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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이 선 희
김교사의 이름은 김사백 (金思伯)이다. 그러나 이 동네에선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저 김교사고, 김교사네 집이고, 김교사 처고, 김교사네 아이들이고, 심지어 기르는 개까지도 김교사네 개라고 했다.
이러한 김교사는 8·15의 해방을 당하자 이십사 년간 교사 노릇에 궁상맞은 기름때가 쪼르르 흐르던 얼굴엔 왈칵 붉은 피가 용솟음을 쳐서 온몸에 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온몸이 오싹 추워 오한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몇 번이나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울기도 했다.
지금 조선 천지는 다 그럴 것처럼 이 동네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집 안에 앉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란 있는 대로 밖으로 몰려나와 혹은 뉘 집 토방마루에 혹은 마을 앞 큰 나무 밑에 이렇게 떼를 짓고 패를 지어서는 제가끔 좋아라고 떠든다.
“인제 무시기구 무시기구 병정 안 나가게 됐으니 좋다. 그 간나새끼들이 저희 쌈에 누길 내세우는 게야. 백판 남의 자식들을 다려다 생목숨을 끊을라구, 쌍간나새끼들.”
“야, 선냇집 큰아들이랑 수채동집 창수랑 병정 나갔든 게 오겠구나. 이 동내서 모두 몇 이나 나갔능가?”
“야듦이 나갔는데 만주로 다섯이 가고 그담엔 아직두 라남부대(羅南部隊)에 있다드라. 그 새끼들이 집으로 오느라구 눈을 허옇게 뒤집어썼겠다.”
동네 사람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바람에 조선독립보다 위선 먼저 생때같은 자식들이 병정으로 뽑혀나가 죽지 않을 것과 북구주(北九州)니 북해도(北海道)니 만리타국에 가기만 하면 모질고 악한 고역과 배고파 굶주리다가 죽어서 원혼귀가 될지언정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는 그 무서운 징용을 면할 것이 일당백으로 기쁘고 즐거웠다.
“내 원, 한뉘*르 농새꾼으로 농새를 해먹어도 금년 모낼 때처럼 배고픈 변은 첨 봤당이. 이 간나새끼들, 공출 받은 놈으 새끼들은 죄다 때려죽여야 한당이.”
“좋다. 면소놈으 새끼들이 그랬능가. 일본 간나새끼들이 그렇게 시키니 할 수 없지비.”
“듣기 싫다. 일본놈으 새끼들도 그렇지만 면소놈으 새끼들이 더하드라. 참대 꼬챙이를 해가지구 정양깐*꺼정 쒸시든 최가놈으 새끼, 이제 대가리가 터져두 터지니라.”
한여름에 불을 뿜는 열풍이 수수밭 고랑을 지나 큰 나무 밑으로, 울타리 밑으로 물결처럼 밀려든다. 일손을 놓고 이야기판을 퍼트린 마을 사람들은 해가 벌써 한겻*이 지났건만 돌아갈 생각들을 않는다.
이 동네는 허허벌판이 눈이 모자라는데 커다란 봉(峯) 하나가 그 벌판 가운데 섬처럼 놓여 있고 그 봉을 의지하여 꽤 큰 마을이 예로부터 대대손손 살아오는 곳이다. 봉 위엔 울울한 푸른 솔이 들어서고 잔디를 입은 옛 무덤들이 자고 있고 골짜기마다 맑은 생수가 젖처럼 흐르는 곳, 아름다운 땅이다. 더구나 이 벌판 가운데로 만리장강이 여울을 지으며 흐르고 그 강 위에 근대식으로 된 인조대리석의 흰 다리가 장관으로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은 뒷길로 김교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본래부터 불구인 다리를 잘록잘록 절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다.
김교사는 본래 얼굴이 창백하고 별로 말법이 없어 사람 틈에 끼이기를 싫어하는 성미다. 더구나 김교사는 어렸을 때 홍역을 하다가 그 바람으로 다리 하나를 못쓰게 되어 아이 때부터 동네 안에서도 잘 다니지 않았다. 그렇던 김교사가 오늘은 화색이 넘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노인들은 김교사가 어려서 다리를 못쓰게 됐을 때 그 자친이 날마다 업고서 침 맞히러 다니며 울기도 울던 생각을 한다. 벌써 그 자친도 돌아간 지 이십여 년이나 됐지만.
“아바이 절으 받수다.”
“교사, 절은 무슨 절으 합메.”
김 교사는 얼떨떨해하는 동네 노인들께 돌아가며 절을 했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됐으니 그 인사로 아바이들께 절으 앙이하고 어쩌겠소. 우리 아바지 어마이 산소에 가서도 지금 절으 하고 오우다.”
“교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됐으니 인제는 어떻게 하능가?”
“글쎄우다. 일본놈들이 쫓겨가고 무슨 대통령을 세우든지 하겠지비. 어쨌든 외국에 가 있든 사람들도 다 돌아와서 인제는 한번 잘살게 됐수다. 아바이랑 오래 앉아서 이런 좋은 세상을 보시니 복이 많수다.”
“서울에는 나라가 들어앉겠지. 그때는 되우 볼 만할걸. 그런 구경으 한번 해봤으면 좋겠당이.”
어제까지 면사무소에서 일본말이 아니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면사무소 직원들이 오늘은 갑자기 이 동네의 애국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자랑삼아 입에 서투르다던 조선말을 쓰며 내일 독립기념 축하행사를 한다고 야단들이다.
이 행사 준비본부는 이 동네에서 제일 큰 국민학교 사무실에 두었다. 지도자 몇 사람은 위선 태극기를 그리느라고 먹물과 꼭두서니 다홍 물감을 푼 사발을 들고 다니고 한편으로 또 집집이 작은 태극기를 그려 내일 행진할 때 들고 나서라고 분부했다.
김교사는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급하다고 이내 일어나서 언덕 위 국민학교 쪽으로 간다. 김교사는 이 국민학교 훈도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이 학교에서 깔보던 명성학원이란 사립학원의 교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십사 년간 사립학원 교원 생활에 이 국민학교를 적개시해왔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제 오늘은 날개가 돋쳐 이 국민학교 사무실로 드나드는 것이다. 김교사는 위선 내일 아침에 자기 학원 아동들을 모아 축하식을 하고 오후 한시부터 한다는 일반 축하식에 학생들과 자기네 선생들이 함께 참례해서 식을 할 것을 작정 했다.
김교사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동네에선 소를 잡는다고 야단들이다. 큰 나무 밑에 모여 앉았던 노인패들은 소 잡는 공론하는 데로 담뱃대를 들고 모여왔다.
