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 7-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허무에 대해 탄식한다. 모든 것은 허무이다. 인간의 모든 노고도 허무로 돌아가고, 자연의 움직임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도 없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전해 듣고 몹시 놀라며 당황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경의 인물 가운데 「코헬렛」의 저자가 가장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흐름을 관찰한 뒤 모든 것은 ‘허무’라고 결론짓는 그의 모습에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사의 의미를 캐묻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저자가 경험하고 확인하는 허무는 경험을 초월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허무이기에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며 넘어서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추상적인 사유를 목적으로 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도자이자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라 하겠습니다. 그가 직면한 허무는 인간의 수고와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코헬렛」을 읽다 보면, 참으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허무의 철학’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처럼, 철저한 현상 인식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의지하는 피상적인 낙천주의를 벗겨 내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저자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업적과 소유, 지식, 쾌락 따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것을 알기에 먼저 그 환상을 깨야 했을 것입니다. 「코헬렛」 1장과 2장에서 말하듯,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아볼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덧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코헬 2,24 참조)에 눈을 뜰 때 주어질 것입니다.
어떤 분과 전철을 타고 함께 가는 중에 노약자 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같이 동행하던 분은 그 젊은이를 가리키면서 “젊은 사람이 노약자 석에 앉아 있다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 그리고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행동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을 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이 불편해서 비어 있는 노약자 석에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노약자가 없으니까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은 것이라 해도 법정에 설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요. 단지 친절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내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또 배려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는 엄격한 친절과 배려를 요구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실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배려를 받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상관없이 그냥 저절로 나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불친절과 배려하지 않음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매어 있으면 정작 자연스럽게 행할 나의 말과 행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기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의 관점에서, 즉 주님의 관점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가져다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생일 날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했었지요.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디아와 상의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했고, 사람들 앞에서 한 자신의 헛된 맹세 때문에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 중요했을까요? 아닙니다. 자기의 체면 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헤로데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만을 얻습니다.
헤로데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섣부르게 계산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지,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훨씬 더 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어떤 기적이 우리 인생 또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헬렌 켈러).
긍정의 달인(‘좋은생각’ 중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아홉 살 때 홀로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오사카로 떠났다.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집을 떠나 일하러 간 것이었다. 후에 한 기자가 그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다.
“외롭지 않았나요?”
“그게 태어나 처음 탄 전차야. 무척 신기하고 흥분돼 잠잘 기분도 아니었지.”
기자는 다시 물었다.
“수습 사환일 때는 주인집 아기도 돌보셨잖아요? 힘들지 않았나요?”
“울 땐 사탕이라도 물리면 그친다는 것을 알았지. 아이를 등에 업고 내가 좋아하는 기계를 쳐다보면서 지내는 매일이 즐거웠어.”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전등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한여름 무더위에 지붕 밑 다락방에서 웅크리고 지낼 때는 지겹지 않았나요?”
“지붕 밑 다락방은 정말 덥지. 하지만 거기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의 상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기분이었어.”
기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무엇을 물어도 그는 ‘힘들었어.’, ‘싫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긍정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할 수 없는 것들만 늘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마음을 통해서 나의 삶 속에 숨어 있는 기쁨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긍정의 달인이 되는 멋진 나를 만들어 보자구여.
자유를 누려라 -반영억신부-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면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깊은 통회와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자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 죄짓지 마라”(요한 7,11)하시며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 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오늘은 순례37일차 입니다. 이제 두 고지만 통과하면 9.27일, 대망의 산티아고에 입성합니다. 시간이 남아 내친김에 피스테이까지 약4일 잡고 또 걸어볼 계획입니다. 어제의 폴토마린에서 파라스 데 레이, 여기까지 24km, 새벽5:30-12시 까지 6시간 반동안의 순례여정도 풍요로웠습니다.
