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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보는 곳이 있습니다. 풍경을 보러 가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볼 일이 있어서 갈 때도 있습니다. 그 볼 일이란 것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면 장소에 변화가 있든지 없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매우 낯설어집니다. 장소는 익숙한데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사무실을 찾아온 손님이 안을 들여다보더니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어 아무도 없네.’ 그러면 거기 앉아서 일하는 직원은 사람이 아닌가요? 자기가 찾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그곳은 자기에게 낯선 곳이 되고 맙니다.
한 주간 정도 고생하다 더 참을 수 없어 예전에 치료받았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꺼려했는데 너무 아파서 열일을 제쳐두고 갔지요. 그 사이 사람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19 때문에 치료실도 일부 사용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당연히 그곳 담당자들도 자리에 없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마음까지 휑하니 비어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주 낯선 곳을 방문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음에는 어떻게든 다른 곳을 찾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습니다. 더 나은 곳을 찾기를 바랍니다. 당장은 고통을 조금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네요. 힘든 시기이니 설날 기분도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달력 속에서나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튼 건강하게 행복한 한 주를 맞으면 좋겠습니다. ^&^
2021년 2월 6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1-31주일설교(전능하신 자 하나님)
성경 시편 50 : 1 - 5 2021년 1월 31일
설교 : 전능하신 자 하나님 김종우 목사
교회를 오래 다니고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당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1 더하기 1이 왜 2야? 하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연한 것을 질문 받을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사실 우리는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을 뭐하려 질문합니까? 예를 들어서 구구단을 외웁니다. 거기에 의문을 달 여지가 있습니까? 이이는 사, 그게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오팔 사십, 그게 이상합니까? 사실 수학의 세계에서 의문을 가진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일지 모릅니다. 우선 수를 센다는 것부터가 서로의 약속으로 시작된 것이기에 질문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숫자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약속을 설명해주면 될 것입니다. 서로 약속한 것이니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싫다면 말 그대로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숫자에 대하여 이의를 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약속은 소중하고 또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경험합니다.
당연하지만 아니 당연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당당하게 소개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자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당연한 명제입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소개하십니다. 창 17 : 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오늘 시편 기자도 말합니다. 시 50 : 1 “전능하신 자 하나님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그런데 얼마 전 한 청년에게서 불듯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전능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앞날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셨나요? 마귀 뱀조차 없애지 못하십니까? 마귀가 유혹하리란 것을 모르셨나요? 따먹지 말라고 하기 전에 따먹을 수 없도록 할 수는 없었나요?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셨지요?
좀 당황하였습니다. 전능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론상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구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람의 말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실 수 없는 것이 있고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없습니다, 등등.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당연하게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안하지만 저 자신의 한계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아시고 하셨는지 모르고 하셨는지 저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아담의 문제가 시작은 아니거든요. 그 전에 이미 다른 사건이 하늘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육계(육체의 세계)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영계(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성경에서는 영계를 하늘이라고 표현하고 육계를 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계신 영계 즉 하늘에도 많은 영물들 즉 천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시 103 : 20 - 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봉사하며 그 뜻을 이루는 일을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천사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도 합니다. 히 1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우리가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 수도 어마어마합니다. 단 7 : 9 - 10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다니엘이 꿈을 꾸며 이상을 본 것입니다. 하늘의 광경을 보았는데 하나님을 수종하는 자들 곧 천사들이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합니다. 그 수가 많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천천만만’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 14 : 12 - 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천사들도 그 수가 많으니 당연히 위계질서가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장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잘 아는 천사장으로는 가브리엘이나 미가엘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가운데 하나였던 자가 하나님과 견주려는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그를 가리켜 여기서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부릅니다. 겔 28 : 14 - 15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하늘에 있던 그가 불의를 드러냄으로 즉 하나님과 견주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그곳에서 쫓겨납니다.
일단 생소한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그룹’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떼거지’인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닙니다. 천사를 지칭하는 성경 속의 외래어입니다. 이어서 봅니다. 16 - 17절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자가 옛날 ‘하나님의 성산’에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아담을 불러 세우셨던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에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산’ 곧 거룩한 산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면 모두 거룩할 ‘성’이 붙습니다. 성민, 성전, 성경 등등.
