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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회개와 징계
삼하 12:13-23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13-23 / [죄를 사면해 주시는 여호와] 그러자 다윗이 나단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여호와 앞에 죄인입니다.' 나단이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님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14) 그러나 임금님께서 간음과 살인죄로 여호와를 모욕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밧세바가 낳은 임금님의 아들은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15) 나단은 이 말을 마치고 왕에게서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죄악의 씨는 죽는다] 여호와께서는 나단이 왕궁을 떠나자마자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쳐 몹시 앓게 하셨다. 16) 그러자 다윗은 성소로 하나님을 찾아가 계속 이 어린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이렇게 금식기도를 올린 후 왕궁으로 돌아와서도 베옷을 입고 밤을 새우며 맨 땅에 누워서 지냈다. 17) 왕궁의 노인들이 왕의 건강을 우려하여 그를 데려다가 침실에 눕히려 하였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을뿐더러 음식도 먹지 않았다. 18) 이렇게 7일이 지났을 때에 아이가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임금님께서는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 말을 듣지 않고 슬퍼하셨는데, 이제 결국 아이가 죽은 줄을 알게 되면 자살이라도 감행하실지 모른다'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19) 신하들이 이렇게 수군거리자 다윗도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 챘다. 마침내 `아이가 죽었느냐?' 하고 다윗이 묻자, 신하들도 이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예, 죽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그러자 다윗은 당장 땅바닥에서 일어나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발라 단장하고 새 옷을 입은 다음 성소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서 식탁을 차리게 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음식을 먹었다. 21) 신하들은 다윗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임금님께서 그토록 울며 금식하시더니 이제 아이가 죽자 더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어나 식사를 하시니, 그 이유를 저희는 알 수가 없습니다.' 22) 다윗이 설명하였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보시고 아이를 살려 주실지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소. 23) 그러나 이제는 아이가 죽어서 아무 희망도 없는데, 왜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언젠가 나는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만 그 아이를 살려 내어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오지는 못할 것이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간 사람을 놓고서 왜 내가 계속 슬퍼해야 되겠소?' 다윗은 그토록 죽음에 대하여 현실적인 냉철한 사고를 하였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채고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13-15a) 다윗의 회개는 명백하고 솔직하여 아무런 변호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죄를 사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간단명료합니다. 선지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가 믿는 하나님께 훼방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벌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훼방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죄는 간단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구속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다윗 대신 아이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고 다윗 자신은 살아 남았습니다.
다윗의 아이가 죽다(15b-19)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라는 표현은 불륜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아이가 밝혀지지 않은 질병을 앓고 있는 동안 다윗은 애도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윗은 7일 동안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통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다윗이 아이의 회복을 위해서 여호와께 간구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자기는 여호와께 빌 만한 자격조차 없는 줄 알고 여호와의 긍휼만 의지하였습니다.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니(14) 하나님의 처사였고,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의 모습(20-23)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던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나 음식을 먹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신하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윗은 애곡하는 대신 모든 슬픔의 외적인 모습을 거두었습니다.(20) 다윗은 탄원과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더 이상 애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23절은 애도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아이가 되돌아 올 수 있는 장소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합니다. 사죄의 확신과 누림은 회개하는 성도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복된 은총입니다.
적 용 :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라도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변의 특정한 한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사람은 혹 주변에 없습니까?
용서 구하는 방법
1.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자.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상대방에게 잘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해야 합니다.
2. 대상이 주체가 되어야지 사과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면 안 됩니다. 대상이 원하는 사과법이 무엇인지 고민한 후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사과하자.
