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1호 - 공식명칭 : 강릉 임영관 삼문 (江陵 臨瀛館 三門)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 수량/면적 : 1동 - 시대 : 고려시대 - 소재지 : 강원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강릉 임영관(臨瀛館) 강릉시내 한 가운데, 강릉대도호부관아 뒤편(북쪽)에 위치한 객사를 말한다. 강릉부 읍지(邑誌)인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전대청·중대청·동대청·낭대청·서헌·월랑·삼문 등 모두 83칸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기록들이 지금은 삼문만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고 10년도 넘은 지난 2006년 중대청, 전대청, 동헌, 서헌 등이 복원되어 번듯하게 서 있다.
<2006년 복원한 강릉 임영관 전경, 오른쪽 문이 국보 51호 삼문이며 그 왼편 중앙에 중대청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길게 서있는 건물이 왼쪽은 서헌, 중앙이 전대청, 오른쪽이 동대헌이다. 더 이상 임영관은 빈 터에 삼문만 남아있다고 하면 안된다.(사진 문화재청)>
객사(客舍)는 객관(客館) 또는 관사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들어와 행정조직이 개편되면서 관아시설도 체계화되었으며, 유교가 통치이념인 조선시대에는 사신의 접대 공간뿐 아니라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가장 중요한 건물로 존속되었다. 객사의 건물구조는 가운데 정청(正廳)을 두고 그 좌, 우에 익사(翼舍)을 두어 통상 서헌, 동헌이라고 하는데 이 곳은 동헌이 특별히 더 큰 구조이며(실제 동헌 마루가 서헌보다 정면 한 칸이 더 크다) 동헌을 동대청이라 부르니 서헌보다 위계가 높았던 듯하다.
고려 태조 19년(936) 강릉부 객사로 임영관을 창건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중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강릉공립보통학교 설치로 헐리게 되어 삼문만 남은채 공터였으나 지난 2006년 객사 건물들을 복원하였으며 다만 정청인 전대청 앞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을 중대청이라고 하였는데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된다고 한다.
임영관 일대는 1994년 7월, 사적 제388호 '임영관지(臨瀛館址)'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객사를 비롯해 지방관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아문(衙門), 의운루(倚雲樓) 등이 연이어 복원됐으며, 기존의 관청 건물 칠사당(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등도 자리하고 있어 모두를 지정구역에 포함하여 사적 명칭을 '강릉대도호부 관아 (江陵大都護府 官衙)'로 변경하였다.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三門) 이렇듯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앞쪽에 집무 공간인 동헌이 있으며 뒤쪽에 객사 임영관(臨瀛館)이 위치하고 있는 바, 임영관의 정문으로 보이는 삼문(三門)이 국보 제51호이다. 그전까지는 객사문이라고 불렀었는데 2010년부터 임영관 삼문으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나 공간을 사용하는 건축물은 아니며 단순하게 기둥을 세 줄로 세워 가운데 줄 기둥 4개가 만들어낸 3칸 공간에 각각 두 짝짜리 판문을 달은 구조이다.
가운데 판문을 달고 있는 기둥들은 민흘림 4각 기둥이나 앞뒤 줄 기둥들은 배흘림 원형기둥으로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배흘림 정도가 가장 크고 두드러진다고 하며 절집을 제외하면 이 삼문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바닥의 기단부는 앞쪽에 도로를 개설하는 바람에 생긴 지형적인 변화로 보이나 전체적으로 몇 안 되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판문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걸작이다. 맞배지붕은 단순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구조물이지만 간결하고 아름답다. 특히 앞줄 4개의 기둥 배흘림이 예술적이다.>
<국보로 지정될 만큼 대표적인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다. 12개의 기둥을 받치는 주초석은 원형이나 방형으로 다양하며 문지방 좌우로 신방목이 보이고 원형 배흘림과 사각 민흘림기둥이 뚜렷이 대비된다. 간결해 보이지만 사실은 복잡하고 다양한 목재의 결구방식으로 보이며 세밀한 단청을 칠했다면 매우 화려할 터이나 기둥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형식을 택함으로써 간결하게 느껴진다. 종보나 대들보는 크고 단순하지만 구석구석 작은 부분도 둥글게 곡면 처리하는 등 세심한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가로 3m, 세로 1.2m의 대형 임영관(臨瀛館) 현판은 피나무로 만든 4개의 판 위에 양각으로 새겼으며, 공민왕 15년(1366)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 남긴 친필이다. 그동안 삼문에 걸었다가 2006년 임영관 복원후 본래의 위치인 전대청에 옮겨 걸었다.>
현재 임영관 삼문 외에는 모두 최근에 복원한 건물들이며, 앞쪽의 동헌과 별당, 의운루 역시 새롭게 지은 건물들이다. 다만 동헌 왼쪽에 있는 칠사당(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은 조선시대의 관청 건물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의 7가지 정사에 관한 일을 베풀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과 영조 2년(1726)에 크게 중수하였으며 고종 3년(1866)에 진위병의 영(營)으로 사용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수비대가 있었고 뒤에 강릉 군수의 관사로 쓰이다가 1958년까지 강릉시장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칠사당(七事堂), ㄱ자 26칸 집으로 관가 건물답게 크고 넓다. 한동안 삼문과 칠사당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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