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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 군대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장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가 이슬람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 |
16세기부터 서구가 몰려올 때까지 이슬람 세계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오늘날 이란 지역의 강자 사파비 제국, 인도 대륙을 지배한 무갈 제국으로 삼분되었다. 세 제국 모두 무슬림이 지배했고,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무갈의 경우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非)무슬림을 통치하는 형태의 제국이었는데,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삼분된 것을 보면 과거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79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이집트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이래 무슬림 문화권은 압도적인 서구 열강의 힘에 본격적으로 유린되었다.
‘유럽의 환자’로 불린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해체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장악했다.
이슬람 문화권
현대 무슬림 국가 중 서구의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곳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 이렇게 네 곳뿐이다. 왜 무슬림 세계에 반(反)서구 감정이 강한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이스라엘 건국을 서구 식민주의의 산물로 인식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영국 통치 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세계 6개 지역에 문화권을 형성해왔다.
첫 번째 지역은 우리가 쉽게 인지하는 아랍어권이다. 동쪽으로는 이라크,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모리타니아까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1492년까지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꾸란 덕분에 아랍어는 전 세계 무슬림들이 늘 익히고 있는 언어다.
정치 경제적으로 말하면 아랍어 지역은 서기 1000년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오늘날에는 알라의 선물인 석유 덕에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서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과 이라크, 오만, 예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 아라비아 반도 국가, 아프리카의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리비아, 서(西)사하라, 모리타니아 등이 아랍어권을 이룬다.
두 번째 지역은 페르시아어권이다. 7세기 아랍 무슬림들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래 페르시아어권은 무슬림 문화권의 일원이 되었다.
정복당한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1000년 이래 페르시아어는 정치, 문화언어로 이슬람 세계를 아울렀다.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부가 이에 포함되고, 페르시아어인 파르시, 다리, 타지크어를 사용한다.
세 번째 지역은 터키어권이다. 터키어족인들은 원래 우랄 알타이 산맥에서 발흥한 유목민으로, 일찍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셀축이 비잔틴 제국군을 무찌르고 오늘날 터키 영토가 된 아나톨리톨리아 반도에 처음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터키어족 사람들은 이슬람 영토를 확장시킨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까지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지중해의 강국 오스만 투르크 역시 터키어족이다. 문화적으로 페르시아어권과 밀접하다.
터키를 위시하여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체첸, 위구르 등이 터키어권이다.
네 번째 지역은 인도 대륙이다. 무슬림 최대 인구 지역으로 약 4억7000만 명이 살고 있다.
이곳의 이슬람화 주역은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들이다. 국가로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네팔, 스리랑카가 이 문화권에 속한다.
언어도 다양하여 신드어, 구자라트어, 펀잡어, 벵갈어 등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언어는 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드어다. 16, 17세기에 지역 토착어가 페르시아어, 터키어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말이다.
다섯 번째 지역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수단, 서사하라, 말리, 소말리아, 이디오피아, 세네갈 등이 이에 속한다.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와힐리어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영향으로 생긴 무슬림 문화어다.
여섯 번째 지역은 말레이 지역이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를 위시하여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주요 무슬림 국가이고,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에도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한다.
언어로는 말레이어와 자바어가 사용된다. 이 지역은 13세기 이래 이슬람이 퍼져가기 시작했는데, 수피의 공헌이 컸다.
상기한 6개 문화권 외에도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아시아와 유럽, 미주 대륙에 존재한다.
원나라 시기에 전성기를 맞은 중국 이슬람은 17세기 이후 주요 저작을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와 같은 무슬림 전통 문화어가 아닌 한문으로 저작하는 등 무슬림 문화사상 독특한 사례를 남겼다.
특히 신(新)유학 전통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독창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유럽에는 오랜 무슬림 지역으로 알바니아, 보스니아가 있고, 마케도니아(이전 유고), 불가리아 지역에도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서유럽의 무슬림 공동체는 이민을 통해 커졌다.
독일에는 터키계 무슬림이, 영국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이, 프랑스는 이전 식민지인 아프리카 출신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슬람 종교의 특징
이슬람교는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이다.
유일신 신앙이 지닌 최후의 심판 사상은 현세를 올바르고 경건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사회정의 의식, 경건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내린 유일신의 계시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 내려진 계시의 연속이요, 재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꾸란은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를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먼저 경전을 읽고 있는 자들” 즉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이미 먼저 유다-그리스도교 경전에 기록되었음을 밝힌다.
천상에 모든 경전의 모서(母書)가 있고, 여기에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성서가 내려왔고, 이슬람의 경전 꾸란 역시 여기서 아랍어로 내려온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이 꿈꾸는 이상적 사회는 유일신을 믿고, 유일 경전이 있는 하나의 단합된 종교 공동체다.