땅으로 쫓겨난 그가 하나님의 피조세계인 이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질문을 당합니다. 아니 그럴 줄 아셨으면 그런 자를 창조하지 않으셨어야 하지요.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조금 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마귀가 차지한 땅을 회복하려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아담을 창조하셔서 에덴이라는 동산에 두십니다. 아담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놀라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사실 사명이면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만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아담이 마귀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한 번 질문이 나옵니다. 아니 그럴라치면 뭐하려 아담을 만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사람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서 하나님 뜻대로 마귀세계를 멸하고 하나님 세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등지리라는 사실을 모르셨나요? 그 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가요?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나아가 하나님의 자격도 없는 것 아닙니까? 예,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마귀에게 넘어갔고 그의 자손들은 다 그와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유전죄를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과 더불어 또 다른 약속을 하십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을 미혹한 뱀 즉 마귀에 대한 선고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결국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하는 예언의 말씀, 약속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왜 범죄할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창조하셨는가? 그런가요?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도적이나 강도 등 범죄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아마 그러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내 자식이라도 부모 마음대로 자라주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엉뚱한 짓을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지는 일이지요. 렘 7 : 30 - 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자녀를 제물 삼아 불사르는 일은 하나님이 마음에 생각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런 일을 버젓이 행한다는 것이지요. 누가요? 하나님 백성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찌 그런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예,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에 하나님은 마귀를 창조하실 마음도 생각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뛰어난 천사장들 그 가운데서 하나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마귀가 되어 땅을 점령하고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귀는 악의 대명사지요. 세상 모든 죄악과 악행의 원인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말입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사람들이 죽음과 그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애 3 :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당연히 당신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를 바라십니다. 설령 악인이 되었을지라도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겔 33 : 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아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당신이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아무리 철저히 한다 해도 100% 성취할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또 우리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원한다 할지라도 환경이 막을 수 있습니다. 소위 불가항력인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이나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런 저런 모든 사정을 이겨내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사정이 생긴다 해도 구애받지 아니하십니다. 그 모든 사정을 이기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삭의 임산부가 오늘과 같이 교통수단이 좋은 환경이 아님에도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그 몸을 이끌고 이동을 합니다. 얼마나 힘든 여행이었으면 도착하자 곧 출산을 하게 됩니다. 평소 같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여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려고 그 여행을 하도록 역사를 주관하셨습니다. 눅 2 :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당시 황제의 명령입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지요. 4 - 5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평소 같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명령입니다.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몸을 이끌고 그 여행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약속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십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상상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당초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창조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말 그대로 하나님의 꼭두각시나 로봇들이 존재하였겠지요. 그들에게는 오로지 ‘예’만 있을 뿐입니다.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격이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살았겠지요. 아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토록 평화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바라고 기대하신 평화일까요? 하나님이 마음을 주어 사랑하고픈 존재들일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은 사랑할 것도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랑해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삽니다. 그냥 알아서 다 하고 걱정스런 일은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기도할 일이 있을까요? 완벽한 세상, 완벽한 사람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완벽한 사람, 완벽한 세상을 만드셨는데 무슨 할 일이 있고 무슨 기도할 일이 있고 조마조마하며 신경 쓸 일이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그러한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그런 의문을 제기한 ‘나’라는 존재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세상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지으시고자 한 세상이 그런 세상이었을까요? 우리 자식이 전혀 반항할 줄도 반대할 줄도 모르고 자란다면 흡족하겠습니까? 그런 생각 안 들까요? 내 아이가 혹 바보 아냐? 부모와도 티격태격하며 말다툼도 하고 의견 충돌도 일이키고 마음 상하기도 하면서 화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며 살아야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 하나님 마음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 개인의 입장이라면 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모순과 갈등이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리고 저 자신 너무나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도 많습니다. 물론 철부지였을 때는 왜 나를 낳으셨느냐고 대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지라도 지금은 행복합니다. 내 마음대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고 저런 의문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지만 하나님께 반항하여 대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맘대로 해볼 수 있는 세상에 살아보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시 139 :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할!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아담의 씨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부딪치고 다투고 아프고 힘들어합니다. 비단 다른 대상들과의 다툼이나 갈등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 안에서조차 오락가락합니다. 사도 바울이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롬 7 : 18 - 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계속됩니다. 왜 그렇지요? 22 - 23절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유는 하나 곧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무기로 우리를 잡아매는 마귀가 우리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죄에서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생명입니다.(롬 6 : 23)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 죄 값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요. 이제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인 줄 알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죄 값은 치러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죄를 지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스스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계속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3 :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인정하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가지고 있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시니까 그것까지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시 50 : 4 - 5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누구를 판단하신답니까? 그 백성 곧 하나님 백성입니다. 신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히 10 :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런데 예수 천당! 하고 가만있을랍니까? 그러니 이 시대의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배우고 깨달아 지킴으로 우리의 소망 천국과 영생을 이루기 바랍니다.
