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저 만큼 온 것 같더니 좀 추워졌습니다. 더디게 오는 것이 자연의 봄이 아니라 마음속의 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이무공(勞而無功)이라 했던가요. 온갖 애를 썼으나 보람이 충분치 않습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은 많지만, 근본을 세워 방향을 바로 하는 일이었는가에 대해선 고민이 큽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겠죠? 그래서 더디게 오는 것이 이쁘고 또 아름다운 모양인가 봅니다. 마음속에 불어오는 바람이 차고 매운 날,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북하면 단전리 신촌마을을 찾아갑니다. /편집자주
북하면 단전리 신촌마을은 백양사로 가는 국도 1호선 도로변 왼쪽에 자리한 서향마을이다. 많은 풍수지리사들이 명당이라고 일컫는 곳이다.
신촌마을은 노령산맥의 한 줄기인 백암산의 한 가닥이 병풍산을 만들고, 병풍산 한 가닥이 북으로 올라 30리를 뻗다가 용두리 산맥끝인 손룡산을 등지고 들어선 마을이다.
손룡이란 풍수지리에서 산맥이 동남쪽으로 뻗은 것으로, 명당은 주로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있으며 산맥의 기운이 뭉쳐 있는 곳이다. 특히 산맥이 직선으로 뻗지 않고 꿈틀거리듯이 좌우로 또는 위 아래로 움직이는 산맥이 좋은 명당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신촌마을은 오래전에 배씨와 우씨가 그릇을 굽고 쇠부리를 하며 살다가 용수촌으로 내려왔는데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현재의 신촌마을로 새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살고 있는 성씨는 해주 오씨로 3백여 년 전 남원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김해 김씨는 150여 년 전에 고창에서 들어왔으며, 밀양박씨는 진원면에서 평산 신씨는 담양에서 들어와 살고 있다. 도강 김씨는 단전마을에서 들어왔으며, 도강김씨 재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어져 흔적조차 없다. 현재는 70여가구 310여명이 살고 있다.
신촌마을에는 1925년 정봉길 전도사가 창건한 신촌교회가 있는데 미국인 선교사 타마자 등 많은 교역자가 다녀가는 등 한 때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요람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농촌인구의 감소에 따라 그 수가 많이 줄었다. 1969년 창설한 시온산 기도원은 총건평이 1천여 평이 넘고, 매년 찾아오는 신자만 20만 명이 넘는 등 우리나라 기도원 가운데 몇 번째 안가는 대형 기도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촌마을은 한때 한지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1백여 년 전 박명수가 마을 안쪽 골짜기에 영산제지공장을 세우고 한지(창호지, 백지, 장판지 등)를 생산했으나, 20여 년 전 중국산에 밀려 문을 닫았다고 한다.
논과 들이 많은 신촌마을...무인가게로 유명해
논과 들이 넓고 낮은 산이 많아 골짜기가 많은 단전리는 골짜기에 밭이 있다 하여 두 밭 또는 단전(丹田)이라 했다. 단전리에는 자연마을로는 단전마을과 신촌마을이 있는데, 신촌마을은 단전리 서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촌이라 했다.
이 신촌마을이 전국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2005년 5월 일이다. 한마디로 ‘대박’ 난 것이다. “신문에도 나오고 테레비에도 나왔어, 케비씨, 엠비씨, 에씨비씨 다 나왔어”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체험학습을 오고, 아이들 앞세운 젊은 부모들이 서울에서도 경상도에서도 찾아들었다. 대기업에서는 “이곳엔 지켜보는 사람 대신 함께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는 광고도 냈다. 소개하지 않은 신문, 방송이 없었다.
잔잔한 감동으로 세상 사람들 가슴 따뜻하게 했던 그 ‘양심가게’가 있는 곳이 바로 이 신촌마을이다. 이 마을 동네가게는 주인이 없다. 과자 한 봉지 골라 알아서 돈 내고 간다. 소주 한 병 꺼내 알아서 거스름돈 챙겨 간다.
마을회관 한켠에 있는 4평 남짓의 가게에 들어서자 김기선, 김성균, 오기섭, 오봉식 어르신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래 이 가게에는 주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촌에는 희망 없다고 서울로 떴다. 가게도 문을 닫았다. 소소하지만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구할 수 없으니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쁜 농사일에 가게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마을 이장이 무인가게를 생각해냈다. 돈통 하나 갖다 두고 양심껏 돈 내자고.
“그려. 양심껏 묵고 양심껏 내믄 되제 뭐시 어렵당가. 누가 계산 잘못해 갖고 덜 너믄 딴 사람이 계산 잘못해 갖고 더 넣겄제.” 마을사람들도 동의를 했다.
