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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주신 하나님
출 16: 4-5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과 신광야를 지나갈 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셔서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에 도착한 것은 애굽에서 떠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2월15일날 도착하게 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안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마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아끼고 절약해서 양식을 먹고 살았을 텐데 이제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어요. 양식이 완전히 다 떨어져 버렸어요. 애굽에서 들고 나온 양식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비를 쏟음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만나를 언제 주셨느냐. 언제 주셨느냐가 참 중요해요
. 다 떨어졌을 때 만나를 주셨다. 떨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루라도 더 먹으려고 애굽의 양식을 아끼고 절약하면 만나는 안 떨어지는 겁니다. 다 떨어지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셨어요. 잘 생각해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들고 나온 양식이 있는 동안에는 만나를 안 주셨어요. 그런데 양식이 다 떨어지고 이제는 먹을 것이 없는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셨는데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어요. 언제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 다 떨어졌습니까? 여러분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떨어졌을 때 은혜주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 보니 떨어져 본 경험이 있어요.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진짜 절박한 겁니다. 우리 아이가 젖을 먹을 때인데 돈 떨어져 분유 떨어져 그러면 어떻게 해요. 우리가 굶고 있는 것은 괜찮은데 집에 있는 동전까지 다 떨어져서 동전도 없어요. 우리가 집에 어떻게 하다 보면 동전을 모아놓지 않습니까? 동전이라고 있으면 감사한데 동전도 다 같다 써 가지고 동전도 없어요. 집에 단돈 10원도 없는 거예요. 그 밤을 지내는데 밤이 천년 같더라구요. 내일은 어떻게 사나 걱정이더라구요. 목사님 뭘 걱정이에요? 이웃집 가서 돈 꿔다가 분유 사다 먹이면 되지. 저는 선배 목사님들이 가리켜 준 일도 있지만 제 목회 철학상도 그런 일은 안 합니다. 내가 굶어 죽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실 것이다. 그것 믿고 꾸러는 안 갑니다. 저는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해서 목회 초년 때에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남들은 아쉬우면 이 목사님 쫓아가고 저 목사님 쫓아 가고 여기 가서 도와 달라고 하고 저기 가서 도와 달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잘 못해요. 무릎 꿇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을 할 줄 알아도 사람 찾아 가 도움 요청하는 것은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돌아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 한 일이 잘 한 것 같아요. 구차하게 여기 가서 손 벌리고 저기 가서 손 벌리고는 것보다 하나님이 제일 빠르고 좋더라구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동네 친정을 둔 어떤 여자 분이 저희 집 앞을 지나가다 매번 지날 때마다 저희 교회가 개척 교회니까 한번 헌금을 해야지 헌금을 해야지 하다가 그때마다 그냥 지나 갔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봉투를 주고 간다고 하더라구요. 진짜 완전히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길이 없을 때 열어 주시고 떨어졌을 때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어디서 주셨느냐. 광야에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만나를 구경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나오니까. 그것도 애굽에서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니까.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사실 만나가 필요 없어요. 왜 필요 없는지 아시죠? 자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모았던 것으로 살겨고 하기 때문에 만나가 필요 없어요. 그러나 광야에는 만나가 필요합니다. 광야는 먹을 양식도 없는 곳입니다. 또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예요.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것 다 버리고 광야와 같은 교회로 들어왔을 때는 세상에서 살던 습관 가지고 여전히 내 힘 가지고 내 것 가지고 내가 사는 것이지 그러고 여러분 발버둥 치고 인생 살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생각을 바꾸셔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이제부터 살아야 되겠다..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만나는 주신다니까요. 양식이 떨어진 것이 여러분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양식이 떨어져야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노력해서 사는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사는 곳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경험을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왜 못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잘 깨달으실 줄로 믿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만나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광애 생활, 믿음 생활 하는데는 만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우리가 공급받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고 영적인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와서 만나를 공급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만나를 주셨느냐. 만나를 주신 이유를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제가 택한 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니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지키나 지키지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를 주신 것은 순종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광야 까지 끌고 오면서 세 가지를 시험하셨습니다. 홍해 바다 사건은 믿음 테스트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시려고 믿음을 한번 테스트 해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제일 처음 부르셨을 때 첫 번째 하신 시험이 무엇이냐하면 믿음 테스트입니다. ”너는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믿음으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될 지 모르지만 가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믿음의 전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믿음 테스트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행하게도 홍해 바다 앞에서 하나님이 믿음테스트를 하는데 불합격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거는 테스트가 있는데 그것이 마라의 쓴 물 시험입니다. 마라의 쓴 물은 감사 테스트입니다. 쓴 물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은 시험을 했습니다. 25년 기다려서 아들을 얻지 못하는데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느냐. 아브라함은 감사 시험에는 불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100% 만점 받을 수는 없습니다. 불합격하기도 하고 합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될 사실이 계속 불합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합격을 하면 영광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 테스트에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합격했습니다. 감사할 줄 몰라요. 오늘 본문에 만나는 순종 테스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순종하나 순종하지 않나 이것을 보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 하는 순종 테스트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제 아들 이삭을 100세 때 얻어 가지고 아들이 장성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받쳐라. 그 시험이 무엇이냐하면 순종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믿음을 테스트 받을 때도 있고 감사를 테스트 받을 때도 있고 오늘 본문과 같이 순종을 테스트 받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시험해 보시고, 감사를 시험해 보시고, 순종을 시험해 보신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시험이 지금 치러지고 있고 어떤 시험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은 홍해 바다가 있으면 믿음으로 가르고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쓴 물이 있으면 감사함으로 단물로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순종해야 되겠다 그러면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해서 넘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 상 13장에 보면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 테스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일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면서 말하기를 내가 1주일 후에 내려가서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사울이 이제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앞에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병거가 3만 마들이 6천 군사는 해변의 모레같이 많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는 몇 명 안 되요. 그 몇 명도 안 되는 군사들이 사기가 떨어져 가지고 다 도망갔어요. 급해진 사울이 참고 참고 1주일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사무엘은 나타나지를 않아요. 내일 와서 어떻게 해야 할 일을 가르켜 준다는 사무엘이 소식이 깜깜입니다. 그러니까 팔 걷어 부치고 자기가 제사장이 하는 일을 합니다. 왜 백성의 사기를 높여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백성들의 사기를 올려 보려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사울의 첫 번째 불순종 사건입니다. 기다려야 되는데 기다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무엘 상 15장에 나오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하면 아말렉과 싸울 때 남겨 두지 말고 싹 없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에 보니까 짐승들이 너무 살찌고 좋거든요. 그러니까 좋은 짐승만 싹 빼놓고 병든 것 나쁜 짐승은 싹 죽였습니다. 사무엘이 진에 들어오다 보니까 짐승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물어봅니다. 그냥 가면 지나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짐승 소리가 웬 소리입니까? 그랬더니 제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짐승을 뽑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나 하지 말지요.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짐승만 뽑아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무엘 선지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제사 드리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왜 불순종했습니까? 그래서 사울이 이때부터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 테스트에 합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에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흔들어 보실 때에 거기에 합격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 테스트에 자꾸 불합격하면 안 되요. 오늘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순종 테스트를 했습니다.