<세 자매>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 남이 생각하는 나 그리고 내가 바라는 나. 사실 나라는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나면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랍니다. 자연히 부모의 영향이 가장 기본이고 가장 큽니다. 이어서 형제가 생깁니다. 위로든 아래로든 형제와 함께 자라며 역시 영향을 받습니다. 얼마간은 가족의 영향이 크고 또한 인생 살아가는 자료가 됩니다. 그 다음 차차 범위가 넓혀집니다. 여러 가지 공동체를 경험하지요. 사실 그 속에서도 영향을 받지만 또한 영향을 끼치며 성장합니다. 기본은 부모 형제 속에서 주고받은 언행과 사건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자기를 만드는 것들입니다.
보통 ‘나는 이런 사람이야’하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보다 나은 자기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남이 생각하는 나를 낫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서 성장하려는 노력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서의 일입니다. 소위 철이 들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전에는 또 그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남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남이 생각하는 나를 더 신경 쓰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가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디에 비중을 두느냐 그 차이가 있겠지요.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수가 많습니다. 종교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심은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위 믿음이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믿음 따로 삶 따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선한 결과와는 다르게 그냥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표리부동한 거죠. 거룩한 곳에서의 모습과 삶 속에서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사실 종교가 잘못은 아니지요. 그 신자라고 칭하는 사람의 개인적 특성일 뿐입니다.
종교가 가식을 장려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경전에 도적질하라고 되어 있겠습니까? 남을 미워하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와 예배할 때를 제외하고는 멋대로 살라고 권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단지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로 인하여 종교 자체가 욕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식은 신자들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영적인 지도자들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인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어느 신이 그러라고 이 땅에 지도자로 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신자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세상이 기대하는 바가 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동안 많이도 발전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양적 성장일 뿐 질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듯하여 걱정스럽습니다. 사실 백지 위의 검은 점은 분량은 적어도 뚜렷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니 이목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장점보다는 늘 단점이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열 가지 잘해도 하나 잘못하면 그것이 침소봉대되기 마련이지요. 이야기 속에 하필 왜 교회냐? 하고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만큼 자랐고 또 그래서 이야깃거리가 많으니 어쩌겠습니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 딸 ‘희숙’ 둘째 ‘미연’ 그리고 막내 ‘미옥’ 그렇게 세 자매입니다. 사실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진섭’이가 어쩌면 가정폭력의 대표적 희생자입니다. 다른 세 자매는 그래도 자기 인생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섭이는 그야말로 버려진 자식입니다. 어떻게 치료될지 어떻게 자기 삶을 만들 수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귀한 생명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또 그럴 생각만 있다면 길은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족이 함께 고민해주면 열립니다. 문제는 시간이 걸릴 텐데 누가 얼마나 감당해줄까 하는 것이지요. 다시 모인 세 자매가 끝까지 살펴주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이 그들이니 말입니다. 가족이니까요.