“쇠고기를 한밥 실컷 먹자. 넨장, 간나새끼들이 쌈으 하느라구 몇 해르 가야 괴기 한 점 못 먹게 해서 늙은 사람은 소증*이 나서 죽겠당이.”
날이 벌써 저물어 마을에선 저녁 연기가 한창이건만 국민학교 사무실엔 아직도 사람들이 들끓는다. 더구나 까까중머리 젊은 선생들은 처음으로 불러보는 애국가니 독립가니 악보를 펴놓고 풍금을 삑삑 하며 노래를 배우느라 야단들이다.
이튿날은 희한히 맑은 아침이었다. 김교사는 머리 깎고 수염 밀고 아래위를 베로 지은 새 양복을 입고 명성학원으로 향했다. 길가 감자밭엔 아직도 이슬이 비처럼 쏟아지고 아침 풀을 뜯는 소잔등이에 학원 학생놈들은 주먹 같은 눈곱을 단 채 저희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명성학원은 커다란 조선 기와집 두 채이다. 완전한 국민학교가 못되고 학원인 이 학교는 모든 설비도 불충분하고 가난도 하지만 그동안 일본 정치에 몹쓸 천대와 굴욕을 무수히도 받았다. 그리하여 창설이래 삼십 년 동안 열세 번 폐쇄 명령을 받고 김교사는 세 번이나 감옥에 갔었다. 그러는 동안 김교사의 나이는 벌써 사십을 넘었다.
김교사는 위선 각 교실로 돌아다니며 문들을 활짝 열어놓았다. 좁은 교실에 때가 끼고 모서리가 떨어진 소나무 책상들은 눈들을 깜박이는 것처럼 오늘 따라 귀엽게 생각된다. 얼마 후 이 학원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모여왔다. 김교사는 엄숙하게 정렬한 아이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동안 삼십육 년이란 오랜 동안 일본이 얼마나 우리를 학대했던 것과 이번 우리가 여러 나라의 힘으로 독립한 것과 또 앞으로 얼마나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해서 우리 조선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을 혹은 주먹을 쥐고 혹은 울면서 말했다.
아이놈들은 저희 선생이 운다고 꾹꾹 찌르며 웃었다.
이렇게 긴장하고 즐겁고 또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몇 날이 지났다.
김교사는 날마다 그 인조석의 흰 다리를 건너 읍으로 서울서 오는 라디오를 들으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소련의 붉은군대가 함흥으로 들어왔다고 야단들이다. 다시 소련 비행기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까맣게 날아가고 소련은 조선에 삼십팔도선까지 진주해서 일본의 무장 해제를 시킨다고 함흥의 라디오는 방송했다.
북조선의 온 천지가 그렇듯이 김교사네 이 부락도 다시 한번 발끈 뒤집혔다. 북조선의 모든 행정은 각 인민위원회에서 하고 북조선의 모든 자원과 재산은 전혀 우리의 것이라고 연설했다. 읍에는 거리거리 방이 붙었다. 소련 주둔군 장관의 조선 동포에게 보내는 인사말과 격려의 말이 붉은 잉크로 대서특서하여 이발소 앞이나 가겟방 널빈지*에 찬란하게 붙었다. 농민조합은 온 부락이 송두리째 일어나 날마다 대회를 열고 일본인 토지 문제, 지주와 소작인 문제, 수리조합문제 등을 토의했다. 함흥과 원산에서 지도자들이 트럭에 실려 달려오고 농촌의 청년들은 당면한 정치 문제를 간단히 강습받았다.
“공산주의가 된다지? 공산주의가 되믄 어떻게 살겠능가.”
“그러기 말이오. 공산주의가 되믄 땅은 다 뺏는다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땅을 뺏기믄 빌어먹었지 별수 없당이. 여게 지금 나서서 공산주의니 머니 하고 개나발을 불고 다니는 아새끼들이야 전에 죄다 감옥소에 가든 놈으 새끼들이지비. 그놈으 새끼들이 돈냥이나 있는 사람 것은 덮어놓고 뺏어서 노나먹는다니 그런 도독놈으 새끼들이 어디 있소?”
“그놈으 새끼들이 남이 돈을 모둘 적에 저희는 멀 했능가. 뉘기, 돈을 모두지 말래서 못 모았능가. 돈 모두는 것도 다 제 팔자지.”
공산주의, 공산주의, 김교사의 귀에라고 이 요란한 새 시대의 소리가 아니 들어갔을 리가 없다. 아니, 이 부락에서 누구보다도 식자가 반반한 김교사의 귀에는 더 예민하게 들어갔던 것이다.
공산주의 ―언뜻 귀에는 반가운 말이다. 지난날 정답던 친구의 이야기처럼 익숙하고 서투르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 김교사는 공산주의가 싫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김교사는 본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집 장가 오던 날부터 남의 땅을 소작했다. 이 동네에서도 제일 작고 가난한 산밑 초가에서 그들은 타고난 팔자가 소작인인 것처럼 남의 땅을 부쳤다. 그리하여 지주의 몫을 바치고 나머지로 한평생 칠남매나 되는 자식새끼들을 데리고 연명 했던 것이다.
그들이 소작하던 지주댁은 남도 아니요, 비록 자기네 문내 안 동생 뻘 되는 사람이나 그들은 한평생 감히 촌수를 따지지 못했다. 그저 상전의 상전으로 지주댁 마당에 들어서면 저절로 키가 오므라들고 두 손끝이 마주 비벼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칠남매나 되는 아이들은 허구한 날 쌍닭알을 먹으니 콩짜개가 우지지한 똥을 싸고 크나 작으나 아랫도리는 벌거벗어 올챙이배처럼 툭 나간 배를 그대로 내어놓고 다녔다.
김교사의 뼛속엔 가난이 배었다. 키꼴*이 장대하고 마음이 사내처럼 서글서글한 자기 어머니는 한평생 아이를 등에 처매고 일을 했다. 아이를 업고 농사를 짓고, 삼을 삼고, 베를 짜고, 방아 찧고, 감자 캐러 다니고, 수숫대 모가지를 자르고, 돼지를 기르고, 이리하여 치맛귀가 오줌에 삭아서 꺼멓게 썩어나되 두 벌 옷이 없던 그러한 광경을 늘상 잊지 못했다.
김교사는 차츰 어른이 되어 자기의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생길 때 그는 왈칵 가난이 무서워졌다. 가난하여 하루 두 때에 끼니가 간데없고 아이들이 빈 밥그릇을 사타구니에 끼고 서로 싸우는 그러한 꼴은 생각만 하여도 무서웠다. 진실로 무서웠다. 그러나 김교사에게 있어 이 가난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돈 번다는 일이다. 김교사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버는지 자기도 수염 난 사내지만 그것은 깜깜부지였다. 무슨 재간으로 돈을 버는지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고 무섭고 끔찍하기만 했다.