1.일용할 양식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고 명령했습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용할 양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만나는 먹는 양식이지요. 그래서 만나를 구하라는 것은 먹을 양식을 날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양식은 세 종류의 양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인 양식 둘째는 혼 적인 양식 셋째는 영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채우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혼의 양식을 채우려면 세상에 있는 책들을 많이 읽어서 마음에 양식을 쌓아야 됩니다.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육신의 양식은 열심히 먹어서 건강을 얻었는데 머리가 텅 비고 마음이 텅 빈 사람도 있어요. 머리가 텅 비어도 안 되고 마음이 텅 비어도 안 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책이나 한국의 유명한 책들은 좀 읽어봐야 됩니다. 세상에 있는 노벨 문학상 같은 것은 다 읽어봐야 돼요. 다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무슨 소리하십니까? 그런 책을 왜 읽습니까? 그리고 책을 안 읽고는 분들이 있습니다. 머리가 비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나이가 드셔도 그렇고 젊어도 그렇고 한국의 유명한 문학책이나 외국의 유명한 문학책 정도는 다 읽어야 됩니다.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책을 안 읽어요. 머리가 비어 있습니다. 책을 읽어야 그 책에서 지혜가 옵니다.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전철에도 보면 신문이나 보고. 신문에는 주로 우리 인생을 반갑게 하지 않는 소식들만 잔뜩 써 있잖아요. 그것을 매일 읽으니까 머리만 아파요. 그 다음에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말씀을 언제 읽었나 그러고 말씀을 읽지 않으면 안 되요. 옛날 부흥사들이 그런 얘기 많이 했는데 혹시 우리에게도 그런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있을 것 같아요.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 책을 집에 가져다가 두면 일주일 동안 먼지가 쌓이잖아요. 그래서 교회 올 때에는 먼지를 털어 가지고 교회에 왔다가 주일 예배 드리고 돌아가면 또 선반 위에 성경 말씀을 올려 놓았다가 다음 주가 되면 성경책을 꺼내 먼지 털어 가지고 교회 오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 책을 한번도 들춰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와서 목사님이 성경을 읽읍시다 할 때 그때 한번 펼쳐서 읽고 그 다음에 다시 가서 덮어놓고 일주일 바쁘게 살다가 또 주일날 되면 또 와서 목사님 말씀 찾읍시다 그러면 지난 주일날 출16장 읽었으니까 오늘 17장 읽겠다 그러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집에서 매일 매일 들춰 보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에서 좀 찔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양식을 구하라고 했는데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 가운데 중요한 말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매일 매일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주일치 한꺼번에 먹고 일주일 동안 성경책 덮어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양식을 먹고 내일도 양식을 먹고 그래서 나가시다 보면 하늘 양식이라고 하는 책을 사다가 놓았습니다. 제가 우리 성도들이 잘 읽으면 50권 60권 100권을 사다 놓을텐데 제가 믿음이 좀 부족해서 10권만 사다 놨어요. 매일 매일 예배드리라고 하는 책자입니다. 잘 만들어져 있어요. 가격은 5천원 입니다. 공짜는 아닙니다. 하늘 양식은 2002년 1월1일부터 해서 매일 예배드리도록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혀 신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그것만 펼치면 보고 은혜 받고 예배 드리도록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매일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날마다 양식을 거둬라. 매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찬밥 주듯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매일 따끈 따끈한 밥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매일 새롭게 은혜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만나를 주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찬밥 먹지 말고 더운 밥 먹어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라고 하는 말 가운데 또 중요한 의미는 쌓아 놓고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식을 거둬다가 내일은 나가기 귀찮으니까 쌓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는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 했더니 매일 매일 나가려니까 귀찮거든요. 그러니까 나가 가지고 왕창 거두어 왔습니다. 일주일치 거두어 온 사람도 있고 한달치 거두워 온 사람도 있고 1년치를 거두어 쌓아 놓기 해서 아침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다 동원해서 거둬다 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보니까 만나가 썩어 가지고 다 먹을 수가 없게 됐어요. 하나님이 거두라고 하신 만큼만 거둘껄 괜히 욕심 부렸다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둬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고 하는 순종 테스트에 불합격한 사람입니다. 꼭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매일매일 거두라고 하면 일주일치씩 한달치씩 1년치씩 거두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매 순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쌓아 두면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여러분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안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쌓아 둔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쌓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먹었는데 남김없이 다 먹었기 때문에 내일도 하나님 주 실 것을 바라야 되고 하나님께서 내일 주실 것을 기도해야 되고 내일 거두러 나가야 될 것을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 양식 거두어서 하루 먹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또 양식을 거두러 나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상의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치 양식을 거두어서 다 먹었으면 그 다음날 또 거두러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롭고 번거롭고 괴로워도 양식을 거두러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매일 매일 양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를 던져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한번 먹으면 그것을 가지고 일주일 살고 한달 살고 일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먹어야 여러분의 영혼이 산다고 하는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밥을 세 끼 먹고 살 잖아요. 