▲ 서울 이태원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슬림들. 국내에도 무슬림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고, 박근혜 정부는 '제2의 중동 붐' 조성을 위해 '무슬림 프렌들리(Friendly)'를 외치고 있다. |
그러나 현실은 분열된 종교 공동체다. 누가 옳은지 최종 판단은 최후의 심판일에 신(神)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교는 유다교와 마찬가지로 정(淨)과 부정(不淨)을 엄격히 구분하기에 종교법이 발전했다. 예를 들어 피와 돼지고기는 부정하기에 생리중인 여성은 예배, 단식에서 제외되고, 피를 제거한 정한 고기만을 먹으며, 돼지고기 및 이와 관련된 소시지, 햄은 먹을 수 없다.
같은 유일신교라도 그리스도교는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법보다는 신앙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신학이 발전했다.
또 이슬람교는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만 인정하기에 신성(神聖)을 부인한다. 그리스도교 신관의 핵심인 삼위일체는 다신적 신관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같은 유일신교라고 해도 양측의 신관에 차이가 있다. 한국 무슬림이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을 한국 개신교에서 불편해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순니와 시아
이슬람 전통에는 크게 순니와 시아라는 두 분파가 존재한다.
순니는 ‘전통과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말로, 현재 세계 무슬림 인구의 87~90%를 차지하고 있다. 시아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퓨 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시아파는 전 무슬림 인구의 10~13%로 1억5400만에서 2억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다시 자이디, 이스마일리, 이마미 시아파로 나뉘는데, 이마미가 다수로 이란과 아랍 시아의 대다수가 이에 속한다.
시아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이란(6600~7000만 명), 파키스탄(1700~2600만 명), 인도(1600~2400만), 이라크(1900~2200만) 순으로 집계된다.
이슬람이라는 큰 틀에서 순니와 시아는 공통의 신앙을 공유한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 최후의 예언자, 꾸란, 부활과 최후의 심판, 근본적인 의무(예배, 단식, 순례, 희사, 성전 등)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른 점이 없다.
소소한 의례의 차이는 있지만 순니와 시아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이름이 다른 두 그룹이 존재한단 말인가?
순니와 시아의 분파는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死後) “누가 공동체의 지도자냐?”라는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후계자의 기능에 대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순니파는 무함마드를 잇는 지도자를 단순히 칼리파, 즉 대리인으로 본다. 순니의 칼리파는 무함마드 이후 20세기 초 터키가 폐기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칼리파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로 이어진 4명의 정통 칼리파다.
반면, 시아는 순니의 4대 정통 칼리파 중 알리만을 인정하고 그의 후손을 이맘으로 따른다. 이들은 비밀 지식의 소유자로 교의를 해석하는 최고 권위자다.
순니의 칼리파가 정치적이라면, 시아의 이맘은 정치적이자 교학적인 힘을 동시에 지닌다.
따라서 순니와 시아의 분파는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순니와 시아의 분파를 중세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에 비교해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항거나 개혁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리와도 다르다. 다른 언어와 문화로 인한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이 시아 국가이기에 시아 이슬람을 아랍 이슬람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민족운동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이 따지자면 알리는 아랍어를 쓰는 아랍인이었고, 시아 운동은 아랍인들이 시작했으며, 이맘들이 모두 아랍어를 쓰는 아랍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명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7세기 무함마드 종교 체험 이래 이슬람 세계는 자신감이 넘치는 문명을 창출했다. 그리스, 페르시아 선진 문명과 문화를 주저하지 않고 흡수하여 이슬람화 했다.
찬란한 문화, 인문과 과학의 발전은 눈부셨고,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의 위세는 당당했다. 신은 언제나 무슬림 편에 계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확신과 자신감에서 타 종교인들에 대한 관용의 폭은 그리스도교 세계보다 훨씬 컸고, 이런 포용성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선순환을 이뤘다.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은 2등 시민이었다.
이들은 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없었고, 종교 건물을 증축하거나 보수하지도 못했지만, 선교활동을 하거나 이슬람을 비방하는 중죄를 짓기 전에는 박해 받지 않고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절대적인 자유는 아니지만,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에 살던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무슬림이 지배하던 스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에 살았더라면 유다인 대석학(大碩學) 마이모니데스라는 인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보다 이슬람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로웠다.
이슬람 문명은 중세의 선진 문명이었다. 중세 최고의 도시는 바그다드였다.
시실리의 경우 무슬림 통치가 끝난 후에도 그리스도 정복자들이 아랍어와 이슬람 문명을 라틴보다 더 우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이슬람 문명은 당시 선진 문명으로 우대 받았다.