3. 적절한 보상을 하자. 동료에게 험담하다 들켰다면 사과하는 뜻에서 선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4. 용서해달라고 강요하지 말자. 가장 중요합니다. 용서는 당신이 아니라 상대방이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 설 교 >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 (IV): '죄책감'
삼하 12: 15-23
Heal Your Wounded Heart (IV): 'Guilt'
1988년 초겨울,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주 동안 세계적인 관심을 끈 것은 대통령 후보들인 조지 부시와 마이클 듀카키스가 아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앞 바다에 사는 두 마리의 고래였습니다. 해양 생물학자들이 '본네트'(Bonnett)와 '크로스비크'(Crossbeak)라고 이름을 붙인 고래 두 마리가 얼음덩이에 갇혀 죽게 된 것입니다. 에스키모인들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서는 동력 사슬톱과 쇠막대기로 얼음을 깨부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언론이 즉각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아르키메데스식 나선 트랙터(Archimedean Screw Tractor)가 고래와 얼지 않은 바닷물 사이에 있는 얼음들을 깨려고 했지만 속도가 너무 늦었습니다. 즉시 주 방위군(National Guard)이 두 대의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그 밑에다가 5톤 짜리 콘크리트 얼음 분쇄기를 매달아 고래가 갇혀있는 얼음덩이 위를 내려쳤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마저도 신통치 않게 되자 소련측에서 11층 건물 정도 크기의, 20톤 짜리 얼음 부수는 배를 파견해 주어서 고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얼지 않은 해역까지 약 60마일 정도 고래를 옮기는데 소요된 돈은 150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세상이 얼음에 갇힌 고래 두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죄책감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다 두 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첫째는 죄이고, 둘째는 죽음입니다. 바울은 롬 3: 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또한 바로 이 죄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 6: 23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죄와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죄와 죽음의 문제가 빠진 기독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시리즈 설교의 네 번째 주제로 '죄책감'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를 짓고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지존파」라는 무리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체포되어서 TV앞에 선 그들의 모습에 온 국민들이 경악했습니다. 사람들을 죽여 놓고서도 도무지 죄의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부패하고 마비되어서 기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지나치게 예민해서 보통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들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죄를 짓고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낫겠지만, 이들 역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하면 영혼에 깊은 병이 들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이 심한 사람들은 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를 학대하기 쉽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살게 됩니다. 분명히 지나친 죄책감은 치료받아야 할 마음의 병입니다.
우리는 죄책감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으로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다윗처럼 죄를 많이 짓고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또한 다윗만큼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며 통회자복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다윗이 죄를 지은 뒤 죄책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봉독한 성경 말씀은 다윗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은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해서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동침으로 인해서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주 간교한 흉계를 꾸밉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들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우직하기만 한 우리아는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고생하는데 자기만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1차 작전에 실패하자 다윗은 더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전쟁에 나가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 격인 요압과 내통해서 우리아를 고의로 전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아는 맹렬한 전투 맨 선봉에 섰다가 이스라엘 군대가 일제히 퇴각하는 바람에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져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정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충신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 장군을 비열한 방법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죄를 저지르고서도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아내로 삼았으며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래서 삼하 11: 27 후반부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간음죄에다가 살인 교사죄까지 저지르고서도 도무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자기 죄의 중대성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삼하 12: 13절을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면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첫아들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본문 15절에 보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첫아들이 심한 병을 앓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다윗이 죄책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죄책감 해결하기
1. 죄를 지으면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죄를 짓고서도 양심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 불감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순간적인 정욕에 눈이 멀어서 밧세바와 동침한 뒤 처음에 다윗은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륜의 씨앗이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것을 어떻게 감출까만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 결과 간음죄로 끝날 것이 살인죄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다윗이야말로 특정범죄 가중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고서도 전혀 죄의식이 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 양심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양심의 일식(eclipse) 현상이 나타났던 거지요.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통렬한 꾸지람을 듣고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본문 16-1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쳐서 심히 앓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회개 기도를 했는데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습니다. 심지어 늙은 신하들이 다윗을 땅바닥에서 일으키려 해도 듣지 않고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을 깨달은 뒤 철저하게 죄의식을 느끼며 통회했던 것입니다.
시 51편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일깨워 준 뒤 다윗이 쓴 시입니다. 1-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둔해지고 마비되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추위를 체감하고 더우면 더위를 바로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옳지 않은 일을 했을 경우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2.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순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더라면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양이나 비둘기를 날마다 제단에 바쳐서 자신의 죄를 씻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짐승의 희생제는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번거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영원한 번제가 되게 하심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단번에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히 10: 10은 말씀합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조차 아니하시게 된 것입니다(히 10: 17).