안 먹으면 힘이 없어 가지고 살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바깥에서 일 열심히 하고 들어왔는데 부인이 밥도 안 해 놓고 기도하러 갔다든지 어디 속회 예배 보러 갔다든지 그러면 믿음 있는 말들은 자기가 차려 먹는데 믿음 없는 남편들은 화가 나는 거예요. 남편이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밥도 안 차려 주고 나갔다고 불평하고 짜증 부리고 신경질 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내가 영의 양식을 못 먹었다하는 이것으로 인해서 짜증나고 신경질 나고 속상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먹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속상해야 돼요. 아무리 바빠도 내가 하나님 말씀은 먹었어야 되는데 말씀을 못 먹었어요. 또 한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날 그날 주시는 것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만큼 주셨구나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살펴보면 너무너무 감사한 것이 많아요.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은 새벽에 거두라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가 가지고 만나를 주우라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고 했습니다. 해가 뜨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가면 주울 수 있는데 새벽 시간이 지나면 만나를 주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또 있었냐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이 들고 어려우니까 늦잠 푹 자고 만나 주우러 나오는 분이 있어요. 만나를 주었을까요? 못 주었을까요? 못 주었어요. 나오면 만나가 다 없어져 버렸어요. 만나가 아무 때나 있는 줄 알고 아무 때나 주울 수 있는 것인지 알고 나가 봤더니 하나도 못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 만나를 주으러 나와 가지고 만나를 줍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벽이라고 하는 시간을 주신 것은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새벽을 여러분들이 귀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은 첫 단추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지 첫 번째 것을 좋아하세요. 첫 시간, 첫 열매,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새벽이 주시기 때문에 새벽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만나를 주워야 그 날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그 날 주시는 만나를 줍지 못하면 그 날 영적인 승리함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다른 어떤 시간보다 새벽시간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나오면 뭘 줍는다구요? 만나를 줍는다고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고 부흥한 견인차 역할을 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벽 기도입니다. 저희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는 숫자에 비해서 새벽기도가 조금 많이 모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소원은 새벽에도 이렇게 모였으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 새벽 시간에 말씀을 받기 위해서 나오면 하나님께서 진짜 주옥같은 말씀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일용할 만나를 주워야 그 날 살기에 넉넉합니다. 날마다 승리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이라고 그랬어요. 일용할 양식을 언제 주우러 가야 됩니다. 새벽에 만나를 주우러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줍는 시간도 정해 주셨어요. 은혜를 주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줍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새벽 기도는 목숨 걸고 해야 됩니다. 새벽 기도는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것 공예배 보다도 중요한 시간이 새벽기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특별하게 어디 가는 일 외에는 새벽 기도를 드립니다. 제 동기들은 1년에 한번씩 모이거든요. 그러면 동기 모임을 갖다 보면 밤 11시 12시 1시쯤 되면 저는 보따리 싸고 다른 친구들은 이제 막 얘기 시작하려고 해요. 아예 수년 그렇게 하니까 그런 사람인 줄 알아요. 새벽기도 하러 가니까. 그래서 해마다 친구들이 한마디해요. 지난번에는 청주까지 내려갔었는데 청주에서부터 올라 와서 새벽 기도를 인도 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어떻게 생각하면 미련한 것 같아요. 모처럼 1년에 한번 만났는데 청주에서부터 여기까지 뛰어올라 왔어요. 물론 새벽 기도에 권사님 한분 대신 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새벽기도를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경우는 제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볼일 보러 갔다 가도 와도 새벽기도 인도합니다. 여러분이 새벽을 귀하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가 제가 설교를 해 보면 새벽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많이 부어 주십니다. 제가 생각해도 새벽 설교가 다른 때 설교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하나님 새벽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을 귀하게 여기시고 이른 새벽에 만나를 줍기 위해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필요한 말씀과 승리함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그런데 새벽에 나오라고 하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오라면 해가 중천에 해 뜬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어난 시간이 새벽기도 시간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기도 시간이 아니에요. 새벽 시간은 새벽 시간이에요.
3.갑절로 거두라고 했습니다.
만나를 모아 가지고 내일 먹기 위해서 쌓아 두면 썩어 냄새가 나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의 날이 돌아올 때가 되면 이틀치를 거둬도 썩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매일 내리는 만나는 똑같고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안식의 날이 돌아올 때가 되면 이틀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날은 나가서 주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틀치를 거두어서 그것을 안식일 날 먹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틀치를 줍도록 허락하셨어요. 사람들이 다 나가서 안식일 날이 돌아올 때가 되면 하루치가 아니라 이틀치를 거두어 쌓아두고 그 다음날까지 먹었어요. 그런데 출16:27절에 보면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는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꼭 이런 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칠일째는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또 삐딱하게 하루치만 거둬다가 먹고 내일 건 내일 거두면 되지 그러고 내일 주우러 나갔더니 만나가 내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만나가 안식일 전까지만 내려오다가 안식일 날이 되면 안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수가 없어요.
