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었다. 외국에 돈벌러 나갔다는 어머니의 슬픈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 순수함을 7살이 될 무렵부터 잃어버렸던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없다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토요일 오후,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그네를 밀어주던 다른 '아버지'들의 모습은 늘 내겐 부러운 광경이었는데, 어린 아들의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지금의 키에 반도 안되던 꼬맹이 시절, 어머니는 자주 나를 놀이터로 데리고 가셨다. 지금도 앨범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어머니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네를 타고 있는, 해맑은 얼굴의 한 꼬마아이를 담은 사진ㅇ르 보고 있으면 서글픈 쓴웃음이 나온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또한 금전적인 문제와 연결되었다. 당장 다음달에 필요한 생활비 문제는 어머니를 늘 걱정과 한 숨 속에 가둬두었고, 얼마되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은 어머니와 나를 친가 사람들과 꽤 오랜 세월 담을 쌓고 지내게 만들었다.
남편이 없다는 외로움과 당장 먹고 살 걱정, 하나밖에 없는 어린 아들의 불투명한 미래는 어머니로 하여금 긴 세월을 거치면서 웃음을 잃게 만들었고, 그녀를 지치게 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옛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도 늙지 않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허나, 그것은 너무 일찍 늙어버려 이젠 늙을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른 채 던지는,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칭찬 아닌 칭찬이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어머니는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신다. 스무 해 남짓 살아오면서 나 역시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사람의 얼굴에서 약간이나마, 세월을 읽을 줄 알게된 무렵부터는 어머니가 더 이상 늙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그렇게 어둡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닌 채, 그러나 따뜻함과 엄격함을 읽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그런 얼굴로 나를 키워오셨다.
그녀는 강인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장티푸스로 심하게 앓아누웠을 때에도, 첫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에도, 그리고 내가 군에 입대할 때에도 그녀는 눈물 따위를 흘리는 여린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는 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무서운 어머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를 생각하니 참 죄송스럽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였기에 나를 더욱 아프게 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시절까지 어머니와 나는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전셋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넘게 우리 모자(母子)는 '우리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이 실현된 것은, 어머니의 검소함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그리고 보잘것없던 아버지 명의의 논 한 마지기가 값이 뛰었던 91년 겨울의 일이었다. 친할아버지, 할머니 내외가 사시던 시골집을 비롯해 비록 크지 않은 면적이었지만,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하고, 운전일을 하면서 어렵게 모은 논 몇 마지기는 이미 작은 아버지들과 큰 아버지가 챙겨간 이후였고, 별 볼일 없이 남아있던 조금만 땅하나가 그나마 우리 모자(母子)가 살 아담한 아파트 한 켠을 마련해 주었다.
그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우셨다. 비로소 내 집, 우리집을 가졌다는 기쁨에 그녀가 눈물을 흘린다고 착각했던 나는 글쎄, 어렸던 것인지, 아둔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제사를 10번도 넘게 혼자 준비하면서도 단 한 차례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그 날 우셨던 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생만 하다간 남편이 못내 안쓰러웠던 까닭이었다. 죽기 전날 저녁에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냉장고를 사드려야 한다고 걱정했다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그는 다 떨어진 점퍼 하나를 걸치고 운전대를 잡았었단다. 어머니는 마지막 가는 날까지 내 집이라는 곳에서 살아보지 못했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아들녀석의 걷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그가 갑자기 안쓰러워 지셨던 거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사하던 그날은 크리스마스였고, 더욱 신기하게도 그 날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15주면 결혼기념일이었다. 