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유네스코 문화유산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의릉(懿陵)
< 서울 성북구 화랑로 32길 146-20 >
2026.7.23(목) 천장산(140m) 하늘길 산행후 조성왕릉 유네스코 문화유산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무덤인 의릉 탐방시간을 이어간다(16:30~17:00)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의릉(懿陵)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재위 1720~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이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곳이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곳은 앞·뒤로 무덤을 만든 특이한 경우로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으로 부른다.
동원상하릉(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앞뒤로 배치)으로 위쪽이 경종, 아래쪽이 선의왕후의 봉분이다.
1960년대 초 중앙정보부(이후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현 국가정보원) 청사가 들어서며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했으나 1996년에 다시 공개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캠퍼스 입구 의릉 주차장(주차비 무료)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한에 존재하는 40기의 조선왕릉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울 의릉 안내도
의릉은 1724년(경종 4)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이후 1730년(영조 6)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경종의 능침과 선의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경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의릉의 무석인은 갑옷 아래에 표범가죽을 두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징인데
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이 두른 표범가죽은 둥글게 말린 꼬리까지 표현되어 있다
또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다른 왕릉의 석호와 달리 꼬리가 등 위까지 올라가게 표현되었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의릉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능 주변으로 청사, 운동장, 강당 등을 짓고 일반인에게 비공개하였다.
이후 회의실을 비롯하여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인공연못을 조성하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청사를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금천교를 지나 의릉 홍살문과 정자각이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홍살문은 왕릉의 진입 공간에 세워져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고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인 문을 뜻한다.
홍살문 우측에 보이는 네모난 돌을 깔아둔걸 판위(版位)인데 왕이 능에 도착하면 가마에서 내려
이 자리에 서서 선왕의 능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절(국궁사배)을 올리거나, 의례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정돈하며 대기했다고 한다.
왕이 절을 하던 네모난 돌자리란 의미로 배위 (拜位)라고도 한다.
홍살문을 지나 의릉 가는 길은 향로와 어로가 정자각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옆에 판위가 있다.
향로 : 신관이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어로 : 왕이 걷는 길
판위 : 왕이 참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곳
"이승과 저승,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신성한 통로"를 상징한다.
정자각은 제향을 모시는 건물로 제향 공간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성되며, 건물의 형태가 한자의 정자(丁字)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하며, 단청이 되어있다.
정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의 모양에서 유래했는데
왕의 신위를 모시는 몸채(정전) 앞으로 제관들이 절을 하고 의식을 행하는 배위청(拜位廳)이 길게 나와 있어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 모양을 띈다고 한다.
조선왕릉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제사 공간으로 제례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정자 모양의 침전(寢殿) 건축물이다.
제수진설도와 기신제
의릉 비각과 비문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의릉 표석은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웠던 표석에 1730년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최종적으로 새긴 표석이다.
의릉 비문
조선국 경종대왕 선의왕후 부
♤ 경종(景宗)
(재세 : 1688년 음력 10월 28일(27일) ~ 1724년 음력 8월 25일, 재위 : 1720년 음력 6월 13일 ~ 1724년 음력 8월 25일)
경종은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아들로 1688년(숙종 14) 창경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1690년(숙종 16)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701년(숙종 27)에 무고의 옥으로 어머니 장씨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1717년(숙종 43) 숙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고(대리청정),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덕궁(현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경종 재위기간에는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 이를 수습하였고
1723년(경종 3) 서양의 소화기를 참고하여 수총기(水銃器)가 만들어졌다.
이후 1724년(경종 4)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선의왕후(宣懿王后)
선의왕후 어씨(재세 : 1705년 음력 10월 29일 ~ 1730년 음력 6월 29일)는
본관이 함종인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완릉부부인 이씨의 셋째 딸로 1705년(숙종 31)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18년(숙종 44) 왕세자빈 심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730년(영조 6) 경덕궁(현 경희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자각 옆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위에 봉분이 경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의릉에는 경종과 계비인 '선의왕후'의 능이 있으며 첫 번째 왕비(단의왕후)의 능은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혜릉)에 위치한다.
첫 번째 왕비의 능을 별도로 쓰게 된 것은 경종이 임금이 되기 전 세자빈 때 사망하였기 때문이며, '훗날 왕비'(단의왕후)로 인정받았다.
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언덕에 조성할 때는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의릉의 경우는 능이 위치한 구역의 폭이 좁기 때문에, 두 능을 위 아래로 두어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강당
국가등록 문화유산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과 회의실
이 강당은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옛 중앙정보부에서 사용했던 강당으로 1962년에 건축가 나상진의 설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10년 뒤 강당 옆에 회의실을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서 19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한과 북한이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7·4남북공동설명'이 발표된 역사적인 장소성을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