안식일은 요즘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일입니다. 주일날 여러분들이 모든 삶의 것을 다 중지하고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손해가 나는 것 같아요. 곧 우리의 사업이 무너질 것 같고 부도날 것 같고 하루라도 더 나가서 돈 벌어야 인생이 잘 될 것 같아서 주일날 되면 문을 못 닫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주일날 문을 철저하게 닫는 분들도 있습니다. 누가 그럴까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날 문을 열지를 않습니다. 장사를 아예 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난뱅이 인생을 사느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바벨론 포로에 붙잡혀 가서 조차도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했어요. 바벨론의 왕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못 지키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킨다는 것입니다. 왕이 하나 선택해야 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 죽이든지 아니면 안식일을 허용하든지 해야 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달력에 빨간 색 표시하는 것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 죽이는 것보다는 안식일 날 쉬게 해 주고 종으로 부려먹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너희가 너희 종교 의식하는 그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절의 은혜를 주셨다. 갑절로 거두게 하셨다는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간증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토요일까지만 일하고 주일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들은 토요일 날 장사가 너무 너무너무 잘된 답니다. 처음에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정착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들도 적응이 안 되니까 삐그덕 삐그덕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림동에 있을 때에 약국하는 속장님이 계셨는데 주일날 쉽니다했더니 처음에는 매출이 뚝뚝 떨어 지더랍니다. 그래서 당황스럽더래요. 그런데 주일에 쉽니다 하고 계속 붙였더니 이제는 자기들이 맞춰서 오더래요. 이 약국은 주일날 오면 약을 못사니까 아프면 토요일 날 미리 가서 사자. 그래서 매출이 나중에는 쓱 올라가요. 세상 사람이 우리를 맞춰서 와야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한테 끌려가면 안 돼요.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음식점에 단골이니까 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어야 되겠다 그러면 이 집을 제외하고는 못 먹으니까. 토요일 날 가서 먹으면 딱 좋겠다. 월요일 날 가서 먹자. 세상 사람들이 바꿔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비위 맞춰 가지고 주일날도 오세요. 그러고 우리가 문을 열어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갑절로 얻게 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주일날 손해 본 것 같은 그 부분을 반드시 나오지 못하게 약속하고 있어요.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평일 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하면 굉장히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나중에 결산해 보면 얻은 것이 없어요.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어떤 나무꾼이 나무하러 산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두 나무꾼이 나무 베기 시합을 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나무를 빨리 많이 베는가를 시합했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시간을 정해 놓고 나무를 베기 시작하는데 한 사람이 이기려고 쉬지 않고 계속 나무를 팼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1시간하고 10분 쉬고 1시간하고 10분 쉬고 그렇게 나무를 벴어요. 누가 더 많이 벴을까요? 1시간하고 10분 쉰 사람이 더 많이 벴어요. 이상하잖아요? 자기는 1분도 쉬지 않고 나무를 벴는데 쉬어 가며 일한 사람보다 훨씬 적게 나무를 베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하고 결과가 난 것을 보고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아요. 도끼질을 계속하다 보니까 날이 무뎌진 거예요. 무딘 날로 나무를 패려고 하니까 나무가 베어지는 않고 힘은 힘대로 들고 나무도 적게 베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10분 쉬며 나무를 벤 사람은 쉴 때에 날을 잘 갈아 가지고 나무를 베니까 나무도 잘 베어지고 힘도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갑절로 거두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영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계속 돌리면 망가지듯이 망가지면 쉬지 않고 돌린 동안에 많이 돌린 것 같지만 기계는 서 버리면 손해가 많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라고 하는 것도 한번 서 버리면 10년 설 수도 있고 20년 설 수도 있고 영원히 안 돌아갈 수도 있어요. 기계는 살살 달래 가면서 써야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인간은 육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만든 기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합니다. 영적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주일이란 좋은 날 허락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와서 주일날 안식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갑절로 채워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서 큰 풍성한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순종 시험에 불합격했어요.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거두어라. 새벽에 거두어라. 안식일이 오면 갑절로 거두어라 했지만 한가지도 순종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거두라면 이틀치 거두어 오고, 새벽에 주우라고 하면 대낮에 나가고, 갑절로 주우라고 하면 하루치만 주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 시험에 불 합격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데로 일용할 양식만 거둬라 그러면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새벽에 거둬라 그러면 새벽에 거두고 갑절로 거두고, 갑절로 거두라고 하면 갑절로 거두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과 불만족
출 16: 4-20
지금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풍요로운 시대라도 다 풍요롭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배고픈 나라는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로 인구 100명 중 73명이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지난 6월 2일 발표한 2005년 세계 기아지도에 따르면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를 제치고 영양 부족 인구 비율 1위로 올랐습니다.
