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그리 멀지 않는 옛날,
어느 시골에 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생 처음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하게 된 아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날마다 편지 오기를 고대하던 차에 드디어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반가워서 편지를 개봉하였으나, 자기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글봉사라는 것을 갑자기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편지를 읽을 재주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아래 위로 훑어보던 아버지는 편지를 접어들고 동네로 편지 읽어 줄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때가 낮이라 대부분 일을 나가 텅 빈 동네 집들을 이리 저기 기웃거리던 아버지는 저쪽에서 신사복을 잘 차려 입고 걸어오는 한 길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차림새로 보아 틀림없이 신학문을 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잰걸음으로 신사에게 다가가서 공손히 절을 하고 말을 건냈습니다.
"선생님, 바쁘시겠지만 이 편지를 좀 읽어 주십시오. 아들놈이 서울 공부하러 가서 처음 보내온 편진데, 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니 읽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는 부끄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 신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 신사의 눈에서 굵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라며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슬픈 사연이 적혔길래 남이 저렇게 눈물을 흘릴까?>
이 아버지는 속에서 복받치는 울음을 참을 길이 없어 드디어 목을 놓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그 길손도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길 복판에서 서로 붙잡고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마침 그 길을 지나다가 그 모양을 보고는 자기도 그 옆에 가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아버지는, 울어도 까닭이나 알고 울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신사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울어도 까닭이나 알고 웁시다. 도대체 얼마나 슬픈 사연이 적혔길래 그렇게 울기부터 하십니까?"
그러자 신사가 아주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나도 그것을 몰라서 웁니다. 왜 내가 진작 글을 못 배웠던고, 그것이 후회되고 서러워서 그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듣고 보니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기막힌 얼굴로 그 신사를 쳐다보다가, 이번에는 자기들의 울음에 가담한 또 한 사람에게 운 까닭을 물었습니다.
"이 신사 양반은 그런 사정으로 울었다 치고, 당신을 왜 울었소?"
그러자 이 길손은 면구스런 태도로,
"나는 두 분이 하도 서럽게 울길래, 여기는 울고 가는 길목인 줄 알고 울었지요."
어떻게 예수를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에,
"부모님 따라서 어려서부터 믿었으니까요."
"이웃이 하도 권해서 교회에 나가다가 믿게 되었지요." 혹은,
"믿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감동이 되어서."
"믿고 구원 얻어 영생하려고" 등 저마다의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러한 이유들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 믿는 변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이 자신들에게는 절실하고 타당한 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믿음의 변이 객관적으로도 타당한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울고가는 길목인 줄 알고" 분명한 이유도 모르면서 남이 우니까 옆에서 운 이 사람의 행동은 분명 바보스런 행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예수 믿는 길목인 줄 알고" 바보스럽게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어떻게 보지도, 만나지 못한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 일은 오늘날 우리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도 같은 경우에 해당됩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편지하면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는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하였습니다.
보지 못한 예수, 그 음성을 듣지도 못한 예수를 이렇게 신명을 다해 믿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확실하고 타당한 이유를 찾아보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읽으면 사도 바울이 마게도니아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벌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날 밤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지진이 나며 옥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풀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간수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자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 16:28)고 소리쳤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는데, 죄수들이 하나도 탈옥하지 않고 감옥에 그냥 있다는 것은 보통일 일 수 없습니다. 간수는 등을 가지고 옥에 와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절)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에 바울이 한 대답을 유명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절).
이 말씀은 오늘날 전도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상당히 막연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만 했지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말씀이 이것으로만 끝났다면 막연한 권고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끝내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 3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입니다. 주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통하여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그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록된 주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경 말씀입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 믿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서 예수 믿는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나무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연목구어(緣木求魚))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오직 성경과 성경적인 것만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합니다.
인간의 신앙적 체험이나, 놀라운 이적과 기사일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증언과 일치할 때만 믿음의 바른 증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이하고 굉장한 체험이라도,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이적일지라도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면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체험이요, 이적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 김명호 목사님의 영원한 복음에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변치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해 있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하늘의 기업을 약속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벧전 2:6)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기쁘게 설 것입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말씀을 스스로 깊이 연구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초위에
믿음의 집을 짓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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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2upwBnm3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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