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때때로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서초구 방배동
성민교회 부목사 시절, 1995년 그 해는 엄청난
앰뷸런스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희비를 지나온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참척의 한을 겪게된 남은 가족들
이야기는 가슴을 저미는 안타까움이다.
삼풍 참사 유족 정광진 변호사 별세
“그 일을 당한 뒤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이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정윤민 추모 문집에 쓴 아버지
정광진의 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시각장애인인 장녀 정윤민씨 등 세 딸을 잃은 후
장학재단을 설립, 장애인과 이웃을 도운 정광진
(86∙삼윤장학재단 이사장) 변호사가 19일 오후
8시 51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 여름 6월 29일, 정 변호사는 서울지법에서
재판을 끝내고 동기 모임 저녁 자리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집 근처에서 난
사고.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퍼에 가서
필요한 것도 사고 언니(윤민) 운동도 시키자”며
나간 세 자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한걸음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딸들은 없었다.
밤새 서울 시내 병원을 뒤지다 다음 날 아침
10시쯤에야 둘째 딸의 주검을 마주했다. 남편,
한 살배기 아들과 유학을 떠나기로 했던 딸 유정
(당시 28세)씨였다. 이어 찾은 윤민(당시 29세)씨,
윤경(당시 25세)씨도 같은 처지였다. 딸들이 다니던
영화교회 목사는 그들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현실을
믿음으로만 감내해야만 합니까.”
참척의 고통 속 그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노환으로 입원한 지난 한 달 반 동안 숙부(叔父)인
정 변호사를 돌보고, 임종을 지킨 조카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말했다. “사고 이야기는
가족 간에도 금기였다. 아픈 이야기만 나오니까...”
말을 아꼈던 정 변호사의 속마음이 나타난
대목이 있다. 윤민씨가 유학 중 다녔던 교회의
목사 부인 노연희씨가 출간한 추모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딸 셋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고 정경진(종로학원 창립자)씨의 7살 터울
막냇동생이었던 정 변호사는 용산고,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가 됐다. 전국 법조인 바둑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할 만큼 바둑을 즐겼다.
거의 유일한 도락이었다.
그의 마음은 가족, 특히 5세에 한쪽 눈 시력을,
12세에 남은 눈마저 잃은 시각장애인 딸
윤민씨에게 가 있었다. 1978년 변호사가 된
것도 수술비, 치료비 등이 이유였다고 한다.
정 변호사 표현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았던” 큰딸은 국립 서울맹학교,
단국대 졸업 후 1988년 미국 버클리대 특수교육과로
유학을 떠나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헬렌
켈러처럼 다른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모교인 서울맹학교를 첫 직장으로 택했다.
윤민씨는 정교사가 된 지 9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사건 이듬해인 1996년 11월 6일,
서울맹학교에서 윤민·유정·윤경씨를 기리는
‘삼윤(三允)장학재단 설립 및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수령한 미혼인 두 딸의
보상금 6억5000만원, 경기도 의왕시 토지
(당시 시가 7억원)를 재단에 출연해 서울맹학교에
기증했다. 행사에서 그가 짧게 말했다.
“맹인 학생들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을 봐 왔다.
삼윤장학재단은 특히 이들에게 힘이 되고자
한다. ” 부인 이정희씨는 “맹인들에게 빛이 되고자
했던 윤민이의 못다 이룬 꿈을 우리 부부가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독실하고 검약하게 산 ‘정광진
장로’는 교회, 병원 등 여러 곳에 드러내지 않고
여러 번 큰 기부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비통한 마음에 땅이 꺼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 그가 바란 건 더 좋은 세상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조성재 대구대 교수도 유학 중
연간 400만원씩 ‘삼윤 장학금’을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2005년 그가 말했다. “미국 유학
7년 동안 누군가 나를 믿고 도와준다는
생각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장학금을 받은 장애인이 수천명이다.
정 변호사는 막내딸도 병으로 먼저 보냈다.
평소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고 밝혔던 그는
마지막 즈음, 부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식 한(恨)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평생
바르게 잘 살았다.” “내가 먼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여자한테 잘하는 법을 몰라서 미안했다.”
큰 슬픔으로 다른 아픔을 위로한 삶이었다.
< 조선일보, 박은주 부국장... 2023.5.22. 기사 재인용 >
* 정말 부모 심경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소망이 함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