북한(36%), 타지키스탄, 예멘, 그리고 아이티를 빼고는 영양부족 인구 비율이 35%를 넘는 나라는 모두 아프리카 나라들입니다. 아프리카의 배고픔은 갈수록 그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 이남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영양 부족 상태에 있는 인구는 점점 늘어나서 2억460만 명(2000년_2002년)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가 배고플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불안한 정치 상황입니다. 대부분 나라가 수 십 개가 넘는 소수 민족으로 이뤄졌고 종교 또한 기독교, 이슬람교, 토착신앙 등 각각이라 통합과 안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세계 많은 나라가 돈과 식량을 지원한다지만 이 역시 배고픈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권력자의 배를 불리고 무기 사는 돈으로 쓰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원국들도 점차 도와주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고, 굶주림의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가뭄과 에이즈 등 각종 질병까지 겹쳐 상황은 최악입니다.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하루에 필요한 최소 열량의 40%로 배급량을 줄였다는 세계식량계획의 발표였습니다. 세계식량계획은 북한 주민 2천3백70만 명 가운데 약 35%가 영양실조로 건강이 위험하며, 57%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벼뿌리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며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10년 사이에 오히려 5.5세 정도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가슴 아픈 사연은 세계 어린이들이 1분마다 10명씩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유엔의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은 2004년 현재 5세 미만 어린이 4명 가운데 1명은 영양실조로 인한 저체중 상태에 있으며, 이로 인해 해마다 560만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지난 5월 2일 밝혔습니다. 5세 미만 어린이 사망자 1100만명의 50% 이상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니세프는 또 개발도상국의 5세 미만 어린이 1억4600만명(27%)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선진국 어린이 1억7000만명은 과체중 또는 비만으로 나타났고 이중 5세 미만 어린이는 2200만명에 이릅니다.
여기에 우리 동족인 북한은 5세 미만 어린이의 23%가 저체중, 37%가 발육장애를 겪고 있으며 7%가 결핵 등 소모성 질환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북한의 5세 미만 어린이의 1000명당 사망자는 55명으로 한국의 6명에 비하면 약 10배나 높습니다. 한국은 영양부족으로 인한 저체중 어린이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보다 실감 있게 표현하면 지금도 지구촌에서는 5초에 3명, 1분에 34명, 1일에 약 5만 명이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왜 이렇게도 비참한 삶을 사는 자가 많은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저주인가?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84%의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역은 90%가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곳들입니다. 이곳들은 대부분 모슬렘, 흰두교, 불교, 공산권 지역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접근이 어렵고, 현재 전 세계 선교사의 약5%정도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복으로 믿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해답을 오늘 읽어드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지 2개월이 지났을 때에 비로소 신 광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백성들이 가지고 나왔던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 등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굶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광야에 나오면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신광야에 올 때까지는 마실 물이 제대로 없어서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광야에 오고 나니 물은 고사하고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16:3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위해서라도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려진 음식이 만나요, 메추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음식을 제공하시면서 백성들에게 몇 가지 엄격한 규제를 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메세지를 던져 주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원망하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셨는데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보다 쉽게 1주일분이나 한 달분 정도, 또 수개월정도 먹을 양식을 주시지 일용할 양식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범죄 한 이후 생겨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이기적인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시간이 덜어지는 오늘날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만사가 다 잘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불평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불평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본위로 삶을 살아갑니다.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부족한 것이 발생하게 만들었고 거기에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얻는 것이 없게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노력으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이든 양식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꺼번에 많이 공급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어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들이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누리며 풍족하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임재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이미 이 문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이 담긴 마태복음6장 25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앞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 중 90%가 기독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기들만의 신을 섬기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같은 땅 안에서도 보면 남과 북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우상을 섬겼던 북이스라엘이 약150년 정도 먼저 망했고 왕이 오를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암투극이 많이 빚어졌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지급 북한과 남한은 비교가 안 됩니다. 북한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짓밟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김일성 부자가 동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어찌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겠습니까?
한편 남한 안에서도 보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적 상황을 보면 다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대구의 문제가 더욱 크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에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했고, 대구는 남한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는데 한국의 예루살렘은 유물론주의자들의 왕국이 들어서 있고, 남한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대구에는 불교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원불교 본부가 있고 동양에서 제일 높다고 자랑하는 미륵불이 팔공산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 있던 엘리야 선지자 머리맡에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물 한병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에 기름이 마르지 않고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빌립보서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욕망은 경쟁을 일어 킵니다. 경쟁은 결국 다툼을 일으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한다고 했습니다. 욕심은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은 너무 많은 것을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쌓아두려고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소비가 너무 과소비가 많고 과욕이 많습니다. 뭐든지 많아야 하고 뭐든지 커야 하는 우리의 생각의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원 없는 우리나라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전군 장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국가관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첫째, 안전, 둘째, 평화, 셋째 통일이라고 했습니다. 안전해야 합니다. 안전하기 위해서는 평화해야 합니다. 평화가 깨어지면 아무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것을 무력으로라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기에 평화가 깨어지지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보면 식구대로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 아이가 먹을 량과 어른이 먹을 량이 다릅니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만약 남은 것이 있더라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여 믿지 못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겨서 아침까지 두었던 자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많이 거두려고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광야생활 할 때 그런 욕망 가지고는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서로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을 얻은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날 세계의 평화가 깨어지는 이유도 서로가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얻는 것을 감사하면서 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초대교회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다 팔아서 나누었습니다.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잘 먹고 사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화평하게 사는가를 물으십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은 성실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매일 거두어야 한다면 매일 일해야 합니다. 한 번 거두어 일주일을 먹는다든지 한 달을 먹는다면 아마 나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놀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일 내가 거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 모두가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침을 기다렸다가 매일 아침에 나가야 합니다. 광야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성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매일 먹을 것만 주셨지만 이틀 분을 허용한 날이 있습니다. 