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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meaning)의 문장, 강도(intensity)의 진동
- 송명화 <신성리 갈대밭에서>를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본격수필의 이론과 실제>저자
Ⅰ. 로그인
- 의미 중심 수필에서 강도 중심 수필로
기존 수필은 대체로 의미의 문학이었다. 자연이나 일상의 체험을 통해 작가가 깨달은 바, 즉 삶의 교훈, 성찰, 정서를 언어로 정리하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 여기서 언어는 체험을 설명하고, 문장은 감상을 정돈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독자는 텍스트가 제공하는 의미의 방향을 따라가며 공감하거나 이해한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 “산문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걷는 것이고, 시는 걷는 행위 그 자체”인데, 전통적인 수필은 오랫동안 산문적 목적성에 충실해왔다. 체험은 언어를 통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고, 독자는 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이러한 의미 중심의 수필은 분명 문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체험의 흔들림, 감각의 잉여, 설명 이전에 발생하는 어떤 힘들은 종종 정리되고 삭제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경험은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채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라 했을 때, 기존 수필은 그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것’을 서둘러 말이 되게 만드는 형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의미는 안정적이었으나, 체험이 지녔던 날것의 진동은 언어의 틀 안에서 평탄화되기 쉬웠다.
반면 본격수필은 체험을 의미로 환원하기보다, 사건의 강도를 발생시키는 쪽으로 이동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힘이 작동하는가’이다. 질 들뢰즈가 “사건은 의미가 아니라 강도이며, 이미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듯, 본격수필에서 언어는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의미는 최소화되거나 유예되고, 대신 감각, 리듬, 이미지의 배열을 통해 독자의 신체와 감각에 직접 작용하는 강도가 생성된다. 독자는 이해하기보다 먼저 겪고, 공감하기보다 먼저 흔들린다.
이러한 수필에서 독자는 더 이상 관조적 해석자가 아니다. 텍스트는 독자를 안온한 의미의 자리로 안내하지 않고, 감각의 흐름 속으로 밀어 넣는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의미의 쾌락(plaisir)”이 아니라 “몸의 쾌락(jouissance)”에 가까운 독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수필은 설명의 문학이 아니라 작용의 문학, 즉 독자의 감각에 직접 개입하는 형식으로 변모한다.
송명화의 <신성리 갈대밭에서>는 이러한 전환의 지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이 수필은 자연을 해석하거나 교훈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갈대밭이라는 장소가 지닌 물질적, 정동적 강도를 촘촘히 조직함으로써 독자에게 하나의 사건을 통과하게 한다. 해질녘의 빛, 갈잎이 스치는 소리, 냄새와 색의 저하된 채도는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감각의 밀도를 축적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사유 이전의 체험’, 즉 세계가 개념이 되기 전에 먼저 몸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가깝다.
이 글은 기존 수필의 의미 중심 서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의미는 강도를 통과한 뒤 남는 잔여로서 존재한다. 그 점에서 <신성리 갈대밭에서>는 의미의 문학에서 강도의 문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사례가 아니라, 본격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성취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 수필이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교훈이 아니라, “다시 그곳에 혼자 가고 싶어진다”는 충동이며, 바로 그 충동이 사건으로서의 수필이 남기는 가장 강력한 흔적일 것이다.
Ⅱ. 클릭
- 의미의 서술과 강도의 발생
1. 의미의 층위
- 자연의 해석과 상징화
<신성리 갈대밭에서>의 미학적 긴장은 작품 내부에 공존하는 두 개의 층위, 즉 의미의 서술과 강도의 발생이 서로 어긋나며 맞물리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이 수필은 처음부터 곧장 강도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익숙하게 기대하는 자연 수필의 문법, 즉 풍경을 통해 정서를 환기하고 삶의 태도를 읽어내는 의미 중심의 서술로 문을 연다. 이는 독자를 안온한 해석의 자리로 초대하는 동시에, 이후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할 것임을 예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발단부에서 자연은 아직 사건이 아니라 읽히는 대상이다. 풍경은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비추는 거울로 배치되고, 자연의 움직임은 인간의 삶을 위로하거나 성찰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의 언어는 충분히 충만해지며, 역설적으로 그 너머의 감각적 과잉과 강도의 출현을 준비한다. 다음에 인용될 장면은 이러한 의미의 층위가 가장 응축된 대목으로, 작품이 기존 수필의 문법에 발을 딛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해질녘이다. 이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가라앉히고 명상에 들게 한다. 고개를 구부리고 온몸에 햇살을 받고 선 금갈대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겸허한 감사의 몸짓들이 일렁인다. 저쪽 금강 너른 물의 잔물구비들이 쉴 새 없이 금빛 갈채를 보낸다. 오르세미술관에서 대면한 밀레의 「만종」에서 느꼈던 숙연함보다 더욱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성실히 하루를 보낸 이들이여, 수고하였노라.”
