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도의 여인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슬도에 닿았을 때, 그 바다는 유난히도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파도는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듯 천천히 흘러내렸다.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바다는 파랗고, 꽃은 노랗고, 그 사이에 선 계절은 말없이 깊어졌다.
나는 그 색들 사이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
그녀는 마치 이곳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바다와 꽃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 풍경 자체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무언가를 찍으려는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유채꽃이 일제히 흔들렸고,
그녀의 머리카락도 조용히 따라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중심이 아니다.
바람도, 꽃도, 사람도
서로를 스치며 하나의 장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머금은 얼굴이 바다 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이미 한 번 본 듯한,
혹은 오래 전 잊고 있던 기억 속에서
조용히 떠오른 얼굴처럼 다가왔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이 장면을 찍는 순간,
이것이 단순한 풍경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슬도의 바다는 소리를 품고 있다.
파도가 바위를 치며 내는 울림은
마치 누군가 오래 전 남겨둔 이야기처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 위에
유채꽃의 노란 빛이 얹히고,
그 빛 위에
한 사람의 미소가 더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계절이 지나간 흔적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사람도 하나의 풍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풍경은
한 사람 때문에 완성된다는 것을.
바람이 다시 불었다.
꽃잎이 조금 더 흔들렸고,
바다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으며,
그녀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도는 그렇게 기억된다.
파도와 꽃과 한 사람이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던 곳으로.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슬도의 여인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