주일을 위해서는 토요일에 이틀 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외에 다른 날에 만약 이틀 분을 거둔 자는 남은 것이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먹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대로 매일 얻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자기들이 장막을 치고 있던 그 터위에 내린 이슬 같은 것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새벽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물론 기도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실한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도는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이 재능을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짝이는 재능도 꾸준한 성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인물들을 보면 모두가 성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들에서 양을 열심히 치고 있었습니다. 막내지만 왕으로 기름을 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길 때는 성실성을 봅니다.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요령을 부리거나 꾀를 부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지혜가 조금 부족해도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하면 그 사람에게 일을 맡깁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매일 새벽부터 시작하는 성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46:5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넷째,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어김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언제 걱정이 적습니까? 많이 없으면 없는 것이 걱정이고, 많이 있으면 그것을 관리하고 유지한다고 걱정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걱정이고 빼앗길까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석군은 천 가지 걱정이고 만석군은 만 가지 걱정이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채움을 입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두기만 하면 됩니다.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거두면 됩니다. 예수님도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먹을 양식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걱정해야 합니다.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탈북자 여성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를 아느냐’ ‘남북회담을 아느냐’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그것이 배고픔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최고지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자유도 배가 부른 다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걱정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먹을 양식 걱정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먹을 양식만 걱정하다가 결국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출애굽 1세대들은 다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항상 걱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섯째, 더불어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우선은 우리가 적당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남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많이 거두어 남겨두면 반드시 벌레가 생겼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했습니다. 과욕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남기고 있습니다. 음식물도 남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품도 보면 과다하게 구입하거나 과다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다하게 구입하여 적재해놓고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판매 전략이 있는데, 다름 아닌 끼워서 파는 것입니다. 아니면 깜짝 세일로 엄청나게 싸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끼워준다고 당장에 필요하지 않는 것을 사온다다거나 싸게 판다고 많이 사다놓고서 흥청망청 쓴다면 바람직한 소비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얻도록 하시면서 많이 거둔자도 적게 거둔자도 남은 것이 없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골고루 나누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들은 나누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공산주의처럼 동등하게 나누어 골고루 잘살게 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것을 날 나누도록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에게 많은 재앙을 내리tu서 굶주림의 시달림이 많다고 하면 하나님을 잘 믿어 복받아 많이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만 누리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재앙을 받아 시달리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탐욕은 금물입니다. 탐욕은 결국 나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세계의 최대의 갑부는 빌게이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주 중요한 선언을 엊그제 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 회장은 어제(06년 6월15일) 워싱턴주 레드먼드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상의 회사 업무에서 벗어나 2008년 7월부터는 세계 보건 및 교육 문제를 다루는 재단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빌게이츠의 개인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500억달러(약 50조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갑부이자 최고액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도전할 만한 두 가지 열정을 갖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며 “부(富)에는 사회에 되돌려줄 책임이 따르며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게이츠는 지난 2000년 부인과 함께 제3세계 빈민 구호와 질병 퇴치를 목적으로 설립한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금 규모만 291억달러(약 29조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자선재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부는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누어야 하며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아름다운 생각은 역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절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무리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때 요한은 대답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시편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사실 우리교회가 “아나바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아껴 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운동은 생명운동입니다. 이런 생명운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로부터 나와서 세상을 보다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내가 원하는 만큼 소유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실 것을 믿으면서 불평하지 마십시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시고 항상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고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뜻을 헤아려 우리들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출 16: 6-12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부정적 별명이 있습니다.그것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고집과 교만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불순종하는 저들의 모습을 [목이 곧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 구체화되고 집단화 되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출애굽기 14:12를 보면 홍해 앞에서 뒤쫓아 오는 바로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잠잠해졌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도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신 기적 때문에 잠잠해졌습니다 (15:22-27).
출애굽기 16:1-3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지 한달이 지난 어느날 그들의 원망이 재연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덕을 배부르게 먹고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이 원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배고파 죽겠다는 원망이었던 것입니다. 이 원망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때문에 잠잠해졌습니다.
출애굽기 17:3을 보면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이 원망은 반석으로 생수가 터지게해 주심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됐습니다.
민수기 11:1을 보면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밤낮도 없었고 실내, 실외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27을 보면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없는 원망역사를 지켜 보느라면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저들의 모습이 곧 우리네의 자화상이라는 점입니다. 저들은 사건있을 때마다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 가득히 원망의 폭탄을 안은 채 살고 있습니다. 온몸 가득히, 멱까지 원망이 가득차 있습니다.
1. 원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1) 불신 때문입니다.
원망은 불신의 산물입니다. 죽게 됐다면 원망하면 살 길을 열어 주셨고, 물이 쓰다고 원망하면 단물이 되게해 주셨고, 배고프다고 원망하면 만나를 주셨고, 고기먹고 싶다고 원망하면 메추라기를 주셨고, 목마르다고 원망하면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주셨습니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기적과 응답을 체험한 저들입니다만 계속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란 수근거리며 불평한다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저들이 최소한의 믿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면서 원망을 일삼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과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9:3을 보면 "사랑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탓으로 빚어진 결과를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게 그 책임을 떠민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잠언 19:3은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문의의 말을 빌리면 한국인의 경우 성인병의 원인은 크게 세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식생활, 성격,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식생활, 자극성이 과다한 음식물의 섭취, 과음, 과식 등 식생활의 잘못으로 성인병이 발병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성격도 성인병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성격, 내성적 성격 불같은 성격 등 조화와 균형을 깨트리는 성격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습관도 성인병 유발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 건전한 습관, 경건한 습관은 건강의 비결이 됩니다만 반대로 무질서한 습관, 통제가 불가능한 습관, 생체의 리듬을 깨트리는 습관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들의 원망은 누적되고 계속된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버릇을 가지면 일생동안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쁩니다.
원망하는 나쁜 습관에 길들면 일마다 원망을 일삼게 됩니다. 습관은 그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습관적으로 투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결국 그 영혼이 버림받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왜 원망하면 안됩니까?