눈발까지 날리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하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제삿날엔 안개처럼 짙은 외로움과 끈적이는 침울함이 싫어서 애써 밝아지려고 노력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제사는 늘 어머니와 나, 둘의 몫이었는데. 가끔씩 외삼촌들이 찾아오는 일은 있어도 친가식구들은 찾아오는 일은커녕, 전화 한 통했던 날도 없었다. 참으로 무심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부부가 갖는 일상의 행복, 하늘은 그 평범함 속의 행복조차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주말이면 가끔 한적한 공원에도 나갈 줄 아는 부부간의 여유, 생일이면 장미꽃 한 다발이라도 받을 수 있는 특권, "힘들었지?"라고 묻는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어머니에겐 사치였고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었다. 펑펑 울고싶을 때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상한 남편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아닌, 어린 아들녀석이 볼세라, 사진 속의 남편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속으로 슬픔을 씹어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한스러움과 외로움, 서러움은 그렇게 어머니의 지난 20여 년을 묘사하는 주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5살쯤 되었을 무렵,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수산나'라는 세례명으로 한동안 열심히 성당에도 나가셨던 어머니 덕분에 나도 세례명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집에 들어서면 정면에 걸린 단아한 모양의 십자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수년 전부터 성당에 나가질 않으셨다. 굳이 따져보자면 아버지의 얼마 되지도 않은 유산문제로 친가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였다. 철이 들고나서 나는 어머니께 그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엄마는 미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단다. 그게 죄악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엄마는 그 사람들이 쉽게 용서가 안된단다..... 이런 마음의 칼을 지니고 성당에 나가 십자가를 마주하면 뭐하겠니......"
식당일, 청소일, 심지어는 만두공장에서 만두 만드는 일도 하셨던 어머니가 아는 분의 소개로 재작년부터 성당에서 일하신다. 신부님이 거처하는 사제관에서 일종의 가정부와도 같은 일을 하시는데, 매일 두 분의 신부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어머니는 고집스럽게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렇게 용서가 안되는 것들이 많으신 걸까...... 그런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가 더욱 안쓰러울 뿐이다.
어머니는 다른 대다수의 홀어미나들이 그렇듯 내가 판사나 검사, 혹은 의사와 같은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시집식구들에게 홀대를 받은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과 못 입고 못 먹고 고생만 하다 가버린 아버지, 그리고 그런 남편 때문에 고생스런 청춘을 보낸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잘 되기를 늘 기원하셨다. 그저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정작 나는 판사나 검사와는 전혀 다른 길, 다른 전공을 택해 대학을 와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는 어머니를 보면 괜스레 죄송스러워진다. 분명 무언가 큰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나태해지고 어머니의 희망에 대해 무뎌져 가는 내 자신을 보면 또 한심스러워진다.
새로운 대학 생활에 대한 낭만 아닌 낭만으로 정신없이 보냈던 지난 2년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나는 지금 군대라는 곳에 왔다. 여전히 어머니는 나를 못내 걱정하면서, 먹고살기 위해, 나를 가르치기 위해, 성당에 나가시고 계시지만,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서신 어머니가 왜 그렇게 안쓰러운지 모르겠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한시름 놓고 여유로운 중년을 보내도 우울증이다, 뭐다 하는 풍요로운 세상에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버린 채, 무심하게 떠나버린 남편의 하나 남은 핏줄을 키우는 그녀가 너무 안쓰럽다. 그 수많은 외로운 밤들을 무슨 생각을 하며 보내셨을까. 생각할수록 어머니께 무심하게 살았던 지난 세월이 부끄럽다.
어머니 못지 않게 혼신의 힘을 다해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또 있다.
어머니의 막내 여동생인 이모다. 막내 이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 어머니와 나와 함께 살았다. 이젠 이모도 4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처음 이모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는 이제 막 스무살이 된,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젊은이였다. 참 예뻤다고 한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걸 보면 맞는 말 같다.
이모는 외삼촌이 경영하는 극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나중엔 외삼촌이 경영하는 다른 회사에서 죽 근무했었고, 그간에 모은 얼마간의 돈으로 지금은 혼자 독립해서 아담한 식당을 운영하신다.