완전히 개인 날씨에 선선하기가 전형적인 한국 날씨입니다. 순례 중반까지 지평선 아득한 '넓이'의 들길을 걷다가 큰 나무들 가득한 '깊이'의 숲길과 산길을 걸으니 비로소 마음도 넓이와 깊이가 조화되어 안정되는 느낌입니다. 갈수록 늘 새롭게 느껴지는 '길'에 활력도 샘솟습니다. 알베르게 정보없이도 일찍 도착한 덕에 충분히 관망하여 늘 좋은 곳을 선택할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제가 우선 물색하는 것은, 새벽 미사드릴 장소와 강론을 쓸 장소입니다. 하여 지금까지 늘 차질없이 강론을 쓰고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순례의 중심은 하느님이시기에, 매일 미사를 통해 '사랑의 중심', '활력의 중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에피소드가 오늘 강론 서두에 잘 어울립니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하면 대충 짐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헤드랜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벽 이동시 필수품이 이마에 다는 헤드랜턴인데 참 암담했습니다. 하여 이냐시오 형제와 등산 물품 파는 곳을 찾아 스페인제 헤드랜턴을 샀는데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대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감이 이상하여 숙소에 도착한 후 샅샅이 수색하니 침대 사이에 헨드랜턴이 끼어 있었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새벽 캄캄한 길을 새로 산 대형의 헤드랜턴을 사용하니 얼마나 밝은 지 참 통쾌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생명임을, '빛의 생명'임을 절감했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전혀 없는 사랑의 중심, 사랑의 빛이십니다. 허무와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의 중심인 하느님 사랑의 빛만이 허무와 절망,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사람 누구나의 원초적 정서가 허무와 두려움입니다. 인간 본성에 DNA처럼 내재해 있는 허무와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런 허무와 두려움은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초대장입니다. 오늘 코헬렛의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지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제가 볼때 코헬렛의 하느님 찾는 절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치명적인 영혼의 질병이 허무주의입니다. 바로 여기가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사랑의 빛, 생명의 빛 충만한 삶이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허무의 심연 속에 삶입니다. 허무감으로부터 시작되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불안, 두려움에 온갖 정신질환입니다.
허무와 절망, 두려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등질 때 허무와 절망, 두려움이요, 하느님을 향할 때 하느님 사랑의 빛,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출현에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는 헤로데 임금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모두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헤로데의 양심가책으로 인한 불안감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하느님을 떠나 사랑의 중심을 잃을 때, 허무와 불안, 두려움이요 급기야 헤로데 같은 범죄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기도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입증합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의 중심이신 주님 안에 머물 때 치유되는 영혼의 질병인 허무와 불안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의 허무와 불안, 절망의 어둠을 일거에 날려 버리십니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아멘
삶이 힘겨울 때 마다
-양승국신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이게 뭔가?’ ‘대체 왜 사나?’하는 느낌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구약성경 중에 ‘코헬렛(Qoheleth)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저자는 멋진 인생의 명언 제조기 솔로몬 혹은 구약시대 위대한 현자로 추정됩니다. 코헬렛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정신세계, 사고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코헬렛을 읽다보면 문체의 분위기가 다분히 회색빛입니다. 꽤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나이 지긋한 현인의 가르침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꽤나 고달픈 이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의 작은 선물이 코헬렛이기도 합니다. 너무 작은 것에 지나치게 혈안이 된 우리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우리들을 향한 현인의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반복되는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대단해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사실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노선을 거듭 강조합니다. 또한 기를 쓰고 아등바등해보지만 인생은 요지경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안개 속을 걷는 듯 단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쉽게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한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그분께서 우리네 인생길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무 기대도 하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십시오. 비록 모든 것이 희미할 지라도 매 순간 기쁘게 즐기면서 살아가십시오.
우리네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열심히 기쁘게 재미있게 살아가십시오. 열심히 살수록 한 인생이 하느님의 신비로 충만한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예외 없이 그분께로 돌아가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헬렛의 요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의 저자는 생을 찬미합니다. 부정을 인정하고 난 뒤에 얻게 되는 긍정인 셈입니다. 언제나 결핍 투성이며 부조리한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합니다. 하느님께서 빛도 창조하셨지만 그림자 역시 동시에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하십시오. 반대로 불행한 날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꺼이 견디십시오. 이것이 코헬렛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너무 작은 것에 목숨 거는 우리들, 그래서 스스로를 한없이 괴롭히며 갉아먹는 우리들입니다. 코헬렛 저자의 권고처럼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야겠습니다. 이 세상이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이 세상 순식간입니다. 때로 지긋지긋해 보이지만 어느새 지나갑니다. 또 다른 세상 하느님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진정한 의미의 세상이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한,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완전체’로서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측은지심의 눈동자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언젠가 그의 결핍을 주님께서 완전히 채워주실 그날까지 인내하면서 내가 대신 그의 결핍을 메꿔주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1,2)
-김대열신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도서라고 했던 공동번역에서는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 만사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번역된 구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공동번역이 보다 와 닿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번역이 어떻든 코헬렛서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께서는 이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지시나요? 느껴지신다면 그 허무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보통 어렸을 때나 젊었다고 하는 시기에는 삶을 전체로 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가능성과 희망에 몰두하게 되는 시기이고,
허무하다는 느낌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체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삶 전체를 허무하다고 생각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더 많아 보이고 미지의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느끼고 받아들일 나이가 되면,
또한 실존적 실패나 이별의 반복 체험을 하게 되면 삶의 허무함이나 덧없음에 대해 느끼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삶을 부분적으로가 아닌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허무하다거나 덧없다는 말의 이면에 깔린 가장 큰 내용은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욕망이 추구하고 쟁취하고 보존하려 했던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거나,
손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흐름을 벗어날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어떤 관계와도 세상에서 이별할 시간은 늘 진행형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대단한 자리도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코헬렛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한 일뿐이니,
소용없는 일에 열심히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일까요?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허무합니다. 이를 실존적 이해라고 합니다. 세상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어려운 말로 존재론적 이해 혹은 신앙적 이해라고 합니다.