1)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7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망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독백이든 혼자서 고함치는 것이든 다른 사람 앞에서 터뜨린 것이든 하나님이 그 원망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데 어떻게 원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2) 모세를 향한 원망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8을 보면 "너희의 원망을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16:9,12에는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보이는 공격대상은 모세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냈고 고생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지도능력이 모자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모세에게 대들고 도전했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16:8 말씀은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 원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함이로다'라는 말씀은 원망의 대상이 누구였는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4:8을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리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흙덩어리가 토기장이를 향해 원망을 퍼붓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애굽에 보내 명령을 순응하며 평생을 바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를 공격했고 죽이겠다고 덤볐고, 돌을 던지려 했고 원망과 비난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3. 원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0:10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더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9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서 게시니라"고 했습니다.
원망은 하면 할수록 그 폭이 넓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점차 주변은 물론 사회 국가 세계가 원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 가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 열 가지 백 가지 그리고 세상만사가 다 원망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멸망하고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지존파라는 범죄조직을 만들고 엽기적 살인을 일삼던 20대 젊은이들의 행적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가난, 무지, 멸시, 증오가 한데뭉쳐 세상을 쓸어버리려 했다는 것이 저들의 항변입니다. 그러나 저네들보다 더 불우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곧고 바르게 일하며 꿈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원망심리가 점차 증폭되면서 집단행동으로 발전했고 저토록 몸소리쳐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저들의 원망으로 시작된 자신들의 종말을 단 한번만이라도 되돌아 볼 수 있었다면 준엄한 법의 심판대에 서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의 기사가 생각납니다.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며 가해자라는 기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당한것입니다. 허탈, 좌절, 통한, 죄책감으로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무겁습니다.
원망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이 모여왔던 진을 하나님의 불이 살랐습니다. 민수기 14:27을 보면 "나를 원망하는 이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1 이하를 보면 원망을 일삼고 집단행동으로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와 그 일당이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원망하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고로 원망을 일삼과 잘되거나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스빈다. 욥기 23:2을 보면 "혹독히 원망하는 사람은 받는 재앙도 크다"고 했습니다.
4. 원망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원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원망을 일삼고 불평불만이 멱까지 차있는 사람들과 늘상 교제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또레집단 형성을 위해 마치 세뇌를 하듯 다른 사람드을 세뇌시키고 동조자를 만들려 합니다. 더 깊은 함정에 빠지기 전 원망하는 개인이나 집단과는 사귐을 끊어야 합니다.
2) 자족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야 향상과 발전이 성공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더 낳은 환경에로의 진일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반대로 환경을 탓하고 저주하고 적개심을 품는다면 지존파의 젊은이들처럼 멸망에 이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존 웨인 게이시(John Wayne Gacey)는 33명을 연쇄살인한 희대의 살인자였습니다. 1978년부터 16년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94년 5월 독약주사를 맞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죽는 날 소원을 묻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습링니다. 네 종류의 과일과 함께 치킨을 차려주었더니 배불리 먹고난 후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살인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 어떻게 정부가 살인을 한다 말이냐"라며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뉘우침이 없었고 원망과 불평으로 죽었습니다. 원망을 피하려면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기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망심리의 뿌리를 캐보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구때문에, 무엇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망울이 맺혀있습니다. 그러나 내 책임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남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도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한 것은 제자들의 아우성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노련한 노젓는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바람이 그쳤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고요하라 잔잔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삶과 우리 역사 속에 주님이 임재하셔서 원망과 시비. 질투와 분쟁, 다툼과 증오를 잠잠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각 언론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국먼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실종되버렸습니다.우리의 기도와 각성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가해자나 피해자가 생겨나선 안됩니다.
원망없는 사회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기도를 새로 시작합시다. 주여, 우리와 우리 시대를 구원하소서.
원망을 중단하라
출 16: 7-9, 요 9: 1-7
우리 집의 두 아이를 키울 때 보니 사람들의 원망은 인간의 죄 속에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면 아기들은 문지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어댑니다. 의자에 걸려 넘어집니다. 의자를 손으로 가리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피가 납니다. 돌부리를 가리키며 웁니다. 어른의 눈에 볼 때는 자기의 걸음마가 미숙해서 넘어지는 것인데 아기들은 자신은 잘 걷고 있는데 이것들이 걸려 넘어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성입니다. 어릴 때부터 내 탓, 네 탓을 따지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은 원망을 타고납니다. 원망게임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본성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어릴 때 학교 가기 전부터 하던 스스로 배워서 하는 게임입니다. 자기가 운전을 잘 못해서 차가 구덩이에 빠집니다. 그런데 운전자는 차에서 나와서 발로 차를 찹니다. 은근히 차를 원망합니다. 운전이 서툴러 생긴 일인데 마치 운전은 잘 했는데 차가 다른 데로 굴러간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원망게임입니다. 원망게임은 가장 우스운 게임이며 가장 파괴적인 게임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시각장애인이 누구 탓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누구의 죄를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자기 부모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꼭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결과를 누구에게 탓하고,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예수님은 원망을 중단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모든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에게 어떤 문제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누가 묻습니다. 이목사의 키가 작은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아버지 때문입니까? 어머니 때문입니까? 저의 어머니가 늘 그러세요. “나 때문에 너들 키가 작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키 커서 다른 것 하면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의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면 원망은 중단됩니다. 이걸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흔히 하는 원망게임을 중단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제자들은 나면서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뉘 죄로 인함이니오니까?”고 묻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죄의 결과란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란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이 소경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소경 되게 한다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눈감고 살아야 합니다. 죄 안지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말엔 은근히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인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고통스런 상태는 원인이 죄라는 단순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실수하지 않았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집안에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내가 한번 주일을 안 지켰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곁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나 원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책은 일본 카톨릭의 초기 교회 한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 보면 배교한 신부와 그리스도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주여,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배교한 신부가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라고 답하십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원망은 불신앙이며, 작은 믿음이며, 우리 편의 문제이지 하나님 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양식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이 원망을 들은 모세는 16:8에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그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침 첫 시간에 와서 종일 일한 품꾼이 저녁 마지막 시간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과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고 주인을 원망합니다. 20:11에는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라고 합니다. 먼저 온 자가 원망한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원망하는 품꾼을 꾸짖습니다. 선한 하나님을 악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고 하는 생각,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하는 생각,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는 생각,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조건이며 이것이 곧 독신죄입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예수님의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부엌에 있던 마르다가 혼자 열심히 일하다가 은근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왜 내가 혼자 일하게 하는 것을 보시고 동생으로 하여금 나와서 도와주게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동생을 원망하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8:28에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종래 이루시는 것은 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크나큰 우리편의 실수입니다. 행여나 하나님을 원망할 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편이시고 신실하십니다.
