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 세상에 맞서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다
[1] 그의 생애(주교로 지낸 45년 중 17년 유배 생활)
① 298년. 이집트에서 출생
② 325년. 니케아 공의회(318명의 주교가 모임)
319년 아리우스(256년 출생)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부제가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서신을 보낸다. 321년,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쫓겨난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는 성부와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임을 결정한다.
③ 328년 6월 8일. 30세.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다.
주교가 된지 2년도 못 되어 아타나시우스가 논쟁의 시발점이 된다. 니케아 공의회를 승인했던 대부분의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단으로 부르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아타나시우스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위한 그의 열정을 없애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불법적인 세금을 부과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성직에 임명되었을 때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비난, 마법을 사용한다는 비난, 반역을 저지를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비난 등을 한다.
④ 5번의 유배 생활
1차. 336-338년. 정적들의 음모로
2차. 339-346년. 7년 동안 유배 생활. 가장 길다.
3차. 356-362년. 6년 14개월. 폭력으로 교회가 많은 박해를 받음
4차. 362-363년. 15개월 사막의 수도사 사이에 보냄
5차. 365-366년. 국가 권력으로 제거하려고 함
⑤ 373년 5월 2일. 75세에 별세.
사람들은 그를 대신하기 위해 파송된 다른 주교들의 합법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의 빼어난 인품 때문이다. 그는 어떤 기적도 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로지 그의 생애와 인품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기 위해 한평생 싸웠다.
[2] 아타나시우스의 생애에 나타난 논쟁에 대한 거룩한 소명에서 배울 수 있는 것
① 교리를 변호하고 설명하는 일은 복음과 우리의 영원한 기쁨을 위한 일임. 그가 세 번째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집트의 주교들에게 공개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수호하다가 죽어간 순교자들을 언급하면서 “이 싸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위한 싸움”이라고 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은 우리를 구언하는 복음의 진리와 유효성에 필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면 구원은 없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부패를 해결하고 그 부패를 그치도록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대속적인 죽음) 오직 하나님이신 인간만이 이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는 대속적 희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활을 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교리들은 우리의 예배의 핵심이 되고 삶의 바탕이 된다.
② 기쁨을 동반한 용기는 신실한 목자의 소명. 아타나시우스는 교회에 난입한 잔학무도한 침입자들, 자기를 유배 보내는 만큼이나 쉽게 죽일 수도 있는 황제들 앞에서도 당당히 섰다. 모든 목회자는 성경적 진리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세상에 맞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담대하게 싸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대적보다 더 기뻐해야 한다. 어떤 것이 싸워서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기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싸움 속에서의 담대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과 조화되어야 한다. “언제나 담대하여 기뻐하자”고 하였다.
③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조를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조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낼 수도 있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고 확신했다.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조가 요구된다.
④ 성경에 나오는 표현의 진리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강력하게 보호해야 한다. 사람들이 성경적인 표현을 거짓을 긍정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의 신조다’고 말하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긍정하는데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아리우스파는 성경적 의미는 부정하면서도 성경적 표현은 긍정했다. 아리우스 파는 일치단결하여 자신들에게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교리적 차이가 광범위하고 오래 지속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런 차이가 무의미하다거나 서로 설득해서 진리를 추구하고 의견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가 아타나시우스에게 사람들이 3백 년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달랐고 교회에서 어느 한 쪽을 정통으로, 다른 한 쪽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왜 당신이 그렇게 나서는가? 라고 했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냥 공존해야 한다고 할까?
⑥ 목회자들이 이 세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틀 안에서 설교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성경적인 사고의 틀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롬 12장 2절)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몇 가지 진리는 타락한 인간의 지성과는 직관적으로 어긋난다. 진리를 죄로 물든 우리의 생각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삼위일체 교리도 그렇다. 처음부터 불신자들의 타락한 인간적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진리를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락한 청중의 지성 안에 이미 존재하는 사고의 틀 안에서만 설교해서는 안 되고, 평생에 걸친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다.
⑦ 우리는 무언가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옛날 책들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실은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한 영광스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상에 주신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