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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정 추기경에게 듣는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78)은 "정치는 권력 놀음이 아니라 봉사여야 한다. 권력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구한다. 정치도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 9층 교구장실에서 만난 염 추기경은 소탈하면서도 단호했다. 염 추기경은 대선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인터뷰 초반부터 정치권에 쓴소리를 던졌다. 그는 "정치인들은 권력 쟁취에만 몰입하지 말고 희생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며 "세상은 못 박는 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못 박히는 자가 구원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자 선에 봉사하는 일이 돼야 한다"면서 "정치는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협치의 예술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 추기경은 서임 이후 매일경제와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를 했다. 교계 언론에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일반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2014년 서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국민에게 염 추기경은 "혼자 이길 생각을 하지 말고, 함께 이기자"고 제안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세계는 결국 같은 배를 탄 한 형제'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이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도 알게 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아픔을 사회적 우정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 명동에 문을 연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의 의미를 묻자 강한 어조로 "소외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소외된 이웃 대하는 태도 보면 우리 사회 성숙도 알 수 있어"
2014년 서임 후 첫 언론 인터뷰하는 염수정 추기경
한국 가톨릭 사상 세 번째 추기경인 염수정 추기경이 명동 서울대교구청 10층 옥상에서 포즈를 취했다. 염 추기경은 "우뚝 서 있는 명동성당은 순교를 딛고 일어선 한국 가톨릭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김호영 기자]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78)은 인터뷰하는 내내 "못 박는 자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못 박히는 자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을 수차례 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선함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14년 추기경 서임 이후 교계 외 언론과는 처음 갖는 인터뷰였다. 주교 복장이 아닌 평범한 사제 복장으로 기자 앞에 나타난 염수정 추기경은 소탈했다.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어 올리자 "이것만 들이대면 몸이 굳어. 익숙해지지가 않아"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을 인터뷰하는 날. 서울대교구청 9층 교구장실에서 내려다본 명동성당은 모진 풍상을 다 이겨낸 한국 가톨릭 역사를 증명하듯 의연하게 서 있었다.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추기경은 때로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고, 때로는 강한 어조로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던졌다. 인터뷰에는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을 연이어 보좌해온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가 배석했다.
―코로나19로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가 길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 세계는 결국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걸 알려준 것 아닌가. 거리 두기를 하면서 역으로 이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되지 않았나. 프란치스코 교황도 "우리 모두가 형제"라고 강조하셨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우정'을 살려야 한다. 혼자서는 극복할 수 없다.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 공직자들은 국민께 감사해야 한다. 잘 참아주고 잘 기다려주는 대다수 국민께 감사해야 한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출사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고 누리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봉사할 생각을 해야 한다. 봉사는 자신의 이해관계 없이 상대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정치가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권력만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권력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정치가 사람을 살게끔 도와주는 일을 해야지 권력 쟁취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 정치는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정치는 하느님이 가르쳐준 의미를 벗어나면 안 된다. 정치인은 자꾸 사람들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말고 사람을 중심에 둬야 한다. 가톨릭 교리에서 정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고 선에 봉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서로 협치해야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좋은 정치는 예술이다. 사람을 도와주는 예술.
―고 정진석 추기경 장례미사에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때 정진석 추기경님이 "이제 의지하고 기댈 분이 없어 참 허전하다"고 했던 말이 실감 났다.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큰형님처럼 정 추기경님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교구장이 된 이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 추기경님을 찾아뵈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김 추기경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면 정 추기경님은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셨는데.
▷1943년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에서 태어났다. 5남3녀 중 여섯째였다. 4대조 할아버지인 염석태 베드로께서 1850년 5월 충북 진천 감영에서 순교했고, 부인이셨던 김 마리아 할머니가 같은 해 9월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농토도 빼앗기고 내무서에서 약 두 달간 고초를 겪고 죽음 직전에서 간신히 살아나셨다. 평생 십계명만 지키며 산 착한 분이셨는데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으셨다.
―사제가 된 계기는.
▷중학교 졸업할 무렵 우연히 가톨릭 잡지에서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 학생 모집 공고를 봤다. 그때 운명처럼 사제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때 아들이면 사제로, 딸이면 수녀로 만들겠다는 기도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 기도 덕분이라 생각한다.
―영등포 성당 주임신부 시절 잊지 못할 사연이 많았다던데.
▷1986년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이재호, 김세진 학생이 분신을 했다. 중화상을 입고 학생들이 실려온 곳이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이었다. 병원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 중이었는데 4월인데도 무척 추웠다. 학생들에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고 성당에 와서 쉬게 했다. 이재호 학생이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였는데, 그 학생 장례미사 때 경찰이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끝내 싸워서 시신을 모시고 장례미사를 했다. "이 학생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기 생명을 버리고 부모님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만 이 학생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는 강론이 기억난다.
―최초로 행려자를 위한 무료급식소를 만든 것도 그때였나.