더구나 자기는 다리 하나가 부자유한 불구자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는 일찍부터 학교 선생 노릇 하기로 뜻을 세웠던 것이다. 스무 살이란 젊은 나이에 그는 벌써 지금 명성학원에 선생으로 있었다. 김교사는 총명한 사람이다. 단 한 가지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그는 명석한 두뇌를 소유했다. 그 명석한 두뇌보다 좀더 비참하고 불행한 그의 생활은 그에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정열을 쏟게했다.
김교사는 학원의 아이들이 돌아가고 선생들마저 가버린 뒤 빈 사무실에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되 자기의 가난과 불행을 정복할 만치 열심히 읽었다. 해가 지고 사무실 남포에 불을 켤 때까지.
‘가난한 것은 우리 아버지와 나뿐이 아니다. 김가나 최가나 박가가 부지런히 일을 한다고 이 가난이 면해지는 일은 없다.’
김교사는 그때부터 이 부락에서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명칭을 얻었고 그 자신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자본주의 경제조직을 끔찍이 미워하고 원망했다. 십 년 전에 그러하던 김교사가 십 년이 지난 오늘 조선이 꿈같이 해방되고 다시 그가 그처럼 갈망하던 세계가 실현되나 그는 도무지 즐겁지가 않았다. 무섭기만 했다.
‘공산주의가 된다? 공산주의가 되면 이거 큰일났군.’
김교사는 북조선의 정세가 각각으로 급변해가는 것을 보고 가슴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읍으로 가는 그 인조석의 흰 다리 위로는 가슴에 붉은 헝겊을 붙인 새로운 애국자와 정치가들이 날개가 돋쳐 쏘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전율을 느끼고 낙심 했다. 얼굴을 외면하고 보지 않았다.
김교사에겐 동생이 있었다. 이름은 김사연이고 나이는 서른두 살 셋째동생이었다. 김사연은 키가 크고 힘이 장사며 끼끗하게* 잘생긴 사내다. 늘상 어수룩하고 우둔해 보이나 덧들이기만* 하면 큰일날사람이다. 그런데 김사연은 가난했다. 가난하되 너무도 가난하고 또 어쩌면 그 아버지가 살던 그 살림살이를 그대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김사연은 그 아버지와 꼭같이 소작인이었다. 또 천지가 개벽을 하기 전에는 김사연의 이 소작은 한평생 면할 길이 있을 리 없고 한평생 손바닥만한 남의 땅을 소작해서 연명하는 것이 그 아버지의 사주팔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젊은 김사연의 사주팔자도 되었다.
김사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부치던 그 일갓집 땅을 그대로 부쳤다. 아버지가 그 일갓집 쥔영감의 형님뻘이 되면서 한평생 촌수를 캐지 못하던 것처럼 김사연은 다시 그 아들이 자기에게 동생뻘이 되나 또한 한번도 촌수를 따지지 못했다. 지주의 아들은 동경(東京) 가서 어느 사립대학을 마친 얌전한 지식청년이었다. 그는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해서 별로 하는 일 없이 이 전원에 와서 있었다. 그리고 펄펄 뛰는 생선회를 먹고 능금나무의 신선한 열매를 따먹고 벌들이 모아온 밤나무꽃의 꿀을 먹으며 몸을 정양했다.
그런데 이 부락에선 이 청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한 사람도 없다. 벼슬 이름을 불렀다. 그의 벼슬 이름은 ‘학사’다. ‘학사’ ‘학사’ 하고 부르는데 아마도 대학을 마쳤다 하여 이러한 벼슬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만리로 뻗쳐서 흐르는 큰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이 땅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푸른 제방이 놓였다. 김사연은 그 제방 밑 수수밭과 조밭에서 늘상 김을 매고 있을 때면 간혹 그 제방 위로 자기의 동생뻘 되는 그 청년이 지나간다. 김사연은 얼른 일어나 “학사 어디 가시오”하고 인사를 한다. 그 청년은 “예” 하고 얼굴은 그대로 앞을 보는 채 지나가고 만다. 한번도 “형님, 수고하시오”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학사, 학사 개수작이다.’
김교사는 저녁을 먹고 동생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 동생에게 가서 요즘 돌아가는 공산주의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다. 김사연은 일본정치시대에 농민조합 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육 년 동안 징역하고 온 경력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등덜미에 고문으로 주리를 틀려서 상처받은 흠집이 있고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이 얼어빠져서 지금도 겨울이 되면 가렵고 아파서 견디지 못하고 황소 같은 그 힘이 지금은 벼 한 가마니를 겨우 들도록 골탕을 먹은 사람이다.
김사연은 해방 후 농민조합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했다. 그는 서른두 살을 먹도록 어수룩하고 우직하게만 살았다. 남들도 그를 어수룩하게만 보아왔다. 그렇던 김사연이가 지금은 표범의 새끼보다 영 맹 했다. 그는 인민의 절대다수인 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치를 위해선 다만 죽지 않으면 사는 그 한 가지 길 밖에 몰랐다.
김교사는 이러한 동생에게 요즘 맹렬히 토의되는 토지혁명이니 토지개혁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보다 슬금슬금 눈치채러 가는 것이다. 땅마지기나 있는 사람은 요즘 밤과 낮으로 가슴을 졸이고 주먹을 치는 판국이다.
김교사가 동생의 집 가까이 갔을 때 동생의 집에선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다. 왁자지껄하는 것이 대단한 싸움이다. 동생의 벼락 같은 목소리와 계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또 그 쌈이로군.’
김교사는 동생 내외의, 그것도 다른 싸움이 아니고―그냥 모르는 체해야 옳을 것이나 사실 그동안 몇 해를 두고 모르는 체해 왔지만 이제는 심상치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냥 집으로 되돌아서지 않고 울타리 밖에서 듣고 있었다.
“그놈을 따라 서울로 가거라. 발 쿠린내 나는 양말이나 빨아줘라.”
“가라믄 가지. 무서워서 못 갈까? 난 죽어두 촌에선 못 산당이.”
“이런 쌍간나, 너는 본시 촌간나지 언제 대처서 살었니?”
“촌간나게 서울로 가구 싶다지.”
“학사 아즈방이, 학사 아즈방이, 내 원 귓구녁이 쏴서. 이 간나야 학사 아즈방이랑게 다 멍 야. 학사 아즈방이 되우 잘나 보이디?”
“당신은 어째 동생 되는 사람보고 학사, 학사 했소. 그 아즈방이 언제 당신보고 형님이라구 하는 소릴 들어왔소?”