무슬림들은 그리스 의학, 과학, 철학을 계승 발전시켜 이를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전해 줬다. 오늘날 서구문명의 개화에 결과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이슬람 문명을 ‘중간자 문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서구가 잊고 지낸 그리스 문명을 전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서구와 이슬람 문화권
근세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 문화권을 식민 지배하기 전까지 유럽인들에게 무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인문, 과학, 문명을 모두 움켜 쥔 무슬림들의 허락 없이는 단 한척의 배도 지중해에 띄울 수 없게 된 동서 로마 제국은 이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외에 또 다른 막강한 유일신교가 나온 것은 신학적으로 이해 불가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슬람 태동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아브라함의 몸종이자 첩인 하갈의 자식들인 무슬림은 야만인이요, 무찔러 없애야 할 적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와 아랍 유목민을 지칭할 때 썼던 사라케노스라는 그리이스어에서 나온 사라센 이라는 말이 무슬림을 부르는 말로 전용되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충돌은 십자군 전쟁이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해 유럽인들이 총 8회에 걸쳐 십자군 원정을 단행, 1099~1187년, 1229~1244년 간 잠시 예루살렘을 지배했다.
무슬림 세계에서 서구의 십자군 전쟁이 조직적인 종교전쟁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한 것은 근대에 들어 무슬림들이 서구에 유학하면서부터다.
이후 십자군이라는 말은 종교적 상징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서구의 침공을 가리키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을 9차 십자군,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10차 십자군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역시 십자군의 공격으로 간주되었다.
이슬람 세계에 자선 사업을 하러 온 것이 아닌 이상 서구 열강은 정치 경제적 압력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꼼꼼히 챙겨갔다.
이를 무력하게 지켜 본 무슬림들이 서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근대 이후 무슬림들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자고 일어나보니 이제 세상은 무슬림의 것이 아니라, 과거 이슬람 세계에서 2등 시민으로 무슬림들의 보호 하에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이 좌지우지하는 무대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 이후 이슬람 세계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된 이래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서구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2등 시민으로 보호받고 살았던 유다인들에게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자 무슬림들은 절망했다.
이러한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사건은 제3차 중동전쟁, 제1차 석유파동, 이란혁명이다.
두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아랍 무슬림들은 1973년 10월, 3차 중동전쟁에서 초반 선제공격으로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3차 중동전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무슬림 산유국(産油國)들이 석유를 무기 삼아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에 석유 수출 금지 조처를 취했고, 결국 미국은 이에 굴복, 대(對)중동 정책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란 혁명은 서구식 모델이 아니라 이슬람식으로 사는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현실로 보여줬고, 무슬림들은 이에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옛 영화를 되살리는 길은 초기 이슬람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이슬람 내에서 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오늘날 과거 회귀적인 행동을 하는 폭력주의적 극단주의자들의 행위 역시 이러한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동 무슬림 세계의 미래
자칭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이하 IS)’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극악무도한 살상행위로 인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저리도 비인간적인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할 수 있는가? 저런 것이 진짜 이슬람의 진면모인가? 부정적인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무슬림 세계에서도 개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IS의 행태는 일반 무슬림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도저히 같은 신앙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에 이슬람이라는 말조차 붙이기 싫어한다.
그래서 이슬람도 국가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랍어와 이란어에서는 다이시라고 부른다. 이슬람 국가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앞글자만 딴 것이다.
IS에 동조하는 무슬림(이슬람교인)이 얼마나 되는지 추산할 길은 없지만 대략 1% 내로 보고 있다.
▲ 외국인 납치, 참수 살해 등 극악무도한 살상행위를 저질러 이슬람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IS 대원들. 이슬람 세계에서도 IS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
물론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여하튼 그보다 더 적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이슬람의 앞날은 어둡다.
언제까지 미국의 개입만 바랄 수도 없다. 중동 무슬림 국가들이 군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아시아로 관심을 돌리면서 중동 무슬림 국가를 둘러싼 정치 변동이 무엇 하나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고 더 시끄러워지는 느낌이다.
미국은 셰일 오일과 셰일 가스 채굴 원천기술을 지니고 있고, 이를 통해 숙원이던 에너지 자급자족의 꿈을 이뤘다. 이것은 곧 중동의 에너지 자원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중동보다 더 급한 것은 중국이 더 강국으로 부상하기 전에 막는 것이다.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이다.
완전히 떠나지는 않겠지만, 미국은 시급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중동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보조 역할을 하려 할 것이다.
지난 10년 이상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으며 전쟁을 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에 지나지 않았던가.
어쩌면 미국의 조심스러운 행보에 중동은 시아파 이란과 순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파열음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긴장 속에서 균형을 찾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무슬림들의 표현을 빌려 글을 맺고자 한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인샤알라)이고 신만이 아실 것이다(알라후 아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