실존적 이해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전제할 때 얻어지는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이해 혹은 신앙적 이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삶의 한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허무함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며,
그 허무함을 넘어서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덧없는 것들에 영혼을 빼앗겨서 소중한 삶을 소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위한 삶에 집중해야만 한다는 이해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치 있는 삶을 만들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죽음조차 허무하게 할 수 없는 복음적 가치들을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덧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들을 식별하면서 살고자 지혜를 청해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 희망을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짜 허무는 거짓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임을 말입니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그런데 여행을 간다고 하면 신자들 가운데 몇몇 분들은 차비 하라고 돈을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쓸 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챙겨주시곤 하는데요. 그것이 신부를 위하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챙겨주시는 이유가 ‘편한 여행 되세요~’ 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야 하는 여행은 편한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닌 여행도 그랬습니다. 그냥 걸어서 다녔고, 자전거 타고 다녔고, 배낭을 메고 다녔습니다. 잠도 길에서 그냥 자거나 텐트 치고 자거나 찜질방 같은 데서 그냥 잤습니다. 돈이 들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돈보다는 오히려 제가 여행하는 동안 정말 기억해주고 기도해주시는 것이 천금만금보다 더 값질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기도와 관심이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힘이 되어줄 거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성체를 다니면서도 그랬습니다. 아침에 편도선이 붓고 살짝 열이 있어서 힘들었는데요. 오늘 따라 유난히 제 귀에 들려와 위로를 주고 힘을 주는 말들이 많더라고요.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 한 분이 ‘신부님, 건강하셔야 되요~’ 하고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던 것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칭찬을 대신 들려주시거나, 신부님이 참 편안하다고 말씀해 주신 거나,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잘 웃지 않던 분들이 웃으시는 모습들을 보고 들으면서, 누군가 ‘힘내라~’ 하고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지친 마음에 큰 힘이 되었던 거 같은데요. 그런 응원과 기도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며칠 전에 교황님에 관한 영상을 볼 때도 그랬습니다. 중간에 교황님이 사시던 곳에 가서 그분을 아는 분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부럽다..’ 한 것 중에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나는 평생 그분을 위해서 기도 할 겁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교황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이 하는 일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그 말에서 그분들이 교황님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저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 말고 다른 불편한 길을 걷고 있는 신앙인들도 기도가 필요할 겁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야할 그 불편한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서로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합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중국에서 주문할 때 할 수 있었던 한 마디.. “질싼거~”
양심법이며 자연법은 신법에 기인
-이기정신부-
무서운 일들은 많습니다. 죽거나 살아난 일 같이 말입니다. 고발해 재판받고 형을 마치고 출감하면 보복 받을 일이 두렵다 합니다. 죽인 사람이 되살아났다면 그땐 보복 받을까봐 정말 더욱 두렵겠지요.
진 사람은 발 펴고 자고 이기면 발 오므리고 잔다는 말도 있지요.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런 감정을 왜 지녔다고 생각합니까. 양심법이며 자연법이고 더 올라가 신법까지 어겼다는 잘못 아닐까요?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조재형신부-
동생 수녀님이 휴가를 와서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세종문화 회관으로 가서 ‘이 미자 콘서트’를 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매일 어머니를 모시고 산책을 하겠다고 합니다. 시장에 들려서 장도 보고, 식사도 하겠다고 합니다. 마음 씀이 좋고, 고마운 동생입니다. 생각해 보면 동생은 늘 휴가 때면 부모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대천의 요나의 집엘 가기도 했고, 수안보 온천엘 가기도 했고, 제주도엘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저 필요한 경비를 보내 드리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휴가를 가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동생은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은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선배 신부님께서 식당으로 오셨습니다. 저희는 식사를 마치고 계산으로 하려고 했는데, 선배 신부님께서 저희들의 밥값도 미리 계산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리 친분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참 고마웠습니다. 선배라고 권위를 내세우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이기 때문에 후배를 위한 배려를 하고, 부족한 것이 있어도 격려해주는 모습을 봅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욕망들 앞에서 오늘 제1독서의 말은 정말 사실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참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