사연은 사실 이 말엔 말이 막혔다. 자기도 땅마지기나 얻어 부치는데 아첨하여 학사, 학사 하지 않았나. 그것은 바로 어제 일이다. 그러나 그 어제란 때에 오늘이 있을 것을, 그 존대한 학사를 몰아내는 제도가 있을 것을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으랴.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이렇게 의증을 내는 건 첨 보겠당이. 그 아즈방이 나하구 무슨 일이나 있었다구 그러오? 인제 서울 갔으니 씨원하겠소.”
“에잇 개간나, 아직도 그놈을 못 잊어 우니.”
사연은 벌떡 일어나며 아내의 아무데나 차며 때리며 한참 죽는 걸 몰랐다. 코피가 터지고 머리가 뜯기고, 사연은 에잇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그만 윗방으로 올라갔다.
사연의 처는 나이가 젊은데다가 이곳에서는 인물이 일등 가게 잘났다. 인물이 고운 탓인지, 또 어딘가 바람기가 있었다. 꽃처럼 피는 얼굴에 흰 잇속을 보이며 희살거릴 때는 누구나 다시 한번 보게 된 여자다. 사연은 자기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학사를 좋아했다.
사연은 학사로 말미암아 자기 아내의 마음이 자기를 떠난 파란 많던 지난날을 회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연은 자기 아내가 인물이 잘나서 남들이 다시 쳐다보는 것이 싫었다. 더구나 아내의 그 희살대는 표정을 학사의 눈에 아니 뜨이게 하려고 얼마나 겁을 내고 노력 했던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내는 잠시도 붙잡을 틈이 없이 미꾸라지처럼 놓치기만 했다.
“남들이 본다구 마주 뻔히 쳐다보진 말라구. 무슨 얼마나 잘난 줄 알어?”
“눈을 가진 게 보지 않구 어찌겠소. 내가 뉘기 잘났다오. 그럼 나보담 더 잘난 에미네를 얻어 사오.”
이렇게 가끔 말다툼을 하나 이것보다 더 큰일은 학사 아즈방이가 온 다음엔 자기 따위는 헌신같이 차 내버리고 자기 처가 그 집으로 자주 드나드는 것이다.
‘학사 아즈방이, 학사 아즈방이,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한집안인데 그런 무도한 일이야 없겠지.’
사연은 처음엔 그런 일이야 없을 게라고 자기 스스로를 꾸짖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꾸 귓속에 남아 있는 것은 학사 아즈방이, 학사 아즈방이 하는 아내의 알 수 없이 들뜬 즐거운 말소리다. 자기가 낮에 밖으로 일하러 나간 새에 아내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집에라고 모이면 아내는 학사 아즈방이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학사 아즈방이로 말미암아 가슴속에 무슨 요술이 들었는지 아내는 취하고 들뜨고 행복했다. 그 구두, 그 양복, 그 손목에 차는 시계, 기다랗게 기른 머리, 흰 얼굴, 모두 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랑을 가지게 하는 듯했다. 더구나 분과 향내 나는 머릿기름과 뺨에 바르는 연지, 생각만 해도 고왔다. 한번 발라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사흘이 멀다 하고 인조견 분홍 저고리, 옥색 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사연은 괴로웠다. 분명히 자기 처는 자기를 떠났다. 꿰진 베잠방이를 노닥노닥 기워주던 정은 옛날 이야기요 지금은 아니었다. 이때까지 우둔하고 어수룩하고 순박하기만 하던 사연의 폐부 속엔 무서운 괴롬이 빚어져서 일을 하다가도 문득 그 생각을 참느라고 낑낑 안간힘을 쓰기를 자주 했다. 어느 날 사연은 밭에서 김을 매었다. 김을 매는데 고약하게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 집에 있을까. 또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손에서 천재가 된 호밋자루가 그냥 사연을 끌고 밭고랑으로 나갔다. 그러나 세 고랑을 매는 품에 겨우 한 고랑의 김을 마치지 못했다. 사연은 지금 이 시각에 자기 아내가 그 집에 있는 그 현장만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만이 모든 소원인 것 같았다. 사연은 우뚝 일어섰다. 그 집으로 달려만 가면 된다.
‘그러다가 아니면 어쩌는가. 아니면 어쩌는가. 내 행색을 학사가 눈치채면, 이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 무슨 면목으로 학사집 땅을 부치는가?’
사연은 생각이 이에 이르자, 내가 미쳤군, 그럴 리가 없다―속으로 부르짖고 다시 밭고랑에 물러앉았다. 그러나 아니다. 분명히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일어서서 비실비실 동네로 들어왔다. 누구 눈에 뜨일까 가슴이 울렁거리는 법도 없이 천치처럼 비실비실 학사집을 향해 걸었다. 마을 앞 우물께서부터 학사집 큰 대문이 보일 때 사연은 후끈 상기가 된다. 지금 저 대문 속에 자기 아내가 있기를 축수했다. 사연은 울타리 아래쪽 돼지우리 있는 데서 안마당을 들여다 보았다. 두 눈이 등잔같이 열린 그 속으로 확 들어오는 광경이 있다.
‘있다. 있다.’
사연은 자기 아내가 지금 이 집에 있는 것으로 일종 자기 자신과 재판을 걸어 이긴 것처럼 통쾌하고 만족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치기 알맞은 심경이다. 다음 순간 사연은 두 눈을 멀뚱히 뜨고서 마루 위에 그 진풍속을 구경하고 있었다. 양복바지에 노타이를 입은 학사가 조그마한 사진기계를 들고 자기 처를 사진을 박는 모양이다. 그 네모진 조그만 것이 사진기인 것은 전에 여러 번 보아서 단박에 안다. 학사는 기계를 요리조리 돌리며 손으로 자꾸 자기 아내에게 무엇을 가리킨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교육을 받지 못한 그 무지한 육체는
학사가 시키는 동작과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 이렇게 앉으라면 저렇게 앉고 눈을 아래로 뜨라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학사는 고요한 웃음을 머금고 아름답되 야생적인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연은 돼지우리를 걷어차고 단박에 뛰어들어가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학사의 그 희고 소명한* 얼굴을 볼 때 그는 푸시시 힘이 빠졌다. 기운꼴이나 쓰는 자기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퍽 쓰러질 것 같다. 무엇인지 학사에겐 이기는 것이 있다. 그 이기는 것을 사연은 주먹으로 때릴 수는 없었다. 주먹으로 때릴 수 없는 것을 가진 학사는 이겼다. 돼지들이 우리 안에서 꿀꿀 쩝쩝거리며 물을 먹는다. 갑자기 돼지우리의 시궁창 냄새가 코를 물씬 찌른다.