-<신성리 갈대밭에서> 중에서
이 작품의 발단부는 분명히 기존 수필의 문법에 가깝다. 갈대밭이라는 자연 풍경은 그 자체의 물질성보다는, 인간의 정서와 가치가 투사된 대상으로 먼저 제시된다. “고개를 구부리고 온몸에 햇살을 받고 선 금갈대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라는 문장에서 갈대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몸짓을 닮은 존재로 의인화되며 하나의 상징적 장면을 형성한다. 이때 갈대의 움직임은 자연 현상의 결과라기보다, ‘겸허함’과 ‘감사’라는 도덕적 태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로 읽힌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러한 상징화는 더욱 분명해진다. “성실히 하루를 보낸 이들이여, 수고하였노라.”라는 문장은 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 배치되지만, 그 실질적 기능은 풍경을 인간 윤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있다. 갈대밭은 더 이상 스스로 말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도덕적 화자처럼 기능한다. 이는 자연을 삶의 거울로 삼아 인간의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전통적 수필의 핵심적인 서술 전략이다.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높은 안정감을 제공한다. 독자는 장면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작가가 제시하는 의미의 방향에 비교적 수월하게 합류한다. 갈대의 고개 숙임은 겸손으로, 해질녘의 정적은 하루를 마감하는 성실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의미는 이미 정리된 상태로 제시되며, 독자는 그것을 따라가며 공감하거나 수긍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독서의 중심은 감각의 흔들림보다는 의미의 합의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감각의 긴장은 상대적으로 억제된다. 갈대의 색, 소리, 냄새, 바람의 밀도는 아직 독자의 신체를 직접 건드리기보다, 해석 가능한 이미지로 정돈된다. 자연은 사건이기보다 읽히는 텍스트가 되며, 독자는 자연 앞에서 머무르기보다 의미를 통해 그 장면을 빠져나온다. 이 지점까지의 수필은 자연을 ‘겪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는 대상’으로 제시하는 전통적 수필의 미학을 충실히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의미의 층위는 단순한 관습적 반복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충분히 충만해지고 안정적으로 구축되었기에, 이후 등장할 감각의 과잉과 강도의 출현은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초반부의 의미 중심 서술은 작품 전체에서 강도가 발생하기 위한 예비 단계, 혹은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의미의 세계가 단단히 세워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흔들리며 무너지는 순간 또한 또렷하게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강도의 층위
- 감각의 밀도와 사건의 생성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의미의 안정 지점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갈대밭은 더 이상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감각이 밀려오는 장으로 변모한다. 이 전환은 설명이나 논증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의 리듬과 감각의 중첩을 통해, 독자가 인식하기도 전에 서서히 발생한다. 여기서 수필은 자연을 ‘읽는’ 태도를 중단시키고, 독자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의미는 물러나고, 대신 감각의 강도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것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밀도다. 냄새, 촉감, 기억이 논리적 인과 없이 연쇄되며 하나의 사건을 형성한다. 각각의 감각은 무엇을 뜻하기 위해 호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발생하며, 서로 얽히고 중첩되면서 독자의 신체에 직접 작용한다. 들뢰즈가 말한 바와 같이, 사건은 의미가 아니라 강도로서 존재한다. 다음에 인용될 대목에서 갈대밭은 더 이상 도덕적 풍경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사건의 장으로 제시된다.
갈대밭에서는 나락을 타던 마른 논에서 뿜어 나오던 볏단 내가 난다. 숨바꼭질을 하다 숨은 낙엽더미 뒷자리에서 치마에 붙은 검불 내가 난다. 빈 논의 짚동가리 속에 기대어 앉았다 일어서면 왠지 모를 아련함에 뒤돌아보게 하던 그런 냄새가 난다. 오래 전에 암사동 선사거주지에서 신석기시대 혈거주거를 본 적이 있다. 이엉을 인 움집에 살던 원시인들은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들이었다. 인연 따라 몇 번의 환생을 거쳐 다다른 이곳 신성리 갈대밭 가운데서 나는 오랜 세월 전 소박하던 옛집의 냄새를 떠올리게 된 것은 아닐는지.
