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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6편 1-8절
찬송 / 427장 · 내가 매일 기쁘게
성서 / 열왕기상 22장 6-17절, 마태복음 7장 13-20절
말씀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습니다.(열왕기상 22장 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 7장 13-14절)
이제 초여름인데 날씨가 너무 더워졌습니다. 요즘에는 무더위에다가 미세먼지까지 겹쳐서 몸도 마음도 영 개운하지 않지요. 이럴 때는 맛 있는 음식이라도 챙겨 먹어서, 입맛도 살리고 힘을 좀 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맛있는 식당을 찾으려 하면,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진짜 맛있는 집, 정확하게는, 싸고 맛있는 집을 만나기는 참 어렵지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는데, ‘오늘은 뭘 먹을까’ 언제나 이게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가 식당을 선택할 때 실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식당에 손님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식당에 유난히 차가 많이 서 있다면, 그 집이 맛집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이라면 틀림없이 맛집일 것입니다. 맛있는 집에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사람 많은 집으로 가라, 마땅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에 가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을 피하고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널찍한 길이 아니라 비좁은 길로 가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크고 화려한 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작고 초라한 문이지요.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또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넓고 평탄한 길, 이른바 탄탄대로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아주 비좁고 험한 길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길로 가고 싶습니까?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싶어 할까요? 당연히 넓고 큰 문입니다. 널찍하고 평평한 길이지요. 그래서 넓은 문과 널찍한 길에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립니다. 좁은 문에는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좁고 옹색한 길을 걷는 사람도 많지 않지요. 그러니 우리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모름지기 대세를 따르는 게 안전하고 무난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비좁고 험한 길로 걸어가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넓은 문, 크고 화려한 문,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그 문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 그 길이 비좁고 험해서 사람들이 피하는 그 길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멸망의 문이 아니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을까요? 어째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비좁고 험하다는 말입니까? 반면에 왜 넓고 평탄한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일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개구멍 같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비좁고 험한 길을 가느라 말 그대로 개고생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니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우리가 평안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왜 크고 넓은 문이 멸망에 이르는 길일까요? 사람들이 멸망의 문으로 몰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 예언자들’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바로 뒤에는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거짓 예언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으로 사람들을 유혹할까요?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큰 문으로 유혹하고 널찍한 길로 미혹합니다. 이들은 달콤하게 말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언제나 참 은혜롭게 말합니다. 이 큰 문으로 들어가라고, 이 너른 길로 걸어가라고, 꼬드기지요. 그들의 말뿐 아니라 그들의 모습도 거짓입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온순한 양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피에 굶주린 늑대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거짓 예언자들의 겉모습에 속아서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없지요. 사람들은 그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들을 메시아라고 믿고 맹종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정말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거짓에 속아서 그들에게 떼 거지로 몰려가고 맙니다.
그런데 이 ‘거짓’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거짓은 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거짓은 항상 ‘크게’ ‘넓게’ ‘화려하게’ ‘그럴듯하게’ 꾸민다는 것입니다. 거짓일수록 더 그럴듯하게 치장합니다. 세상에 사기꾼치고 ‘작게’ ‘험하게’ 꾸미는 사기꾼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거짓은 언제나 크게 부풀리고, 넓게 펴고, 화려하게 꾸밉니다. 얼굴도 바꾸고, 학력도 바꾸고, 가방도 바꾸고, 가족도 바꾸고, 종교도 바꾸고, 자기 뇌마저 바꾸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거짓에 현혹당하고, 거짓에 열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황당무계한 거짓에 몰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크고 넓고 화려해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열왕기상에서 아합왕 때의 예언자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공동의 위협이었던 시리아를 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시리아를 치기 전에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에게는 400명이나 되는 많은 예언자가 있었지요. 그 예언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쳐들어가도 된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듣기 좋은 대답입니까? 왕의 마음에 꼭 드는, 듣고 싶었던 대답이 아닙니까? 400명이나 되는 예언자들이 다 그렇게 말하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유다의 왕은 아합왕에게 혹시 이 예언자들 말고 다른 예언자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합왕에게는 다른 예언자가 있었지요. 딱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예언자는 왕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예언자였습니다. 미가야라는 예언자였지요. 그래도 유다 왕이 원하니까 그를 불러서 시리아를 쳐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왕이 미가야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괜히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괜히 직언했다가 격노하면 큰일 난다고, 미리 조언을 해주었지요. 그래서 미가야는 왕의 물음에 건성으로 두루뭉수리 대답했습니다. 아합왕은 그에게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쳤지요. 그러자 미가야는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400명이나 되는 예언자들은 모두 왕이 좋아하는 말을 하고, 단 한 명의 예언자는 왕이 싫어하는 말을 했습니다. 400명은 쳐들어가라고 하고 단 한 명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400 대 1입니다. 아합왕은 누구를 따라야 할까요? 어떤 예언자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어느 예언이 진실이고 어느 예언이 거짓일까요?