사연은 퍽 돌아서서 누가 따라오는 것처럼 밭으로 달려왔다. 와서 다시 호밋자루를 들었으나 그도 사람이었다. 그대로 우두커니 밭머리에 앉아 있었다. 하루 품의 김을 매지 못한 수수밭의 풀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하루만큼 더 자랐다.
그날 밤 사연은 아랫목에 앉아 바느질하는 아내에게로 가서 그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내가 싫다고 톡톡 쏘는 것을 굳이 당기어 베었다.
“오늘 집에 있었소?”
“있지 않구. 저 낮에 새골집에 좀 갔다 오구.”
“인제 그 집에 너무 가지 말라구.”
“어째서? 가서 점심이랑 얻어먹구 좋지 앵소. 그 집에 댕겨서 밑지는 일이 있소?”
“글쎄 가지 말라구.”
“또 강째르 놓소? 내 학사 아즈방이께 일르겠당이.”
“강째는 무슨, 형제간에도 강째르 놓능가.”
“말이사 옳지비. 고렇지만 속으로는 강째르 놓는걸. 내 학사 아즈방이보구 싹 다 이얘기를 해야지.”
사연은 슬그머니 비겁해진다. 정말 이것이 무에라고 지껄이는 날엔 자기의 생활은 뿌리째 뒤집히는 판이다. 그래서 그는 되레 아내를 달래고 슬그머니 빌붙었다.
“그 학사 입든 양복이나 한 벌 얻어오라구.”
“당신이 입게? 당신이 양복을 입으면 개가 다 웃겠소.”
이러한 세월이 오래 흘렀다. 그동안 사연은 얄궂은 사람이 되었다. 울뚝 성내기를 잘하고 표범의 새끼처럼 영맹해지고 돌같이 굳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던 세월은 가고 8·15의 역사는 왔다. 사연은 감연히 일어섰다. 북조선의 정치에 몸으로써 주춧돌이 되고자 했다. 대지주이던 학사는 토지혁명으로 일조일석에 다른 처지가 될 것을 각오하고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학사가 서울로 갔다고 수군댔다.
사연의 처는 밤새도록 울어서 두 눈이 소복이 부었다. 사연은 인제야 아내와 마음놓고 싸울 수 있는 것이 유쾌했다. 그러나 슬펐다.
‘이 간나야, 인제는 내가 그놈보다 더 잘났다.’
김사백 김교사는 동생 내외의 싸움을 울타리 밖에서 듣다가 그대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 이튿날 밤에 동생의 집을 찾았다.
사연의 집엔 사연 이외에 댓 사람의 청년들이 윗방에 모이고 아래 정주엔 노친네들 마을꾼이 눕기도 하고 삼도 삼으며 숙덕숙덕 남의 집 흉보기에 정신이 없다.
“형님, 어떻게 오시우?”
사연과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반색을 했다. 이 근래엔 김교사가 통 동생집과 거래를 끊었다는 것은 동네 안에 퍼진 소문이다. 그렇던 김교사가 이 밤에 불쑥 동생집에 오니 누구나 반색 했던 것이다.
윗방과 아래 정주간엔 가스를 양철통에 넣은 칸델라의 등불이 파란 불꽃꼬리를 뽑아 방 안이 유난히 밝다.
“멋들 하나?”
“농민정치독본을 가지고 야학을 한당이오. 요즘 정치에 대해서 좀 알아야 앙이하겠소.”
“농민정치독본? 이건 농민위원회에서 만든 책인가?”
“예, 농민위원회에서 농촌 청년들을 위해 만들었당이.”
김교사는 십여 년 전 사회주의 과학을 열독하던 솜씨라 오늘 이 팸플릿이 결코 낯선 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교사는 책장을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뒤적 였다. 목차엔 카이로 급 포츠담의 선언, 농민 문제, 토지 문제, 사음(含音) 문제,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래, 토지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토지혁명이 정말 되는가?”
“토지혁명이 돼요. 조선이 지금 토지혁명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소.”
“그럼 국유로 되겠군.”
“아니 농민에게 무상으로 노나준답디다. 소작제도를 없애야 봉건제도에서 벗어난당이.”
“땅을 다 몰수해서 농민을 주면 지주는 어떡허게, 도독놈들 같으니라구. 남 애써 돈 모아 땅 살 때 저희는 멀 했어. 남의 걸 공으루 뺏어 먹으려구. 아직 중앙정부가 서지 않어서 몰라.”
김교사는 누르고 눌렀던 격정이 쏟아져 체면 없이 욕설부터 나왔다.
“앙이, 어느 사람은 제 에미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밭뙈기·논뙈기를 지고 나왔겠음. 몇십 년씩 놀구 먹었으믄 됐지비. 이제 땅을 내놔두 원통할 게 없당이.”
“그렇쟁이구. 학사네랑 봅세. 그게 벌써 오대째 내려오는 땅인데 해마다 늘어나서 그 돈은 어디다 주체를 하겠소.”
“세상이야 잘 됐지비. 농새꾼이 땅을 앙이 가지고 뉘기 가지겠소.”
“지주들이 땅을 내놔서 죽는다 산다 하지만 그만치 해먹어두 좋지비. 그렇지만 속이야 쓰겠당이. 손톱 하나 까딱 않구 거들거리드니.”
아래 정주간 노친네들이 입을 모아서 김교사를 들으란 듯이 오금을 박는다. 이 노친네들은 한평생 소작인의 아내로, 소작인의 어머니로 늙은 부인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늙으나 젊으나 요즘은 김사연네 집으로 모여서 밤마을을 했다. 그들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인 까닭이다.
김교사는 성이 파랗게 났으나 그까짓 늙은이들 말은 치지도외하는 것처럼 했다.
“그래, 언제부터 토지혁명인가 토지개혁인가 실시가 되능가?”
“아마 삼월부터 유월까지 걸쳐 끝이 나나 봅디다.”
사연은 형의 날카로운 시선과 부딪쳤다. 그는 이내 눈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김교사는 동생집에서 나왔다. 토지개혁을 목전에 당하게 된 이때 다른 경황이 없었다. 김교사의 안색이 몹시 창백하다. 사연은 형을 따라 일어섰다.
“형님, 내 바래다 드리께요.”
“야, 오지 마라. 일없다.”
그래도 사연은 형의 뒤를 슬금슬금 따랐다.
“야, 일없다, 일없어. 오지 마라.”
형은 손살*을 내저으며 딱 질색을 한다. 토지개혁을 좋다고 하는 동생이 진실로 정나미 떨어졌던 까닭이다. 사연은 그만 멍청히 서서 형의 가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이 뿌옇고 별들이 은빛을 쏟는다. 김교사는 한쪽 다리를 잘록잘록 절며 마을길로 돌아선다.
