 이름 아래 이뤄졌던 좌익운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쏟아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장)가 60~70년대 민주화운동 뒷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좌익운동의 감춰진 진실을 공개했다.
“제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기의 좌익운동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가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인민혁명당이 창당되고, 몇 년 후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지고, 그 다음 약 6년 후에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 터졌습니다. 뒤이어 발각된 것이 ‘남민전’이라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였습니다”
“그 다음 하나 더 발각된 것이 김정강 씨를 중심으로 서울대 등 일류대학의 엘리트 약 50명이 참여한 강력한 노동운동조직이었습니다”
안 이사장은 26일 출판기념회를 갖는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 실린 <증언-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좌익운동을 중심으로>란 글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과 숨겨진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좌익 혁명운동이 구분없이 뒤엉켜 진행됐던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이들 사건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고, 60~70년대를 거쳐 87년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좌익진영이 어떤 상호작용을 해 왔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도 적지 않다.
다음은 안 이사장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 진실처럼 굳어진 세 가지 오해
1. 경찰과 수사당국의 발표는 모두 거짓이다?
그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발표된 대부분의 보도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었다.
다만 전체적인 사건개요는 사실이더라도, 개별구성원에 대한 수사결과는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통혁당사건의 이00 씨와 신00 씨는 그 핵심멤버인 선배와의 인간관계 때문에 4년 내지 2년씩 감옥살이를 했다.
그 중에서 사실이 가장 과장된 사건이 제2차 인혁당사건인데, 이 사건은 실체는 분명히 있었지만, 사실 한 일은 대단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했다. 가혹한 처벌이 이뤄진 이유는 당시 통치자가 반정부학생운동으로 노이로제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도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느겼다.
정치적 사건의 경우에는 노골적인 폭력을 휘두른 경우도 많았다고 들었지만, 개인적인 체험에 의하면 근거가 전혀 없는 일을 억지로 수사하는 일은 없었다.
2.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주도권은 학생 및 노동운동권이 쥐고 있었다?
규모면에서는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이 강했지만, 사상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운동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당시 야당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운동이 그 시대의 절실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헌법체제하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자는 주장 이상으로 간단명료하고 호소력 있는 요구는 있을 수 없다.
민중운동측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했다.
우선 자유주의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고, 두 번째 야당이 이끌어줘야 운동이 쉽게 대중화될 수 있었고, 세 번째 순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면 민중운동을 하기가 용이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했다.
사회주의운동 지도자들은 민중운동을 보다 활발히 전개하려고 김영삼과 김대중을 지도자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을 빼놓고 자신들만으로는 운동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앞장세워서 운동을 한 것이다. 그 당시에 운동권에서 유명한 박한상 변호사, 서남동 씨 등도 전부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3. 좌익이 말하는 민주화?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민주화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사상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 사람들이 지향했던 인민민주주의나 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쓸 뿐,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다.
87년 이후 20년간 자유민주주의는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지금도 진보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하에서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직도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인데, 아직도 사회주의가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바란다면,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모델부터 제시해야 한다.
◆ 민주화운동 시기에 벌어진 대표적 좌익운동 다섯 가지
▷ 제1차 인민혁명당, 4.19 후 최초의 좌익운동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4․19의거에서 시작했다.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 반공주의적 자유주의를 제외한 그 밖의 사상은 숨도 못 쉬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4․19의거가 일어나면서 한국사회에 사상적 자유가 활짝 열렸다.
야당이 주장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뿐만이 아니라 남로당 계열을 잇는 사회주의, 통일운동 등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아, 이제 숨 쉴 때가 됐다’ 판단하고 밑에서부터 분출하기 시작했다.
4․19학생의거 이후 시작된 최초의 좌익운동은, 수사기관이 62년 1월부터 결성된 인민혁명당 활동이었다.
내가 이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인혁당을 이끈 중요한 멤버들과의 개인적 친분관계 때문이다.