아합왕은 많은 쪽을 택했습니다. 크고 넓고 화려한 것을 따랐습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널찍하고 평탄해 보이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합왕이 들어간 그 크고 넓은 문의 끝에는 파멸이 있었습니다. 아합왕의 파멸은 참으로 끔찍했지요. 아합왕은 시리아 군대와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살아남기 위해 변장을 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다 피했다 싶었을 때, 누가 쏘았는지도 모르는 화살 하나가 날아왔지요. 아합왕은 그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지요. 그가 죽으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의 갑옷을 연못에서 씻을 때 개들이 달려들어 그 피를 핥았을 정도였습니다. 아합왕이 선택한 크고 넓은 문은 멸망의 문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언제나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외쳤을 뿐 아니라 예언자들 자신도 좁은 문으로 들어갔지요. 예언자의 대부라 불리는 엘리야는 혼자서 850명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샅샅이 누비며 찾아도 바르게 살려는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하면, 오백 원이 없어도, 물어야지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허망하고 허섭스레기 같은 거짓에 몰려가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하지요. 사람들이 큰 것을 좋아하고, 넓은 것에 환장하고, 화려한 것에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뭐가 옳은지, 뭐가 진실인지 묻지 않고 다만 큰 것에 목을 매고 있을 때,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을 유혹하는 게 얼마나 쉽겠습니까?
예언자 에스겔은 거짓 예언자들을 정말 신랄하게 저주하는 예언자지요. 그런데 에스겔은 거짓 예언자들을 저주하다가, 그들의 어이없는 거짓에 홀랑 넘어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며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에스겔은 묻습니다. “왜 어찌하여 세상에 거짓 예언자가 이리도 판을 치는가?” 그리고 에스겔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예언자를 그저 악기나 뜯으면서 구성진 목소리로 사랑 타령이나 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참 예언자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저 인간의 비위나 살살 긁어주며 추악한 욕망을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에게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은 이미 즐거이 거짓에 속아 넘어갈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비좁고 험한 길로 가라 하셨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어렵고 험한 쪽으로 택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무슨 고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앙드레 지드가 고민했던 ‘인간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만을 선택하는 금욕적 신비주의’를 따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문이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좁은 길로 가야 하는 것은 그 길이 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길이 正道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이 생명의 문이요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가기를 바라십니다.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 소위 이단 사이비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한때 천만 신도를 자랑하던 기독교인 수가 지금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 적어도 200만 이상이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비’라는 게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비슷한데 아니다, 그 말이지요. 진짜가 아니라 거짓이다, 그 말입니다. 가짜가 200만 이상이라면 정말 많지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봅니다. 가짜가 200만이라는데, 그렇다면 진짜는 얼마나 될까요? 가짜가 200만이니까, 진짜는 800만이라는 걸까요? 그렇다면 정말 많은 것이 아닐까요? 엘리야 때 850 대 1이었고, 미가야 때 400 대 1이었지요. 예레미야는 바르게 살려는 사람 하나를 찾으려고 그리도 헤맸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정작 바른길로 가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800만이 있다면, 이건 많아도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허황하고 거짓된 큰 문이 아니라 작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그것입니다. 아니지요. 내가 지금, 우리가 지금 크고 넓고 화려한 길이 아니라 작고 비좁은 길로 걸어가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많으냐 적으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작은 무리일지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한 사람으로도 예루살렘 성 전체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가고 있는 탐욕과 멸망의 길이 아니라, 비록 작은 사람들이지만 함께 생명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저 로마의 길을 거슬러 좁고 험한 길로, 골고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좁은 문으로 들어가셔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생명의 문이 되셨습니다. 친히 비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셔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문이요 우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문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길로 함께 걸어가자고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노래하며 좁은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