사연은 가슴이 뭉클하고 아팠다. 가난한 아버지의 아들,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그는 이십사 년간 사립학원의 교사였다. 스무 살의 홍안의 교사이던 그는 이제 사십을 넘어 마흔다섯이 되었다.
김사백 김교사는 지주였다. 소지주였다. 일천오백 평의 논을 장만한 소지주였다. 김교사네 논은 큰 다리를 건너 읍으로 들어가는 행길 바로 옆에 있었다. 본래 학사네 논이었으나 김교사가 샀다. 고추장 덩이처럼 기름진 일등답이다.
김교사는 이 땅을 잃을 것이 무서웠다. 첨엔 잃지 않으리라 뻗댔으나 나중엔 불가불 잃게 될 때 김교사는 다른 여러 지주들과 같이 발악했다. 북조선의 정치를 침식을 잊고 반대했다. 죽어도 그 땅은 못 내놓으리라 했다.
‘도독놈들, 내가 어떻게 하고 모은 땅이기에…….’
‘인제 땅은 뺏긴 땅이라. 하기야……’
김교사는 그까짓 이론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땅을 뺏길 것이, 자기 땅만 뺏기지 말고 해마다 몇 섬의 추수라도 받았으면, 이것만이 소원이었다.
김교사는 집으로 왔다. 등잔불이 아직도 켜져 있다. 식구들은 다 자는 모양이다. 밥이라고 한술씩 얻어먹으면 그 자리에 쓰러져 자는 게 일이다. 공연히 불을 켜서 기름을 없애느니 일찌감치 자는 게 풍속이었다.
김교사는 등잔에 기름이 졸고 솜으로 비벼놓은 심지가 기름 속에 오므라져 타들어가는 것을 꼬챙이로 갉죽거려 뽑아놓았다.
아이들이 여기저기 뒹굴며 자고 아내도 헌 치마를 벗지 않은 채 자고 있다. 짭짤하고 퀴퀴한 냄새가 방 속에 배었다.
김교사는 윗방으로 올라가다 말고 샛문턱에 기대 앉아 담배를 피웠다. 큰놈의 헌 양복 궁둥이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인다. 김교사는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보았더니이다.
‘이런 놈의 새끼들, 웬 이가 이리 많아.’
그는 한 놈씩 제쳤다 엎었다 하며 헌 옷 위에 기는 이를 잡았다. 그리고 이불을 잡아당겨 여러 놈 위에 걸쳐주었다.
‘헌 걸 집어 입재두 헝겊이 있어야지.’
아내가 노상 기울 헝겊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탄식하듯이 인제 참 더 기울 헝겊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던 아내가 눈을 뜬다.
“인제 왔소. 어째 앙이 쉬오.”
겨우 이 한마디를 하고는 또 돌아누워 잠만 잔다. 밤이 인제 꽤 깊
었다.
김교사는 그 후로 유난히 침울해졌다. 그냥 침울해질 뿐만 아니라 얼굴은 더 창백해지고 눈시울이 검푸르게 되고 눈은 움푹 들어갔다. 그의 초췌한 모양이 심상치 않건만 아무도 그러한 기색을 살핀 사람은 없었다. 촌사람이란 들것에 맞들고 다닐 만큼 돼야 비로서 병든 줄 아는 형편인 까닭이다.
김교사는 학교에 갔다 와선 몇 시간씩 방 속에 우두커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넓은 들판으로, 읍으로 들어가는 그 큰 다리 양편으로 십 리의 제방이 놓인, 그 제방 위로 철없는 아이들처럼 혼자서 쏘다닌다.
어느 날 그는 여전히 제방 위에 앉아 있었다. 제방 위엔 말들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는다. 붉은 갈색의 다락같은 말들이, 모가지와 네 족만 성큼한 망아지들을 사타구니에 끼고 풀을 뜯는다. 강물 저쪽 제방은, 눈이 모자라서 아물아물 보이는 위엔 소들이 풀을 뜯고, 눈곱이 달린 송아지들이 역시 엄마의 젖꼭지를 물며 한사코 따라다니는 좋은 풍경이다. 누가 작정한 것인지 강 이편 제방에선 말들이 풀을 뜯고 강 저편 제방에선 소들이 풀을 뜯는 것이 엄격한 규칙이다.
김교사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강물은 멀지 않아 바다로 들어간다. 이 제방이 끝나는 곳엔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엔 작은 섬들이 있다. 때로 바다가 심술을 부리면 짠물이 이 강으로 거슬러 흘러 연어와 은숭어를 그물에 몰아넣고,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맑을 때면 해초의 바다 냄새가 신선한 호흡을 가져온다.
김교사는 무슨 생각인지 벌떡 일어나서 말들을 쫓아다녔다. 망아지의 꽁지를 빼려고 쫓아다니니 망아지는 놀라서 껑충 뛰기만 한다.
‘쌍간나 말새끼들…….’
그는 다시 공허한 눈을 들어 그 초록의 풀들이 발이 빠지는 제방을 둘러보고 후유 한숨을 쉰다.
김교사는 또 무슨 생각인지 비실비실 다리를 건너간다. 김교사의 몽롱한 머릿속엔 지금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 있다. 십 년 전 기억이다. 십 년 전 기억이 소생될 때 그는 머릿속에 등불을 켠 것같이 환해지고 즐거웠다.
그는 불구인 다리를 끌고 활갯짓을 해가며 다리를 건너 저쪽 제방을 내려가고 있다. 이쪽 제방을 내려가면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진실로 아득아득하고 끝이 없는 갈밭이 초록 바다를 이루어 물 위에 흔들리고 있다. 이 갈밭 밑으론 언제나 검고 흐린 강물이 흐르지 않고 있어 강 밑은 태고 그대로의 비밀이다.
김교사는 이 갈밭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직 갈은 자라지 않아 멀리서 보면 벼처럼 푸르고 연하게 보였다.
김교사는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 사람처럼 걸었다. 본시 이 근방은 어느 때고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무인지경이다. 진흙탕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면 되래 무섭고, 간혹 물오리떼가 요란히 달아나서 이 광막한 들에 소리를 만든다.
“훠 ― 훠 ―”
그는 물오리떼를 쫓아서 한참이나 물가로 달아나다가 숨이 차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간 다시 강물에 발을 씻고 있다.
김교사는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갑자기 정신이 든다.
‘내가 이 무인지경에 뭣 하러 왔어?’