62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박현채(朴玄埰) 선생(빨치산 출신 조선대교수, '민족경제론' 저자)을 만나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저술을 탐독했다. 인혁당에 가입한 일은 없지만, 인혁당이 발각될 무렵 그 후보위원 정도는 되어있었을 것이다.
인혁당 2인자였던 정도영 선생(전 합동통신 조사부장)과도 광범위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인혁당의 실체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인민혁명당의 조직목적은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자생적으로 발생한 학생운동 조직에 조직원을 침투시키며 한일회담 반대 운동 등을 뒤에서 지도했다.
인혁당 사건은 구속된 사람만 50여명이 이르렀으나 처벌받은 사람은 소수였다. 형량도 2, 3년에 불과했다. 이들을 수사했던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수사내용이 재판과정에서 허위자백을 이유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통일혁명당, 북한 지령에 의한 창당…서울대 교수연구실로 북한 책 들어와
1968년 적발된 통혁당은 최고책임자인 김종태( 이 사건으로 사형)가 월북해 북한의 지령과 자금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공산혁명조직이었다. 그런만큼 처음부터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출발했다.
『청맥(靑脈)』이란 기관지까지 발행할 정도였다. 하부운동은 서울대 상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그 중심에 ‘경제복지회’가 있었다.
이 조직은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50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무기징역 선고 받고 20년 복역)이 박성준(성공회대 겸임교수, 한명숙 전 총리 남편, 징역 15년 선고 받고 13년 복역)을 통해 지도됐다. 신영복은 당시 청맥을 발행하던 김질락의 지도를 받았다. 김질락( 이사건으로 사형)은 통혁당 2인자로 김종태에게 포섭된 사람이었다.
하루는 동생처럼 아끼던 서울대 상대 김수행 교수 연구실에 북한에서 내려온 책들이 책상 한 가득 올라가 있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마르크스 선집’.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 등이었는데 누가 전달한 것인지 확인해 보니 신영복 쪽에서 나온 책들이었다. 학생들이 없는 저녁에 둘이서 그 책들을 모두 변소에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혁당 사건이 터졌고 나도 남산으로 끌려가 신영복과의 관계에 대해서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2인자인 김질락이 모든 내용을 실토해 조직의 전말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었다.
수백 명이 수사를 받았고 사형 5명(북한에서 파견된 군관 2명 포함), 무기 4명, 15년 내지 2년의 형을 받은 사람이 21명이었다. 통혁당 최고책임자인 김종태는 사후에 북한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북한은 그의 공적을 기려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을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 제2차 인혁당 사건, 무고한 희생자 많아…수사 및 재판 무리수
74년 4월 발생한 2차 인혁당 사건은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무리수가 가장 많은 사건이었다. 무고한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은 ‘민청학련’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민청학련’은 72년 10월 유신반대를 위해 74년 결성된 전국학생조직으로, 인혁당은 민청학련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려 했던 좌익단체였다.
‘민청학련’을 지도하려 했던 2차 인혁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학생조직은 60년대와는 달리 매우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인혁당사건은 처음 재일조총련, 일본공산당 및 국내의 좌파혁신계가 연결된 간첩사건으로 발표됐다. 사건 관련자로 조사받은 사람만도 1,024명에 달했다.
그러나 인혁당과 민청학련은 분리시켜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판 결과 인혁당은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등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 학생리더에게도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15년 18명 등 중형이 선고됐다.
사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형량이다.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을 표방하는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사형시킬 명분은 없다. 인혁당원에 대한 처벌과 재심은 사법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 ‘남민전’, 북한과 연합전선 구축…지금은 민주화 유공자로
1979년 10월 적발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역시 실패한 좌익운동이었다.
핵심은 이재문과 신향식으로 각각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을 ‘미제의 신식민지’로 인식하고, 한발 더 나아가 무력투쟁으로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다. 또 북한을 혁명기지로 삼고 처음부터 북한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신년메시지를 작성하고 조직의 존재를 입증키 위해 북한공작원의 지령대로 서울시내에 반정부삐라 500장을 살포하는 등 극단적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측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금은방을 터는 등 강도행각까지 벌였다.