- <신성리 갈대밭에서> 중에서
그러나 텍스트는 점차 의미의 설명을 벗어나 강도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냄새, 촉감, 색채가 논리 없이 연쇄되며 독자의 신체에 직접 작용한다. “갈대밭에서는 나락을 타던 마른 논에서 뿜어 나오던 볏단 내가 난다.” “숨바꼭질을 하다 숨은 낙엽더미 뒷자리에서 치마에 붙은 검불 내가 난다.” 이 문장들은 무엇을 ‘뜻한다’기보다,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시간과 기억을 한꺼번에 호출한다. 설명되지 않은 채 밀려오는 감각의 집적은 독자에게 해석 이전의 체험을 요구한다. 여기서 수필은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강도의 장(場)을 형성한다.
놀의 포용력을 보아라. 옅은 잿빛으로 물든 갈꽃의 솜털조차 붉게 물들었다. 갈의 몸속에는 원래부터 자주라는 색이 살았었다. 불그레하던 꽃은 이제 자갈색으로 변하였지만 몸에 남아있던 자주가 풀려 놀을 붉혔을까. 포슬대며 일어서는 작은 소리들이 거친 잎새 틈에서 스며 나와 군무를 춘다. 스르륵 스르륵 자기들이 일으키는 성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단단해진 내 마음도 풀려 어느새 그들을 따라 움직인다. ‘갈꽃’이란 말을 소리 내어보면 그 하얀 손짓에 어울리지 않게 서글프기도 하고 이마를 차게 식히는 설렁한 한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멀리 시선을 두면 놀에 물 드는 갈대숲은 부드러운 모포가 되어 마음을 감싼다.
-<신성리 갈대밭에서> 중에서
특히 다음 대목은 이 작품이 도달하는 강도의 미학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포슬대며 일어서는 작은 소리들이 거친 잎새 틈에서 스며 나와 군무를 춘다.” 여기서 소리는 무엇을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메시지를 지닌 기호가 아니라, 리듬과 진폭을 가진 물질적 파동으로 존재한다. 독자는 그 소리를 해석하지 않고, 그 소리 속에 잠시 몸을 맡기게 된다. 이때 독서 행위는 이해의 과정이 아니라, 감각의 침잠과 동조에 가깝다.
이 소리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배열되지 않는다. ‘왜’ 소리가 나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리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리고 그것이 독자의 감각을 어떻게 흔드는가이다. 잎새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미세한 마찰음은 문장 속에서 반복과 여백을 통해 증폭되며, 하나의 리듬을 형성한다. 이 리듬은 독자의 호흡과 보폭, 나아가 내면의 긴장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의미가 아니라 강도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갈대밭은 더 이상 정적인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을 발생시키는 사건적 장치, 즉 정동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장(場)이 된다. 갈잎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은 주체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 이전에 존재하던 정동의 흐름이, 주체를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들뢰즈적 의미에서 사건은 이미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생성 중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강도는 단지 청각에 머물지 않는다. “단단해진 내 마음도 풀려 어느새 그들을 따라 움직인다”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강도는 신체적 반응으로까지 이어진다. 마음의 변화는 결심이나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감각적 리듬에 동기화된 결과다. 독자 역시 이 문장을 읽는 동안, 마음이 ‘풀린다’는 표현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갈대밭은 의미를 해석하는 장소가 아니라, 몸과 감각이 변화하는 사건의 현장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이 대목에서 수필은 자연을 설명하거나 찬미하는 장르적 관습을 벗어나, 정동의 흐름을 조직하는 형식으로 변모한다. 갈대숲의 소리는 교훈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독자의 감각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며, 그 사라짐 속에서 하나의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그 변화, 설명할 수 없으나 분명히 감지되는 흔들림이 이 작품이 성취한 강도의 미학이며, 본격수필이 도달하는 사건적 문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 비움의 윤리
- 강도가 남기는 잔여
작품의 결말부에서 ‘비움’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사건을 통과한 뒤에 남겨진 결과로서의 강도로 제시된다. “황망한 내 욕망과 걱정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라는 문장은 주체의 의지나 결단을 강조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버리려고 애썼다’거나 ‘깨달았다’는 서술이 없다. 오히려 갈대숲이라는 강도의 장을 한참 동안 통과한 뒤, 주체에게 이미 일어나버린 변화가 담담하게 보고될 뿐이다. 비움은 수행의 목표가 아니라, 사건 이후에 도착한 상태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서 의미는 항상 뒤늦게 따라온다. 독자는 ‘왜 비워졌는가’를 즉각적으로 설명받지 못한다. 갈대가 정화식물이라는 정보, 강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인식은 비움의 원인이라기보다,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이해의 층위에 가깝다. 핵심은 설명이 아니라, 욕망과 걱정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 그 자체, 다시 말해 변화의 발생성이다. 이는 본격수필이 의미의 전달보다 사건의 흔적을 중시하는 형식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강물은 거절을 모른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탁한 것들일지라도 품고 녹여 함께 간다. 이 안쓰러운 순례자에 발을 담그고 갈대는 결심하였다. 내가 거름판이 되리라. 사람들은 그들에게 정화식물이란 훈장을 달아주었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하천의 물을 거르기 위해 안산시가 인공으로 대규모 갈대습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갈대는 조금씩 여위어져서 이제는 속이 비었다. 한참을 갈대숲에 이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황망한 내 욕망과 걱정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행여 빈 갈대 속에 그것들이 들어앉을까 염려되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갈대들이 속삭인다. “잊어버려. 잊어버려.” 흔적 없이 처리해준 그들에게 정다운 눈길을 보내본다. 이제 나도 그들과 어깨를 겯고 함께 바람을 탈 수 있을 것 같다.