김교사가 무인지경 갈밭으로 달려간 것은 곡절이 있는 일이다. 그는 본시 불구자요 가난한 소학교의 선생으로 그 박한 봉급이 그들 가족을 기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교사는 사립학원 교사 노릇을 하여 최소한의 수입을 만드는 외에 돈을 버는 일엔 아무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궁핍한 김교사의 생활을 반이나 돕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난 것처럼 일을 하는 여인인데 일상 낙천적이고 부드러운 것이 대단한 특징이다.
“복순 아버지.”
아내는 불러만 놓고 다시 말이 없다. 글이 많고 선생 노릇 하는 남편을 그는 평생에 어렵게 대해왔다.
“무슨 말인지 말을 하쟁이소?”
아내는 위선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무엇인지 잠시 더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많고 이대로 가면 한평생 고생이겠당이.”
“그런 줄이야 몰우. 더구나 아이들 공부는 시켜야겠는데. 또 내 꼴이 됐지, 별수 있소?”
아내는 가난은 했지만 공부야 자기 남편이 대단히 많은 줄 아는데 또 내 꼴이 된다고 탄식하는 뜻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야 저희 아버지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덕골집에서랑 노존*으 절어 파누라고 밤잠으 앙이 잔당이.”
“노존으 절어 팔믄 동벌이야 좋겠지. 그럼 우리도 노존으 짇자오?”
김교사 내외는 마주 보고 웃었다. 글이 많은 김교사가 노존을 겯는다는 것은 좀 안된 일이기 때문이다.
노존은 가을까지 짜는 것으로 갈밭이 무궁무진히 있는 이 지방이 아니고는 다른 곳에선 생산을 못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 노존은 북조선 일대에 절대로 수요되는 것이다.
이 지방 사람들은 대대로 노존을 짜서 생계를 해왔다. 근년엔 천리옥야에 농사도 짓지만 아직도 이 노존을 짜는 족속이 아니다.* 그들은 누대의 숙련된 기술과 또 전통을 가지고 이 생산에 매진해온 것이다.
“그럼 내가 갈이랑 까서 놀게 복순 아버지 방에 앉어 짜기만 하실라오?”
그들 부부는 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이때까지 엄두도 못 내던 이 일에 달려들기로 했다.
“그럼 위선 개경 *을 사야지.”
“개경이야 갈밭에 내려가 비기만 하믄 되지비. 돈이사 얼마 주겠소.”
시작이 반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노존 겯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바로 십 년 전이다.
십 년 전.
그해 가을이다. 갈밭에 갈들이 모질게 여물었을 때 어느 날 김교사 내외는 갈밭으로 갈 베러 내려갔다.
며칠을 두고 두 자루의 낫을 벼리고 밧줄을 꼬고 또 점심 두 그릇과 기타 여러 가지 준비를 갖춘 뒤에 두 사람은 갈밭으로 내려갔다.
그 십 리 제방을 지나 물오리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아나는 언제나 흐르지 않는 검은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여 게가 작은집 개경 밭이요.”
“여기서 비능가.”
“복순 아버지는 앉았소. 내가 빌게.”
김교사는 잠자코 낫을 들고 일어났다. 이 들판엔 사람의 자취가 없다가 가을이 되면 갈 베는 사람들이 오게 된다.
갈밭에 갈은 사람의 두 길이나 된다. 그 무궁무진한 갈밭은 바다를 이루고 흰 솜 갈꽃이 소소한 가을바람에 들을 덮어 날 땐 여기가 이국인 것 같은 곳이다.
김교사 내외는 낫 한 자루씩 쥐고 갈밭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갈 베는 소리만 싹싹 난다. 그들은 벤 갈을 척척 눕히며 자꾸 베어 나갔다.
“심이 드오?”
“앙이, 일없소.”
반나절을 베었다. 인제 점심을 먹자고 해서 두 사람은 밥보퉁이를 들고 밭머리에 앉았다.
“옛날에 기차가 없을 땐 이 나루터를 건너 무실고개를 넘어 원산을 육로로 다녔는데.”
“원산이 여기서 일백십 리요?”
“한 백 리 되지. 그땐 사람이 간혹 다녔는데 지금은 아조 무인지경이 됐거든.”
그들은 그날 하루 종일 갈을 베어 눕혀놓고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은 어제 벤 갈을 잎사귀를 쳤다. 갈꽃이 하얗게 날고 김교사 내외는 머리와 얼굴과 온몸에 갈꽃이 덮였다.
“옛날에 이 갈꽃을 솜으로 옷에 두어 입힌 계모가 있었다우.”
“내가 죽으면 그런 예펜네르 얻지 마오.”
그들은 이런 농담도 했다.
“인제 묶을까?”
“묶어두 좋지비.”
그들은 갈을 묶었다. 채가 길어서 묶기는 묶지만 가져갈 일이 난처했다. 그날도 해가 질 무렵 아내가 싸우듯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김교사가 한 단 졌다.
“무겁아서 어찌 가겠소.”
아내는 두 단을 이었다. 두 단이면 무겁기도 하려니와 채가 길어서 자칫하면 한쪽이 땅에 끌리기 쉽다. 아내는 갈을 이고 앞서서 달아난다. 작은 몸이 갈 속에 묻혀 몽총한 아랫도리만 홀랑홀랑 보인다.
“무겁소?”
“괜찮소.”
이렇게 그들은 가으내, 그것도 김교사는 학교에 간 다음에 그 아내 혼자서 갈을 베어 집으로 날랐다. 그리고 겨울방학엔 내외가 죽자꾸나 노존을 결었다.
김교사가 윗방에 꾸부리고 앉아 밤새도록 노존을 결면 아내는 그 곁에서 짜악짜악 소리를 내며 갈을 까서 대었다.
“우리 논으 삽시다.”
“노존으 절어서 논으 사겠소?”
“어째서 못 사오. 이렇게 십 년만 하믄 사지비.”
그들은 등잔에 기름을 세 번 네 번 다시 부었다. 그러다가 창문이 허옇게 밝아올 무렵에 아내의 권고로 김교사는 온밤 펴놓았던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는 그 등잔을 그대로 들고 부엌으로 가서 조반을 짓는다.
‘논을 산다. 논을 사야지, 학교를 그만두시더라도 굶어죽지 않지. 살림 밑천을 장만해야 월급이 없어두 살아가지.’
김교사 내외의 굳은 뜻으로 그들은 십 년이 못 가서 논을 샀다. 행길 옆에 닷 마지기 논을 장만했다. 노존을 결어서 논을 장만했다. 이것은 십 년 전부터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김교사는 십 년 전 기억을 따라 갈밭으로 달아나던 그 후에도 줄창 말이 없었다. 다시 동생을 찾지도 않고 다시 누구와 토지 뺏기는 이야기도 하는 일 없이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제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완전히 끝이 나서 소작제도는 소멸되고 토지는 호밋자루를 든 농민의 손으로 돌아갔다.