가게 청소하고 선반 놓고 과자 술 음료수 세제 등 필요한 물건 골고루 들여놓고 늙은 사람들 알아보기 쉽게 큼지막한 가격표도 붙였다. 외상 장부도 놓았다. 급할 때 미리 가져다 먹고 돈 생기면 볼펜으로 짝 긋기로 했다.
오기섭 어르신은 “당장 돈이 없어 외상장부에 달아 놓고 나중에 갚아도 서로 믿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무인가게는 마을 어르신 사랑방
가게 한켠에 놓인 외상장부를 들여다 봤다. 외상장부에는 ‘마요네지 사가고 오새요(마요네즈 좀 사가지고 오세요)’ ‘빼빼로 좀 갖다주세요’ ‘감기약조 사다주새요’ (감기약 좀 사다주세요)…. 이장은 외상장부에 적힌 요망사항 대로 물건을 구입한다.
외상장부는 신촌마을 어르신들의 생활기록부다. 무인가게 최고의 단골손님은 김만금 어르신인 듯 싶다. 날마다 ‘김만금 소주 1병’이 빠지질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만금 어르신이 나타나 소주 1명을 들고 오신다.
김만금 어르신은 별스러울 것도 없다 한다. “그라믄 한 동네 사람들인디 안 믿는다요?” ‘누가 안 갚었다네’ 하는 말은 지금껏 나온 적이 없다. “외상도 더 얼능 갚제. 주인이 있다믄 주인만 보겄지만 동네사람들이 맨날 외상장부 들쳐보는 줄 안께.”
계산을 잘 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의 ‘계산원’들은 마을회관 앞에 늘 앉아 있곤 하는 마을 사람들 몫이었다.
“요것이 바로 24시간 편의점이여. 잠그는 법이 없어. 손님 와 갖고 술자리 길어지다 보믄 술 사러 가야 허잖애. 전에는 주인 깨우기 미안해서 더 못 묵은께 서운했제.”
무인양심가게는 문을 연지 18개월 쯤 되었을때 딱 한 번 도난사고만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곤혹스러웠다. 모두가 죄인인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가게를 닫자는 의견도 나왔다. 도난을 막기 위해 가짜CCTV를 달기도 했지만, 일부에서 비난이 일자 이틀 만에 떼어내 불에 태워버렸다.
속상한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해줬다. 격려 전화가 전국에서 걸려왔다. 어떤 사람은 피해 입은 금액을 후원하고 싶다고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 일이 있는 뒤로는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0년 12월에는 출향 인사들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7천만원을 모아 무인가게와 마을회관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 아름다운 가게에 주변에서 기쁨을 더했다. 장성농협 직원들은 돈을 걷어 동전교환기를 마을에 선물했다. 100원짜리 500원짜리 알아서 거슬러 가던 정겨운 비누곽 돈통은 없어졌지만 잔돈 때문에 애태우는 일은 없어졌다.
북하면사무소 직원들은 가게에 개수대를 놓아줬다. 소주컵 맥주컵 가지런히, 가게에서 소주 한 병 나눠 마시는 즐거움이 더해졌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마을에 담배자판기를 무상으로 놓아주었다.
겨울이면 따뜻한 난로에 모여 화투도 치기도 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맥주 한 잔 나눌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 단돈 800원만 내면, 따뜻한 봉지 라면을 직접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냉장고에 김치도 가득히 넣어뒀다.
무인가게 수익금 불우이웃 도와
하지만 이 가게가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이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 이 가게의 한 달 매출은 100만~150만원. 전기 요금과 물건 구입비 등을 빼면 한 달 순이익이 15만~20만원이다. 적은 이익금이지만 마을 노인 여섯 명에게 매달 세 명씩 교대로 쌀 한 포대(20㎏)를 사주고, 혼자 사는 노인 한 명에게는 목욕비 등 생활비로 3만원을 전달하고 있다.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기탁했다.
영리가 목적인 가게가 아니다 보니 운영이 힘들 수도 있을 텐데도 박 이장은 별걱정이 없다.
박 이장은 “한달 150만원 가량 매출을 올리는데, 이윤이 거의 없어 사실상 순이익은 20만원에 불과하다”며 “전기료 등 운영비로 충당하면 남는 것이 없지만,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사실 그 가게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가게 매출에 비하면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한 대부업 광고회사에서는 3천만 원을 제시했지만 거절했다. 이후 대기업의 광고 제안도 여러 번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시골 마을 순수함이 상업적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상업광고는 절대 찍지 않았지만. 공익광고에는 일 전 하나 안 받고 출연했다.
지금은 예전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는 않지만 여전히 동네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는 정겹고 아름다운 신촌마을 무인가게. 그 가게의 단골들이 하시는 말씀. “빈함없이 양심껏 묵고 양심껏 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