-<신성리 갈대밭에서> 중에서
특히 “잊어버려. 잊어버려.”라는 갈대의 속삭임은 교훈적 명령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 지침이 아니라, 이미 비워진 상태에서 울려 나오는 정동의 잔향에 가깝다. 갈대는 가르치지 않고, 설득하지 않으며, 다만 무심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 반복 속에서 주체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비움은 의식의 성취가 아니라, 강도를 견뎌낸 신체가 자연스럽게 도달한 평형 상태다.
이 지점에서 ‘윤리’는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으로 전환된다. 갈대가 스스로를 비워 물을 정화하듯, 주체 역시 자신을 비운다는 결심 없이 세계와 나란히 선다. “이제 나도 그들과 어깨를 겯고 함께 바람을 탈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문장은 동화나 합일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자연 사이의 위계가 사라진 자리, 다시 말해 사건 이후에 형성된 새로운 배치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비움은 도달해야 할 의미가 아니라, 강도가 지나간 뒤 남은 잔여의 윤리다. 그것은 설명될 수 없고, 반복해서 가르쳐질 수도 없다. 다만 한 번 통과한 이는 그 상태를 기억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성리 갈대밭에서>는 기존 수필이 즐겨 사용해온 깨달음의 언어를 넘어서, 본격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사건 이후의 문학, 즉 강도가 남긴 침묵의 윤리를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
Ⅲ. 로그아웃
- 의미를 넘어 강도로 남는 수필
<신성리 갈대밭에서>는 기존 수필과 본격수필의 경계에서, 의미에서 강도로 이행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수필은 자연을 해석하고 교훈화하는 의미의 언어를 전면적으로 폐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점차 해체하고 느슨하게 만들며 감각과 물질, 리듬이 주도하는 강도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의미는 여전히 문장 속에 남아 있으나, 더 이상 독서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를 통과한 뒤에 남는 흔적이자, 사후적으로 따라오는 이해의 층위에 머문다.
기존 수필이 독자에게 “무엇을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가”를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해왔다면, 이 작품은 그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 여기서 독자는 감정의 동일화나 교훈의 수용자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직접 통과하는 존재가 된다. 작품이 묻는 것은 감상의 내용이 아니라, “어떤 힘이 당신을 스쳐 지나갔는가”, “당신의 감각과 리듬은 어떻게 변했는가”이다. 의미는 소거되지 않지만 중심에서 물러나고, 중심에는 갈대숲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강도, 그 강도를 견뎌낸 뒤 남는 침묵과 충일의 감각이 자리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수필은 수필이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수필은 더 이상 삶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 다시 일어나고 흔들리는 자리, 독자의 신체와 감각이 변형되는 사건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자연은 교훈의 원천이 아니라, 강도를 발생시키는 장(場)이 되고, 주체는 의미를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에 노출되는 존재가 된다.
<신성리 갈대밭에서>가 보여주는 것은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에 기대어 쓴 본격수필의 하나의 도달점이다. 그것은 의미를 폐기함으로써가 아니라, 의미를 상대화하고 비워냄으로써 가능해진다. 수필이 삶을 말하는 대신 삶이 수필 안에서 다시 일어나게 될 때, 문학은 설명의 언어를 넘어 발생의 언어가 된다. 이 작품은 그 발생의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수필이 강도의 문학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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