79년 8월 체포 당시 아지트에서는 사제폭탄, 다이너마이트, 권총 1정과 실탄 150발 등이 발견됐다. 인혁당 사형수의 내의로 만들었다는 ‘전선기(戰線旗, 혁명에 성공하면 중앙청에 내걸려 했다고 함)’까지 만들 정도로 행동도 기이했다.
이 사건은 명백히 한국을 공산혁명으로 전복시키려는 좌익단체의 소행이었으나, 2006년 3월 민주화운동보상심위위는 강도행적까지 민주화운동으로 간주, 관련자 29명 전원을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했다.
▷ 김정강 그룹, 위장취업 1세대…증거 불충분 대부분 풀려나
이 사건은 남민전 수사의 여파로 79년 12월 경 발각됐다. 핵심인물은 김정강으로 4.19 직후부터 학생운동의 리더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체포되자 순순히 조직구성 실태를 자백했다.
한때는 서울대 각 단과대학과 고대 및 연대 등에 광범위한 학생운동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론 아래 학생운동 리더들을 노동자로 위장취업하도록 지도했다.
대개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노동자로 취업했으나 대학졸업을 포기하고 공장노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위장취업 1세대라 할 수 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년 동안 노동자생활을 하고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강령은 물론 단체 이름도 만들지 않았다. 3인 이상이 모인 회합도 피할 만큼 비밀유지에 엄격해 20년 이상 발각되지 않고 지하에 잠복했다.
그러나 조직원 중 이탈자가 발생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진술을 제외하고는 물증이나 그 밖의 증거가 전혀 없어 검찰조사과정에서 모두 석방되고 단 2명만이 금고 1~2년형을 받는데 그쳤다.
>> 도서 소개
▶ 이 책은 지난 2008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의 사상적 배경 및 역사적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특히 진보진영과의 사회통합을 염두에 두면서 진행한 모임의 작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에 있어 공통점과 차이점, 성과와 한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다만 양 이념진영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논한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작은 결과물인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의 기원과 전개’뿐만 아닌 ‘신정치질서의 구상’과 ‘민주주의의 미래’를 함께 다루고 있다.
▶ 사단법인 안병직 이사장이 과거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증언으로 담은 ‘민주화운동과 민주주: 좌익운동을 중심으로’가 수록되었다.
안병직 이사장은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남민전’ 등에 얽힌 경험을 밝히고 있으며, 그 핵심인사인 김정강, 박현채, 신영복, 여정강 등과의 일화를 증언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제1차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제2차 인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김정강 그룹’으로 나누어 증언하고 있다.
▶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역사적인 측면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전개를 살피고 있고, 2부에서 현 한국의 정치질서에서 나서는 문제에 대해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3부에서 현 정치질서의 개선과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 차례
1부 민주주의의 기원과 전개
- - 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갈등과 상호의존 • 김세중(연세대학교 교수)
| 증언 |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좌익운동을 중심으로 • 안병직(시대정신 이사장)
2부 신정치질서의 구상
- 보수주의와 민주주의 • 김주성(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현대 정치의 복합구조와 민주주의 논쟁 • 김주성(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대의민주주의와 공론정치 • 김주성(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민주화 이후의 거버넌스 • 박효종(서울대학교 교수)
3부 민주주의의 미래
- 개헌과 정치제도 개혁의 방향과 전략 • 정진영(경희대학교 교수)
- 공정한 정치질서 구축에 관한 고찰 •김형준(명지대학교 교수)
-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과제 •김용호(인하대학교 교수)이승만 시대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 이주영(건국대학교 명예교수)
- 박정희 시대 산업화 보수주의와 민주주의 • 김세중(연세대학교 교수)
-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민주주의 • 김세중(연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