둘째, 다른 사람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제자들은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나 부모 둘 중의 하나의 죄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이 말은 소경에게 부모를 원망하게 만들고, 부모에게 아들을 원망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마귀는 이런 장난을 칩니다. 서로 원망하는 경우에 부모는 “아이구, 내가 무슨 팔자로 너 같은 자식을 낳았어? 너 때문에 부끄러워 못살겠다. 차라리 죽기나 하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낳으셨나요? 차라리 죽게 놔두지 왜 살려두셨나요?”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서로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래 전 어느 교회에 있을 때 제가 맡은 교구에 한 집의 두 자매가 청각장애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두 자매가 같이 홍역을 앓아서 해열 주사를 놨는데 그 부작용으로 딸 둘이 함께 청각장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그 딸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누가 방문하게 되면 한 쪽 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질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역을 맡은 분들도 그 딸들의 얼굴을 못 봤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애들 때문에 내가 죽고 싶고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에 가서 그 딸들을 나오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가 절대 그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살지만 하늘나라에는 같이 가야 되고 같이 갈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하늘나라도 못 가면 더 억울하지 않느냐고 달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자매가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래 전 일반적인 부모의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판단하여 단죄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릅니다.
하와가 뱀에게 꼬임을 받아 죄를 지었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다시 선악과를 얻어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하와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이 먹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징벌과 인간 구원의 계획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똑같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나타나시고 죄를 지은 경위를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을 먼저 원망합니다. “왜 잠자는 사람의 갈비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어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원망했습니다. “하와가 먼저 꼬임을 받아 내게 주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와는 다시 뱀을 원망합니다.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와에게는 말을 하던 뱀이 이 때 이미 벌을 받아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원망이란 차원에서 볼 때에 뱀이 사람보다 조금 낫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원망은 큰 죄악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리더로서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법칙을 ‘3C 법칙’이라 했습니다. 비판하지 않는다(criticize), 비난하지 않는다(condemn), 불평하지 않는다(complain)는 세 가지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자기 동생을 원망하는 것을 보세요.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자를 원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도행전 6:1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구제하는 일로 교회에 원망과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는 꼭 좋은 일로 시험에 들고,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에 구제에 빠졌다면 사도들이 뺐을 텐데 원망은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감히 원망을 못하니까 자기 보다 약해 보이는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야고보서 5:9에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합니다. 원망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아시겠지요?. 원망은 심판을 초래할 만큼 큰 죄입니다. 형제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의 대상의 대상입니다.
셋째, 자기 자신 원망을 중단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까? 우리 모두는 특별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만들어 세상에 보내신 존재입니다. 존귀하지 않고 특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바보야, 내가 못났어”라는 식의 자학적 태도는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잘못을 범하는 일입니다. 켄 셸턴은 ‘리얼 석세스’란 책에서 “자기 경시는 하나의 범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경시가 아니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교만과 다르며 자신을 사랑하는 애기(愛己)는 자기중심적 사랑인 이기(利己)와도 다릅니다. 자존감이란 개인의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에는 자기 신뢰와 자기 존중이 포함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자기만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삶에 적합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유능함과 자신의 존재 가치에 긍지를 가집니다. 마이크 머독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자신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공경심이 가장 중요한 자기 사랑입니다. 어떤 여인이 무시무시하고 큰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따라옵니다. 계곡으로 도망해 보지만 그 곳으로 따라옵니다. 아무리 도망을 해도 계속 따라와서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괴물이 코앞에까지 쫓아왔습니다. “야, 괴물아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려는 거야”. 괴물이 대답했습니다. “그건 너한테 달렸지. 이건 네가 꾸는 꿈이니까”. 자신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항상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마태복음 22:39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너 이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너 몸만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데일 겔러웨이는 ‘당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셨으니 이제 당신이 당신을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세상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외형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형에 대한 불만, 불평, 원망 이 모든 것은 다 헛된 자화상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한 사랑과 건전한 자화상이 있으면 외형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건강한 자화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200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선정하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의에서 우리 나라의 평창이 밴쿠버에 3점차로 패배했습니다.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전했습니다. 한편 우리 나라가 대단하지만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시아 경기는 빼놓고라도 올해의 유니버시아드 그리고 88년의 올림픽, 작년의 월드컵 등 세계적 경기를 골고루 하고 이제 동계올림픽 마저 했으면 했는데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에 들리는 후문이 너무 씁쓸합니다. 무주와 평창이 서로 유치경쟁을 하다가 표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도시끼리 서로 경쟁하고 서로 깎아 내리고 원망하다 결국 고배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엊그제는 김운용 IOC 위원이 부위원장에 출마하려고 평창 유치를 방해하였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패배를 맛보았는데 그 뒤에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런 원망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10에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망 게임은 결과적으로 서로 멸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함께 멸망하는 원망게임을 빨리 끝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4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은혜롭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한 주간의 삶 속에서도 원망하고 불평할만한 일들이 또 생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정부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이 지구를 원망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뜻을 발견하는 은혜로운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