그러므로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때문에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사 1: 18).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죄책감이 반드시 뜨거운 회개와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 란 리 데이비스(Ron Lee Davis)라는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A Forgiving God in an Unforgiving World)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은 받고 있었지만 신학교 시절에 큰 죄를 저질러서 그 비밀스러운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필리핀의 한 신부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지만 마음에 영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비밀스러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확신이 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목회하는 교구에 한 여신도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신비한 환상을 많이 보여준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이 소문을 듣고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이것이 사실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부탁을 했습니다. "다음 번에 당신이 예수님과 대화할 때 이 질문을 꼭 물어 봐주세요. '우리 신부님이 신학교 다닐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예수님 알고 계세요?'" 이 여자 성도는 그렇게 하마하고 약속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신부님은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상 속에서 만났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래, 내가 신학교 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주님이 알고 계십디까?" "신부님, 제가 여쭈어 보았더니 예수님께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어요."
이 이야기는 진짜로 일어난 실화입니다. 예수님도 다 잊어버리신 죄들을 우리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사 43: 25은 말씀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또한 시 103: 12절은 하나님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지나친 죄책감은 금물입니다. 회개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돈의 빚을 졌다가 엄청난 부자가 딱한 사정을 알고 모조리 탕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빚 갚을 걱정만 하고 앉아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책감에는 건설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이 고후 7: 8-10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건설적인 죄책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는 근심'이며 파괴적인 죄책감은 '세상 근심'과 똑같습니다. 건설적인 죄책감,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하지만, 파괴적인 죄책감, 즉 '세상 근심'은 우리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만듭니다(고전 7: 10).
이 두 가지 종류의 죄책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한 사람이 실수해서 다른 사람의 무릎 위에 커피를 엎질렀습니다. 파괴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바보 같으니, 내가 한 짓 좀 봐. 정말 죄송합니다." 이 경우, 실수한 사람은 과거의 일에만 집착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할 것입니다.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냅킨이 있으니 닦으세요." 라고 말한 뒤 세탁비를 지불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파괴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되 문제를 슬기롭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데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건설적으로 해결되면 더 이상 과거의 잘못에 연연해하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딴 일로 넘어가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가 꼭 건설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치실 때 이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회개 기도에만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18절 말씀에 보면 다윗의 신하들이 걱정을 합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과연 다윗왕에게 고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살았을 때에도 우리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저렇게 금식기도만 하셨는데, 이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마 더 놀라고 실망하셔서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챘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보세요.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들이 죽은 뒤 오히려 다윗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왕을 보고 신하들이 깜짝 놀라 묻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오히려 일어나서 잡수시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다윗의 대답이야말로 건설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의 의연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22-23절을 보세요.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죄책감을 느끼며 회개했지만, 일단 문제가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가진 모든 죄책감, 죄의식이 이와 같이 건설적인 것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자복하고 회개했으면 하나님께서 깨끗이 용서하여 주셨음을 믿고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 보기에 아무리 중한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시 103:3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과거에 지은 무거운 죄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든 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맡아주심을 믿으십시오! 왜 여러분 스스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시고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잊으세요!
결론 :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우리 인생
중세에 어떤 수도사들이 산꼭대기에다 수도원을 지어놓고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 밑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이 때 농부 한 사람이 그 수도사 앞에 달려가서 넙죽 절하며 물었습니다. "신부님,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어 놓고 매일 경건 생활을 하시니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시겠어요. 도대체 신부님은 무얼 하고 지내시나요?" 신부님은 농부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을 잡은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나고 …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난답니다."--"We fall down and we get up … We fall down and we get up … We fall down and we get up."
그렇습니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 우리는 죄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또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가장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을 들라하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다윗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흉악한 죄를 저질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죄를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침상이 떠내려 갈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다윗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죄를 지어서 넘어져 있습니까? 이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지 않으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