김사연은 농민조합에서 이 일로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의 혁명은 토지혁명으로부터 하고 때를 놓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사연은 자다가 깨었다. 밖에서 누가 급하게 부른다.
“아즈방이, 아즈방이.”
사연은 옷을 주워 입으며 문을 열었다. 형수가 얼굴이 파랗게 되어 달려든다.
“어찌 그러오?”
“복순 아버지가 없소.”
“형님이 없어요? 정양깐에랑 가봤소?”
“아무리 찾어두 없당이. 아무래두 큰일났소.”
형수와 사연은 왈칵 불길한 생각이 든다. 요즘 김교사의 신색이 몹시 초조하고 행동이 수상한 데가 많았다. 사연의 머릿속엔 형의 날카로운 시선이 번쩍한다.
사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대로 행길로 나섰다. 나섰으나 막연했다. 다시 급하게 걸었다. 읍으로 가는 큰길에서 그는 달음박질했다.
‘어디 갔을까. 혹시…… 죽지나 않았을까.’
사연은 또 줄달음을 쳤다. 길에는 개새끼 하나 어른대지 않는다. 다시 보니 달도 떴다. 그는 다릿목까지 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연은 오던 길로 되돌아서 왔다. 어찌해야 좋을지 도시 막막하나 무섭고 불길한 생각은 도시 떠나지 않는다.
‘물에 빠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사연은 갑자기 며칠 전 형수가 하던 말을 생각했다. 형이 자기를 칼로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하던 것을. 농민조합에 있는 자기를 칼로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하던 것을.
‘칼로…….’
사연은 또 조급하게 걸었다. 칼로 자기 형이…… 그러나 그럴 리야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미친 듯 사방을 살피며 걸었다. 달빛에 행길 옆 논에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보인다.
‘저 게 무엘까. 이거 큰일났구나.’
사연은 논으로 뛰어들었다. 사람이 꼬꾸라졌다. 더 말할 것 없이 형 김교사였다. 사연은 그대로 업으려 했다. 피비린내가 확 끼친다. 달빛에 검은 것이 번쩍번쩍한다.
저고리로 형의 몸을 싸서 그대로 업고 집으로 달려왔다. 울곤 아우성을 치려는 형수에게 떠들지 말고 사람을 구하자고 했다.
“방에다 눕힙시다. 아직 숨이 있소.”
사연과 형수는 김교사를 맞들어 방에다 뉘었다. 목으로부터 온몸이 피로 말았다. 김교사는 얼굴이 종이처럼 희고 숨을 목에서만 헐떡거린다.
“내 읍에 가서 의사를 데려오겠소.”
이 말을 들었는지 김교사는 눈을 뜬다. 눈을 뜨는 바람에 사연은 앙 하고 울음이 터졌다.
“형님, 정신이 드오?”
“가지 마라.”
형은 가지 말라는 뜻을 얼굴에 표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죽음이 왔다. 김교사의 눈은 몽롱하게 흐려오고 마지막 호흡이 목 위에서 끓었다. 마침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을 뽑아 청맹과니를 만들고 김교사는 운명하고 말았다.
김교사의 장사는 학원 아이들이 열을 지어 오고 온 동네가 들끓어 지냈다. 마을 뒷산 소나무 떡갈나무 그늘이 얼룩지는 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필시 소년 시절 김교사가 이 나무에 기대 앉아 책도 읽었을 곳에.
김교사의 장사가 지나간 날 저녁 사연은 저녁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왔다. 오늘밤은 다시 보지 않아도 달이 환히 떴다. 사연은 시적시적 마을 앞 행길로 걸었다.
탁 트인 들과 강물에 달빛이 층층 차서 출렁거린다. 사연은 형의 죽음이 육체에 배어서 눈과 코와 모두가 다 죽음의 냄새뿐이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아득하고 미묘한 검은 길이 보이는 것 같다.
사연은 자연 발길을 학원 쪽으로 돌렸다. 이십사 년간 형의 학원, 교과서를 끼고 다니던 길이다.
사연은 청맹과니처럼 눈을 멀뚱히 뜨고 그저 걸었다. 아픈 것이 도를 지나 칼끝으로 후비어도 감각을 잃은 가슴을 안고.
가난한 아버지의 아들, 가난한 아들의 아버지, 다시 가난한 아이들의 교사―그는 발작적으로 자살했다. 동네엔 김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구구한 추측이 많았다.
‘형님은 가난이 무서워 죽었다. 가난이 형을 이겨서 마음을 흐트러 놓았다.’
학원 집은, 그 오랜 기와집은 달빛이 비쳐서 앞마당 주춧돌 위에선 바늘이라도 꿰게 환히 밝은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비바람에 이끼가 끼고 풀들이 쑥쑥 올라온 지붕에 기왓장들도 번쩍번쩍 빛난다.
학원 뒤에 우뚝 앉은 그 산봉우리는 잠을 자고 검은 숲속에선 부엉이도 울지 않는다. 한평생 쓸고 공글리고* 정성을 들이던 마당엔 아직도 기다란 교의가 백양나무 밑에 누웠다.
아이들을 데리고 손수 나무를 깎고 쇠뭉치를 끼고 해서 만든 철봉대도 두 귀를 반짝 들고 그대로 서 있다.
사연은 그대로 걸었다. 문득 보니 학원 창문에 불빛이 환히 비쳐있다. 그 네모진 유리창문에 불빛이 비쳤다.
‘누가 불을 켰을까?’
그러나 달빛과 어둠으로 짜여진 이 밤이 고풍스런 학원엔 귀신도 울 것 같은데.
사연은 불빛이 비치는 유리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형 김교사의 희고 가는 손이 이 불을 켠 것같이만 생각된다. 그는 잠시 형의 흰 손이 이 불을 켰다고 생각했다.
사연의 어둡던 마음이 웬일인지 평안해진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서 걸었다. 우리들의 앞날도 누가 켠지도 모르는 그 창문의 빛처럼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서울신문』 (1946. 6. 26~7. 20); 『해방문학선집』 (종로서원 1948)
이 선 희
이선희(李善熙)는 1911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원산 누씨(樓氏)여자고보졸업, 이화여전 문과를 수료한 후 『개벽』 기자로 근무했다. 1934년 「불야여인(不夜女人)을 『중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해, 가부장적 지배 원리에서 파생하는 여성의 억압과 해방을 그린 「계산서」 「매소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창」 외에 「오후 십일시」 「노장」 「여인도(女人都) 「여인 명령」 「연지」 「인형의 집」 등의 작품이 있다. 1946년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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