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서교회의 분열: 천주교와 동방정교
395년 로마제국 황제(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면서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됩니다.
이후 동로마는 동로마의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고
게르만족의 침입이 격화되고 있는 서로마가 어떻게 되든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서로마를 침입한 게르만족이 각각 프랑크족,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등의 나라를 세우고
서로 영토쟁탈전을 벌린 결과 프랑크족이 대부분을 평정하고 세운 나라가 프랑크왕국이었습니다.
그후 프랑크 왕(클로비스)이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교황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자
800년 로마교황(레오 3세)이 프랑크왕국 대제(카롤루스)를 서로마제국 황제로 대관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게르만족 국가(동고트왕국, 서고트왕국, 반달왕국 등)들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이단으로 여기던 아리우스파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서로마제국의 황제자리가 빈지 300년이 넘은 시점에 로마교황이 서로마황제를 새로 대관한데에는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시에 서로마황제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뒤 서프랑크(프랑스)와 동프랑크(독일)로 갈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가 받았던 서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962년 동프랑크왕(오토1세)이 다시 교황(요한12세)으로부터 로마제국 황제로 대관하고
서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도 겸하게 되자 이때부터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전의 서로마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더이상 서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의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동로마제국황제는 로마교회를 끊임없이 간섭하며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려 했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교회의 수장자리를 놓고 로마교황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수위권과 교리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동,서 기독교회는 1054년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교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에서 정교회로 그리고 가톨릭교회로 나뉘고, 루터종교개혁 후 프로테스탄트교회로 삼분됩니다.
정교(正敎)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수장(首長)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일단인데
그리스정교 또는 동방교회(東方敎會;Ecclesia Orientali)라고도 합니다.
서로마에서는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점차로 멀어져 갔습니다.
988년 러시아황제 브라미디르는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후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사실상 정교의 종주국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정교(orthodox)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정교,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정교,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정교로 나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교회관에도 차이가 있는데 동방정교는 십계명을 근거로
성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지만
로마교회는 야만인들에게 교세확장을 위해서 성상숭배는 불가피한 것이라며 비잔틴제국의
성상숭배 금지명령을 묵살해 왔습니다.
교황직 약사(略史)
교황[敎皇]이라는 명칭은 라틴어 Papa로(영어Pope) 본래 지역교회의 최고장상(주교, 총주교
대수도원장)을 부르던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교황[敎皇]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① 초대교회 :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로마제국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긴 후부터 로마주교의 종교적 권위는 더욱커졌다.
종교적 논쟁이 분분할 때마다 로마황제들은 공의회를 개최하여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로마주교는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자라로 자처하여 전체교회의 중심인물이라 주장하였다.
이단파의 지도자들도 자기네 주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 교부들도 반대자들의 핍박을
피하여 로마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종교적 문제들을 주로 동방주교들이 참석하여 결의하였지만 그 결의는 언제나 서로마주교의
동의를 얻어야만 공의회에서 인정되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476년) 서로마주교는 교회뿐 아니라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하였고,
게르만민족을 교화시키고 수도회와 성당을 통하여 로마문화를 전수하였다.
6세기 말에는 로마주교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중세유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황제의 후광을 입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들은
동방에서의 교리해석, 전례차이 등을 핑계삼아 로마의 수위권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동서 양교회가 분리될 소지를 만들어 갔다.
② 중세교회 :
중세는 로마교황과 신흥세력인 게르만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게르만 민족들이 개종하고 교화되면서 서유럽에 많은 왕국이 형성되었고,
교황은 이들 신생국가들의 왕권에 직 간접적으로 간여하면서
왕권의 후견인 노릇을 하였으나, 왕권이 비대해지고 교권에 간섭이 심해지자
교회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양자의 충돌이 일어났다.
8세기 프랑크왕국(칼대제)이 서유럽의 황제로 대관되어 교회를 옹호하면서 교권에 깊이 간여하였다.
962년에는 동프랑크(독일)오토대제도 개종하여 황제로 대관되고
소위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함으로써 교권에 간섭하였다.
이렇게 7, 8, 9, 10세기의 교황들은 정권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며 수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특히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주교서임권에 관한 왕권과의 다툼을 초래하여 교회는 더욱 암담한
상태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로마교회는 꾸준히 교세확장에 힘써 7세기에 스페인, 8세기에 독일, 9세기에
슬라브족과 스칸디나비아족, 10세기에 폴란드와 러시아, 11세기에 유럽 대부분을 그리스도교화 하였다.
교황(그레고리오 7세)의 집요한 투쟁으로 11세기(1054년)에 이르러서야 교권을 왕권에서 해방시켰다.
<정리 우암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