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전쟁과 종교
불교의 혁신
김민웅(재미언론인)
이 글의 잡지에 소개한 당시의 배경:
1991년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걸프 전쟁(Gulf War)이 있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후유증으로 발생한 막대한 경제적 빚을 해결하고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1990년 8월 2일 산유국인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이에 1991년 1월 17일부터 2월 28일까지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했다.
전쟁과 종교의 관계는 그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불가분의 접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종족 또는 집단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종교적 표현은 언제나 “수호신”으로 나타나며 이는 선과 악의 명확한 양분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사실 어떤 종교이건 그 내부구조를 보면 악과의 전투를 깃점으로 하고 있으며 현실에서의 전투와 전쟁은 이의 외연으로 받아들여진다.
토템적 종교의식의 경우 이 수호신의 개념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데 가령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의 인간되기 경쟁에서 곰이 이기는 것은 각 동물을 수호신의 대표로 내세우는 부족간의 역학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개미를 수호신으로 삼거나 쥐를 수호신으로 삼는 경우는 문화인류학적 전거를 통해서 살펴보아도 없다. 이는 곧 종교가 그 공동체의 기본적인 안전수호의 심리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전쟁의 과정에서 그 종교의 영적 능력이 판가름 받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는 그 소속집단의 승리를 옹호하며 패배는 곧 그 수호신 자체의 패배로 인식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호신의 패배는 곧 그 소속 공동체의 정신적 기초가 해체되는 위기를 뜻하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쟁은 철저하게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 해석되는 동시에 절대승리를 절대승리를 위한 모든 종류의 잔인함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시각에서 악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한 전쟁은 곧 “성전(Holy War)"이 되며 전쟁의 수행은 신적 사명과 결부된 영광된 행위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번 중동전쟁(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관련해서 나타난 종교적 표현은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 이슬람지역의 입장에서도 성전이요, 서방기독교의 입장에서도 성전이라 양측 모두 종교적 의식을 통해 승리를 기원하였다. 특히 미국의 교회에서는 중동전 참가 군인들의 승리와 안전 귀가를 비는 기도회를 전쟁기간 중 계속 가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대체 이러한 종교적 집회는 그 진실의 얼굴을 보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살인의 정당화가 아닌가? 이편의 승리와 안전 귀가는 저편의 패배와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기원하는 종교, 그것은 곧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이상인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임에 다름이 아니다. 즉 그러한 종교적 소망은 이미 종교성을 포기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집단이념의 심리적 방치로 변질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또는 불교는 생명의 진리를 그 핵심으로 하기에 부단히 그러한 수호신적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불교는 중동전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가? 불교 역시 침묵 도는 방관함으로써 우주적 생명의 사슬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하지 않았으며 중동지역의 중생들이 고해에 허우적거리는 것을 외면하였지 않은가. 이러한 지적과 비판에 과연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은 그 과정에서 만이 아니라 종결된 이후로도 숱한 비극을 낳는다. 6.25전쟁이 끝난지 40년이 지나는데 그 상흔은 아직도 우리 민족을 짓누르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숱한 중동민들이 그 상처의 비통함속에서 앞으로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이 메어진다. 피난의 행렬, 깡마른 아이들, 빵 한 덩이에 아귀처럼 몰려드는 눈만 남은 사나이들, 이러한 비극적 현실 앞에서 오늘의 종교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속에 난국하는 것으로라면 이러한 인류의 비극이 해결될 것인가?
6.25전쟁을 다시 새겨보자.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이승만정권의 위기, 2차 대전 이후 평화분위기 아래 미국의 군수산업이 직면한 위기, 장개석정권의 대륙진출 망상 등이 어우러져 진행된 이 전쟁의 결과로 4백만의 우리 민족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무차별 융단폭격과 함포사격으로 강토는 잿더미가 됐으며 고아와 이산가족의 비극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뿐인가. 이후 강력해진 반공정책에 의해 또 얼마나 많은 젊음이 감옥으로, 형장으로 끌려갔었는가. 이에 종교가 가세하여 반공주의자들의 세력을 옹호했으며 그럼으로써 군사주의 세력이 발호하는데 종교는 공범이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이승만정권 하의 개신교, 장면정권 하의 천주교, 박정권과 전두환정권 하의 불교는 불의한 권력과 야합하였다는 협의를 벗기 어려운 행각을 벌였다. 6.25전쟁이 탄생시킨 군사정권은 이렇게 해서 그 정신적 동맹세력을 확보했던 것이다. 전두환의 백담사행은 바로 그러한 야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주는 일이다. 불교가 진정 그 자리를 제대로 지켜왔었으면 전두환에게 참회의 일갈을 내렸어야 하거늘 그 앞에서 굽신거렸다. 결코 불쌍한 중생을 품어 안듯이 대자대비를 베풀은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보다 위엄 있고 당당한 자세로 그를 맞이했어야 하였었거늘. 권력에 야합한 세력은 전쟁을 막지 못한다. 전쟁의 조건이 되는 불의의 싹을 오히려 키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체의 생명 존재를 우주적 시야에서 보는 불교가 중동전쟁 과정에서 이렇다할 발언이나 선언하나 없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불교가 그 종교적 책임을 망각했거나 회피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어찌해서 불교는 이번 전쟁에서 아무런 입장을 선명하게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것일까? 아니, 드러내지 못했을까? 혹 진짜 불교는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미 쏘아진 독화살은 중생의 몸에 독을 퍼뜨려 회생불가의 상태에 이르게 하거늘, 오오라 불자여 생명의 촛불이 꺼져가면 우주가 닫히는 것을.
오늘 우리 조국의 처지는 어떠한가. 북한의 핵 체제 위협을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운위하고 있는 때에 불교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전쟁을 막고 생명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불교는 미군의 핵무기 철수를 요구하고 남한군부의 군비증강을 지탄해야 하지 않은가. 또한 평화협정과 불가침조약 체결을 촉구함으로써 중생의 모진 목숨이 또다시 그 모진 시련과 고난의 진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불교와 관계없다고 생각해서인가. 신무기 한 종류의 도입을 막으면 병원과 빈민들의 거주지가 생긴다.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면 기지 유지 부담금은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쓸 수 있다. 평화협정과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남과 북의 생명 고리가 이어지고 자연은 그 생명력을 회복하여 한반도의 중생을 살린다. 역사의 현실이 이러하거늘 불교는 아직도 이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는가.
이제 불교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명상과 선의 세계에만 유유자적 갇혀 있지 말고 오늘의 역사의 광장으로 나와야한다. 중생이 도처에서 쓰러지고 있는데 불교가 전쟁 앞에서 침묵한다면 그 중생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인류가 당면한 역사의 과제를 자신의 고뇌로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는 마침내 길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그러다 남은 찌꺼기로 열반할 것인가?
불교는 또한 민족종교가 되어야 한다. 민족종교가 된다함은 민족전통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의 현실에 예민하고 그에 응답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중국인이나 인도인의 형이상학적 개념 유희에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민족의 현실에서 출발한 불교, 민족의 고뇌를 정면에서 과제로 삼는 불교, 그것이 바로 폭력과 전쟁의 위험, 그리고 불의와 구조악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민족중생을 진정한 평화와 안식으로 인도하고 불교의 등불을 널리 비추는 길이 될 것이다.
1991년 6월호. 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