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과거 일제 37년간의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대부분 사람은 너무나 가난했고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에 모여 많이 울었습니다.
죄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배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 또한 매우 컸습니다.
물론 우는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메마른 눈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휠씬 더 깊은 은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슬퍼하는 자, 애통하는 자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 사람
애통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허무감과 절망을 느끼면서 탄식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능력의 한계 앞에서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회 구조의 한계를 비판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술이나 도박 마약 외도로 마음의 아픔을 잊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내 진실과 실상을 쏟아내며 통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세 한탄하면서 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함"이라는 키워드는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하는 것,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함이 살아나야 합니다.
2.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
성경은 '애통함'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주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예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9~20)
훌륭하게 사역한 사도 바울도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고 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십니다. 사실 사울이 모든 면에서 다윗보다 뛰어납니다. 심지어 사울은 다윗처럼 간음 죄와 살인죄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저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인가? 얼마나 깨끗한가?'를 보지 않으시고, 나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이 용서받고 새사람이 됩니다. 나의 죄와 모든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3. 남을 위해 애통해 하는 사람
성경이 말하는 '애통함'의
두 번째 특징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와 나라와 민족의 죄를 위해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역사를 깊게 묵상해 보면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타인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애통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를 마치 나의 죄처럼 여기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 40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민족의 죄를 자기 가슴에 품고는 끊임없는 눈물을 흘린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애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짜 예수님의 성품을 지닌 사람의 모습입니다. 마음의 넓이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4.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
지금은 울고, 이 땅에서는 애통하지만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깊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카레오" 곁으로 부른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부르시는 것이 위로의 진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내 안에 자리한 애통함이 해소되기 때문에 건강하게 이 땅을 살아갑니다.
예수님도 애통해하는 분이었습니다.
첫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셋째, 십자가 사건을 앞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 애통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땅의 문제와 사람들의 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울면서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 그리고 이 땅을 향해서 울 수 있어야 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천산교회와 성도들이 한 영혼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강을 이루는 바로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2025-3-2