인생은, 요즘 같으면 당대로 끝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나 한 사람이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부모 훈련을 받고 부모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듣고 보는 것도 많고 자식도 많지 않으니 아마 옛날과는 많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아비로써 그리고 엄마로써 나 하나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가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대를 이어갑니다. 영화 ‘세 자매’(Three Sisters)를 보았습니다.
<캐스트 어웨이>
‘금방 다녀올게.’ 그것이 4년 걸렸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금방’이 4년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어련히 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 어느 날 닥칩니다. 일상이 사라집니다. 시간 자체는 여전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이 전개됩니다. 어쩌지요? 그저 생명이 아직 붙어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나요? 그럴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생명이 붙어있으니 그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어집니다. 해보지 않은 생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익숙하지 않으니 힘들고 짜증나고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혼자서 감당해야 합니다.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삽니다. 남보다 빠르게, 남보다 안전하게 배달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전쟁이지요. 그래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때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국제운송 택배 회사 ‘페덱스’ 직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세계를 누빕니다. 모처럼 애인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던 ‘척’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습니다. 사생활보다 ‘일이 우선’이라는 신조로 일하는 척은 연말행사를 기약하며 애인과 헤어집니다. 결혼반지까지 준비하고 청혼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일단 선물을 건넵니다. 그 날에 풀어보라고 부탁하고 작별합니다. ‘금방 다녀올게.’ 그리고 비행기로 달려갑니다.
악천후를 지나다가 결국 비행기는 바다로 추락합니다. 한바탕 소동을 지났지만 조종사와 직원들의 행방은 모릅니다. 깨어나니 한산한 모래사장입니다. 눈앞의 숲에 소리소리 질러보지만 반응은 없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와 파도, 휴가를 온다면 기막힌 휴양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가질 마음이 아니지요. 타고 있던 구명보트 하나 외에 가진 것도 없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일단 살아야 합니다. 문명과는 동떨어진 상태로 알아서 살아야 합니다. 여태 생각 없이 누렸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과 다르게 원시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산에 올라 확인해보기로 합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섬, 무인도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늘이든 바다든 무엇이든 지나가는 것이 있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모래사장에 글자를 써둡니다. ‘HELP' 혹시 구조대가 지나다가 보면 오죽 좋겠습니까. 해가 뜨고 지고 시간은 가는데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듯합니다. 아무튼 사람은 적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맨발로 다니다 천으로 덧대고 불도 만들어 사용합니다. 돌칼도 만들어 사용하고 물고기도 잡을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배송할 상품 몇 상자가 함께 떠내려 왔는데 축구공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얼굴 모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던집니다. 자기 마음이 처음에는 그랬지요.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그렇게 둘이 친구가 되어 지냅니다. 오랜 시간 후 저녁 무렵 멀리 수평선에 불빛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소리소리 지릅니다. 안 되겠다 싶어 구명보트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나갑니다. 온힘을 다해서 발버둥 치지만 밀려오는 파도를 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산호에 부딪쳐 보트는 찢어지고 몸은 여기저기 상합니다. 죽을 맛이겠지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그러나 이 무인도에서 아무도 모르게 시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떠내려 온 플라스틱 판자를 보고 생각이 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을 지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여기 이대로 앉아 포기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이 섬을 빠져나가야만 희망이 있다. 이제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때를 알게 되었으니 뗏목을 만들기로 하자. 여기를 나가야 뭐가 돼도 될 것이다. 여기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일단 해보자. 그래서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뗏목을 만듭니다. 그리고 물때를 기다려 드디어 바다로 나갑니다. 밀려드는 파도를 거슬려 나가는데 성공합니다. 멀리 그 동안의 보금자리였던 섬을 뒤로 하고 더 멀리 나아갑니다. 무엇인가 누구인가 만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뉴스가 터지고 사회적으로도 야단이지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반겨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신 없이 장사 지낸지도 한참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강권에 애인 ‘켈리’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까지 찾아갔어도 남편의 권고로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척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사람입니까? 목숨을 부지했던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아픈 사랑으로 오래오래 간직해야 하겠지요.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를 보았습니다. 2000년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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