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 3장 7절 - 14절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되 목적을 두고서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의 집에 일해주러 갈 때 자신을 일하라고 부른 사람의 뜻과 목적을 무시하고 아무 일이나 열심히 하고 돌아 오면 다시는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일하는 사람으로 부른 사람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때 다음에 또 일꺼리가 생기면 찾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판단기준으로 판단해서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을 나눕니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 큰 성과를 거둔 사람들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참으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갔는냐 하는 것은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보기에 도드라지지 않는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그런 일로 부르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싫어하고 꺼릴 것입니다. 아무리 그 목적의 성취를 이루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일꾼은 자기를 드러내는 그런 일만 찾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그 분의 기쁨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부르신 그 분이 영광받으시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새로운 믿음의 민족을 세우시려는 그 목적을 알고서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자신을 주인공이 아닌 나그네로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한분 만으로 만족하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목적인 믿음의 민족을 세우는데 동참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일꾼들까지도 모두 신앙의 인물로 키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란에 갔던 종을 보아도 이방인이 참으로 신앙의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신앙공동체를 세우는데 주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족장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마지막 족장으로 평가받는 요셉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민족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면서 애굽사람들과 동화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고센지역을 중심으로 애굽사람들과 구별되는 신앙공동체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는 세례요한을 보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광야에서 나와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선포하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과 하나님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이키게 하고 그러므로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향하게 하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향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죄와 하나님을 향한 무지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세례요한은 일반적인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심판의 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 오시기 전에 먼저는 구속의 주요 구원의 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한 그리스도와 다른다는 것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어 겸비함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자 하는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조차 받지 않는 더 악한 자들도 있는데 그럼에도 세례를 받고자 나아 온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은 살모사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라기 위해서 부모를 잡아먹는 독사를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낳으신 하나님을 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래엘백성들은 스스로 생각하길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라고 여겼는데 세례요한은 그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삼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죄에서 당장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적받으면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에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앞에 서 있으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끝내 회개치 않는다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신다고 말합니다. 돌들은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치부하는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은 끝내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을 떠나시고 오늘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로 하나님의 백성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러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이를 듣던 이스라엘백성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자비를 말합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본질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만족했습니다. 성전에서는 연기가 쉼없이 피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비를 따라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시오실 예수님 그 예수님의 임박한 심판하심을 바라보고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야 합니다. 몇가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형식들을 잘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자비의 회복이요 성결의 회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