▷어느 겨울 영등포시장 근처에서 한 노숙인이 다 식은 아궁이를 끌어안고 얼어 죽은 일이 있었다. 달려가 봤더니 품에서 루카복음이 발견됐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봉사가 큰 주제인 루카복음을 안고 죽은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주변의 도움을 받아 무료급식소를 추진했다. 영등포시장 상인들은 채소 등 반찬거리를 줬고, 전국에서 쌀이 배달됐다. 사람들은 나누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1986년 만들어진 무료급식소가 지금도 '토마스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무료급식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여의도가 가까워서인지 크리스마스만 되면 방송 카메라들이 왔다. 그때 그들에게 "이들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취재하고 싶으면 며칠이라도 이들과 생활해보고 하라"고 돌려보내곤 했다.
―그 기억 때문에 올해 명동밥집도 만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는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야전병원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을 돌보고 배려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 한다. 소외된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명동 한복판 한국 천주교의 심장에 소외된 이웃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급식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도록 목욕과 빨래 등을 지원하고 사회 적응 훈련도 같이해야 한다. 그들도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들딸, 누구의 부모였을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사랑이 넘치면 방법은 나오게 돼 있다. 못 박는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못 박히는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는 법이다. 남을 살리겠다는 희생과 헌신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할 수 있다.
―첨단 과학 문명시대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이 만든 질서다. 그걸 잘 활용하는 게 과학이다. 문제는 과학을 절대시하고 우상화·이데올로기화하는 데 있다. 과학은 인간에게 선익을 주고 인류의 가치를 지키는 데 활용돼야 한다. 과학의 놀라움과 경이 역시 하느님이 주신 거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과학 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엉뚱한 하느님을 만들지 말고, 이미 있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일관되게 강조하시고 있는 생명 존중도 연결된 것인가.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이다. 생명은 곧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생명의 문화'가 아니라 '죽음의 문화'로 가고 있다. 현대사회 안에는 죽음의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도 죽음의 문화에 가담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에 맞서 만들어진 생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셨는데.
▷과학이 돈을 만나면 자칫 이기적 욕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배아줄기세포는 지나친 욕심이다. 빨리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배아줄기세포는 인간 배아의 생명을 빼앗는 또 하나의 살인 행위다. 성체줄기세포는 남의 생명을 파괴하지 않아 배아줄기세포와 다르게 윤리적이다. 돈이 된다고 해서, 권력이 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질서를 해쳐서는 안 된다.
―가톨릭대 의대 산하 8개 병원이 기초과학에 2000억원을 투자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사장으로서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인류를 구하는 의미 있는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초과학이 튼튼해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황청 과학기술원 총회에서 "기초과학은 인류의 혁신적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에 인정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소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기초의학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가톨릭다움'을 실천하는 것이다.
―최근 백신 나눔 운동도 주도하셨는데.
▷교황님 이하 가톨릭계는 가난한 나라에도 백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만 괜찮으면 되는 게 아니다. 지난 6월 1일 '백신 나눔 운동' 모금액 100만달러를 교황청에 1차로 송금했다. 비신자들도 많이 참여해 놀랐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폐막일인 11월 27일까지 운동이 이어질 것이다.
"나무판자 세워놓고 혼자 탁구 칩니다 하하"
주교복 대신 사제복 입은 소탈한 추기경
염수정 추기경이 지난 19일 명동 서울대교구청 9층 교구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는 방역 지침을 준수해 진행됐으며 사진 촬영 때만 마스크를 잠시 벗었다.
―'한국전쟁의 예수'라고 불리는 에밀 카폰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애쓰시는 걸로 아는데.
▷카폰 신부님은 전쟁터에서 초인적 사랑을 실천한 분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신앙을 실천한 그분은 기억돼야 한다. 성인은 오랜 옛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에밀 카폰 신부는 1950년 미국 육군 군종사제로 한국에 파견됐다. 소속 부대가 중공군에 포위됐을 때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남아 부상병을 돌보다 포로가 됐다. 중공군 총구를 몸으로 막아 포로들의 사살을 막았으며, 중공군 부상병들도 차별 없이 보살폈다. 수용소에 가서도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른 포로들에게 나눠주면서 박애정신을 실천했다. 1951년 5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993년 로마교황청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다. 최근 신원 미상 참전용사 묘역에서 유해가 발견됐다.)
―평양교구장 서리도 겸하고 있으신데.
▷2014년 개성을 방문했을 때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대화에 나선다면 이루지 못할 평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도 하느님의 빛이 다가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매일 기도한다.
―시간이 나실 때는 무엇을 하시는지.
▷운동을 좋아한다. 신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등산과 테니스도 즐겼다. 요즘엔 시간이 나면 탁구를 친다. 상대가 없으면 나무판자를 세워놓고 혼자 탁구를 친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매일 저녁 주교관 성당에서 기도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묵상한다.
▶▶염 추기경은…
1943년 경기도 안성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올라와 동성중학교·성신고등학교를 거쳐 가톨릭대학에 입학했다. 불광동 당산동 영등포 목동 성당 등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서울대교구 사무처장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2년 주교 수품을 했고 2012년 서울대교구장(대주교)이 됐다. 2014년 한국 세 번째 추기경에 서임됐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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