20년 넘게 함께 살아와서 그런지 이모는 이제 거의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내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었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많이 예뻐하셨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이모는 늘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표되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릴 적 나는 그런 이모의 성격이 호랑이띠라서 그런다고 생각했었다.
이모는 여자답지 않은 호탕함과 대범함으로 주위사람들이 늘 어려워하면서도 믿고 따르게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외삼촌의 사업을 도와드리면서 이모가 만난 사람들은 모둔 이모가 하는 일에는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이끌어내는 카리스마, 흐트러짐 없는 말끔함, 내가 판단하는 이모의 모습이다. 그런 이모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엄격함과 자상함의 조화, 그리고 칼 같은 냉철함과 자기절제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어도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들처럼......
이모는 독신주의자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중매와 선 자리도 다 물리치고 혼자 살고 있다. 결혼에 대해 핑크빛 환상을 가지기 보단, 능력 있으면 혼자 산다는 당당함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어미나와 이모를 함께 모시겠다 하면, 코웃음을 치며, 네 어머니나 잘 모시라고 한다. 자기는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세월의 무게는 우리가 잠시 그것을 잊고 지내는 사이, 갑자기 무거워져 더 이상 들 수 없게 된, 집채만한 바윗돌 같은 거다. 감광막 밖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버지 옆에 앉은 어머니의 20년 전 얼굴에서는 발견하지 못할 세월의 무게를 지금의 어미니 얼굴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잇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서 생긴 것이 아닌, 홀로 살아오신 지난 시절을 증명하는 화석이요, 고생스러운 당신의 인생을 보여주는 영사기다. 결코 약해진 것이 없었던 당신의 존재를 표정과 눈빛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홀로 나를 키우겠다고 결심했던 것에 후회를 느낀다면 이미 나는 그녀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게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부모를 '자식이라는 화살을 쏘아 올리는 활'이라 표현했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아들을 어떤 과녁을 향해 쏘아올리셨는지 무지하고 철없는 나로서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단지, 그저 높기만 한 과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알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과녁,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과녁이리라 믿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쏘아 올린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외롭게 지켜봐 줄거라 믿을 뿐이다. 어머니나 이모가 생각하는 과녁이 어떤 건지 몰라도, 그들이 맞추고자 했던 과녁을 향해 되도록 반듯하게 날아거련다. 바람이 내 행로를 바꾸려 해도, 날아가다가 때로 지치더라도 그들이 믿는 만큼, 나 역시 그 믿음에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련다. 내가 아직 그들의 믿음을 잊지 않음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발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에 대해 어떠한 신화를 입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어머니가 밟아오신 지난 20여년, 나를 지켜봐 준 지난 세월이 그만큼 치열했을 뿐이고, 나는 담담하게 그러한 어머니의 잃어버린 청춘을 읊어 내렸을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지친 일상으로 잠시 사그라진 어머니에 대해 존경과 사랑을 다시 불붙이기 위함으로 나는 이 글을 써내려 간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곧 신화이다. 굳이 어머니의 삶을 꾸미지 않아도, 어머니의 삶은 곧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평범함에서 격리된 내 어머니의 삶도 이젠 자신이 믿고 지켜낸 아들에게만은 추앙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도 나를 걱정하고 지켜봐 주실 어머니께 오늘은 전화나 한 통 드려야겠다. 못난 아들, 잘 지내고 있다고...... 그리고 무서운 이모에게도.
소속 : 제 28 보병사단 81연대 2대대 8중대
계급 : 이병
군번 : 01-73062578
성명 : 류현우
보직 : 주임원사실 행정병
입대일 : '01년 12월 4일
전입일 : '02년 1월 18일
보직일 : '02년 3월 14일
전역예정일 : '04년 2월 3일
주민등록번호 : 800724-0657617
생년월일 : 1980년 7월 24일
주소 : 광주 광역시 부구 운암동 미라보 3차 아파트 305동 1304호(우편번호 : 50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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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 한양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2년 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